비난하기 어려운 장준혁, 응원해야 마땅한 최도영
<하얀거탑>이 처음 방영된 2007년 초, 나는 결혼 2년차의 신혼이었고 아내가 막 첫 아이를 임신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다지 드라마에 흥미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우리 출판부 남자 디자이너가 이 드라마 얘기를 자주 건넸다. 김명민의 연기가 압권이고 내용 전개도 탁월하니 꼭 보라고, 하얀거탑빠의 수준으로 극찬했다. 당시 큰 화제가 되어 일본 원작, 주인공이 악하다는 점, 외과 막내로 나온 기태영이 유약한 역할이지만 지구 용사 벡터맨에 몸짱이라는 기사들이 기억난다. 당시 나는 <하얀거탑>을 한 편도 보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바쁜 생활인 탓 외에 결정적으로 메디컬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메디컬 드라마는 100퍼센트 외과가 중심으로 나온다. 메스로 가슴을 열거나 머리를 열고 인체 내부를 보여주는 수술실 장면이 꼭 있다. 중환자인 어머니를 간호하는 아픔을 가진 나는 드라마에서까지 병원을 보고 싶지 않았다. 대학시절 <종합병원>을 즐겨 본 뒤 어머니 발병 후 메디컬 드라마는 거의 보이콧해 왔다. 거기다 한참 극이 전개되다가 주인공이 암에 걸리는 이야기는 짜증 유발이다. <하얀거탑>은 내가 보기 싫은 드라마 유형을 갖추었다.
MBC는 <하얀거탑>의 방송 후 11년이 지난 지금 UHD로 복원해서 편성했다. 메디컬 드라마이면서 주인공이 암에 걸려 죽는다는 결말을 다 알고도 나는 1회를 보았다. 그리고 20부작 중 10부쯤 방영한 지금까지 모두 챙겨 보았다. 이렇게 TV 본방을 기다리며 보고, 놓친 편은 다시 보기로 챙겨 본 드라마가 없었다. 결국 평창올림픽 시작하며 남은 편들을 기다리지 못해 HD 버전의 원래 작품을 찾아서 20부 모두를 정주행했다. 드라마 20부작을 완결까지 인터넷으로 정주행한 것은 <하얀거탑>이 처음이다. 그만큼 이 드라마는 탄탄한 시나리오, 탁월한 연출력,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명품 연기, 절묘하게 어울리는 음악 등 모든 요소를 갖춘 명불허전이다.
본래 차승원이 장준혁을, 김명민이 최도영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차승원이 영화 스케줄 때문에 고사하여 장준혁 역할이 김명민에게 떨어졌다. 차승원의 불운이고 김명민의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만나는 <하얀거탑>에서 권력만을 향하는 김명민과 선한 의사 이선균, 그리고 김명민과 대결하는 해외파 천재 차인표, 속물스런 부원장 김창완, 외과 과장 선거 정치판에는 뒤지나 존경받는 외과 스승 이정길까지 캐스팅이 이보다 완벽한 드라마가 있을까 싶다. <불멸의 이순신>에 이어 <하얀거탑> 후 <베토벤 바이러스>로 연기본좌라는 극찬을 이어간 김명민이 장준혁을 맡은 게 다행이다. 이 드라마가 명품이 된 1등 공신은 김명민의 연기력이다.
11년 전에도 지금도 흙수저의 삶은 처절하고 고달프다. 사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지만 장준혁 과장을 지켜보며 미워할 수는 없는 것은 그가 권력만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에 설득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홀어머니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친구 최도영 선생이 자기 때문에 명인대학을 그만둔 뒤에 회상하는 장면 등 그의 삶에는 인간의 숨결이 스며 있다. 오직 자신만을 최고의 자리에 끌어올리기 위해 주변 사람을 보지 않고 자기 실력만 믿고 쟁취해 가는 모습에서 드라마는 마치 선한 사람이 해피한 상황을 맞는 듯한 음악과 화면으로 보여준다. 그처럼 명령할 수 있는 자리, 자신을 따르는 수하의 인생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 세계 학회장의 아내를 수술해서 성공시키는 실력, 드림카, 언제든 달려가면 품어주는 매력적인 여자 등 세상이 부러워하는 걸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성취에 로망을 갖지 않는 자 누구일까. 장준혁은 수술을 성공시키고 기뻐서 웃는 게 아니라 자기 실력이 가져다 줄 세상의 힘이 더 커진 것이 기뻐서 웃는다. 금수저인 스승을 제치고, 환자만을 생각하는 친구도 자신의 명예와 권력에 해가 되면 버릴 수 있다. 환자를 생각하는 외과 과장이 아니고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수술을 완벽하게 해내는 자기 명성에만 집중한다.
장준혁이 달려가는 그 권력의지에 조금도 걸려 있지 않은 현대인이 있을까? 회사에서 가정에서 모든 인간은 권력 추구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얀거탑>이 명품인 것은 선한 주인공이 악과 대결하는 뻔한 구도가 아닌 점이다. 우리 안에 있는 권력적 속성, 인정 욕구를 장준혁을 통해 다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욕망 안에 내가 들어 있다. 그가 잘 돼서 획득해 가는 권력에의 호응은 곧 자기 욕망의 투영이다.
드라마 당시에 디시인사이드에서 하얀거탑 갤러리가 생겨 명인대학교 로고로 만든 짤과 스핀오프 같은 게시물들로 뜨거운 반응이었다고 한다. 당시 갤러리들, 블로거들로부터 책임감 강하고 가장 의사다운 최도영 교수가 장준혁의 거짓을 고발했다고 비난이 일었다고 한다. 모 문화평론가는 <하얀거탑>이 위험한 시대정신을 반영했고 11년 후에도 뜨거운 반응을 얻는 것은 마치 도덕적으로 결함이 가득해도 욕망을 실현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는 시대정신이 변함없음을 증빙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장준혁에 매력을 느끼면서 MB나 박근혜가 아닌 노무현과 문재인을 응원할 수 있다. 이건 잘 만든 드라마와 입체적인 캐릭터에 관한 흥미이지 욕망의 시대정신이라고 볼 일은 아니다.
내과 최도영 교수로 분한 이선균은 김명민의 카리스마에 대항하면서 감싸주는 따뜻한 인물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하얀거탑>을 통해 이선균의 매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약자를 위로하는 부드러운 음성, 환자와 가족을 모두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책망하지만 책임감 넘치고 옳은 길에 서는 그가 잘되는 것이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장준혁의 야심이 일으킨 사건으로 명인대학을 떠나지만 결국 장준혁은 최도영을 찾아가 자신의 몸을 검사해 달라고 부탁한다. 인간은 높은 곳에 우뚝 서기 위해 힘이 있는 사람에게 아부해도 자신이 약해지면 가장 올바른 사람이 먼저 생각난다는 것을 명시해 준다. 시청자 중 일부는 최도영이 진실한 증언으로 장준혁을 몰아붙인 데 대해 비난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장준혁에게 감정이입한 것은 그 일부 시청자들의 과민함이다. 도덕적으로 옳은 조직이어야만 결국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장준혁과 같은 리더의 승승장구를 바라는 건 참 얕은 생각이다. 일부이기 때문에 더 거론할 필요는 없다.
장준혁을 존경하지만 결국 의료사고임을 입증하는 염동일 선생은 소심하고 유약한 캐릭터가 아니다. 난 이 드라마에서 염동일의 심경변화를 유심히 보았다. 외과에서 가장 약한 위치이지만 그는 선배들의 거짓과 속물을 벗어나 양심의 편에 섰다. 절대자와 다름없는 장준혁에 반기를 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국립대 외과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할지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 하다. 염동일 선생처럼 조직에서 양심에 위배되는 사건에 끌려가는 짓을 중단할 벡터맨은 별로 없다. 세상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굶지 않으려면 타협하는 거라고, 좀 비겁해져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최도영 교수나 염동일 선생처럼 장준혁 같은 자기밖에 모르는 권력자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외칠 수 있는 소리가 얼마나 있을까. 내부에서 그런 외침이 가능하려면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최도영, 염동일이다(염동일 역의 기태영은 SES 유진의 남편이다. 지금 아기 아빠로 자신의 11년 전 연기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자신감과 배짱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준혁은 자신이 최고의 실력으로 다루는 암에 걸린다. 의학드라마에서 법정드라마로 바뀌어 재판에 한 번 이기고 진 뒤에 상고를 앞두고 수술실에서 쓰러진다. 그의 마지막 시간에 모두가 슬퍼한다. 보통 악인이라면 쯧쯧 혀를 차며 벌 받는구나, 했겠지만 <하얀거탑>에서 장준혁의 불치와 시한부 시간은 모두에게 슬픔이다. 그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화려한 권력의 정상에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가는 그가 자신의 수술 장면을 회상하는 시간, 이례적으로 빨리 전이되는 자신의 암을 연구해 달라고 시신을 기증하며 해부실에서 종영하는 장면에서 <하얀거탑>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20부작이 너무 짧을 만큼 대미가 아쉽다.
쪽대본으로 급하게 만드는 드라마들과 달리 <하얀거탑>은 일본의 원작 소설과 드라마의 탄탄한 구성이 돋보였다. 이전 장면에서의 복선은 절묘하게 다음 회에서 중요한 근거로 척척 들어맞았고, 이야기 흐름이 공감 영역대를 깊이 파고들어 인물들 모두 생생히 살아 있다. 무엇보다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캐릭터를 만들지 않고,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나쁜 짓을 하면서 괴로워도 하는 인간의 다면적인 모습을 디테일하게 보여 준 작품이다. 11년이 지나 리마스터링 된 드라마로 선택될 만하다. 막장 소재에 툭하면 소리 지르고 싸우기만 하는 국내 드라마들은 전파 낭비다. 이런 탄탄하고 치밀한 이야기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명작이 좀 많이 나와 주길 바란다.
김명민, 이선균 그외 배우들 모두 최고다. 당시 유행한 폴더폰, 장발 머리, 둔탁한 컴퓨터 등 촌스럽지만 애틋하게 보인다. 지금 활동하는 배우들의 11년 전 모습을 보는 재미와 시대가 흘러도 관통하는 탐욕에 대한 서사가 즐거웠다.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과거를 보고 현재의 고달픈 마음을 위무할 수 있는 복고 키워드의 리마스터링 작품이 또 나와줬으면 한다.
흙수저 장준혁이 금수저들의 갑질을 엎어주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분노심의 방법과 과정에 최도영의 휴머니즘이 없으면 흙수저 권력자들이 더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가 될 것이다. 묵직한 메시지는 시대가 변해도 새로운 무게감으로 가슴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