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기 원하는 우리는 존중이 필요한 이들을 얼마나 귀하게 마주하는가
지난 주말의 축구 이벤트 유벤투스 친선경기의 호날두 노쇼 사건이 연일 뉴스에 등장한다. TV로 생방송을 지켜보면서 한국을 호구로 생각하는구나 하는 무시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호날두는 한국 팬을 그렇게까지 대놓고 무시하고 갔을까만을 생각하면 이 사건이 주는 본질을 놓친다.
자신이 너무나 존경하는 스타를 마주할 때 그의 팬서비스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잠시만 나와 눈을 맞추고 웃어주거나 손을 흔들어주면 평생의 소원을 이룬 듯한 선물로 여긴다. 지난 주말 호날두에게서는 한국 팬들에 대한 어떠한 서비스도 존중도 없었다. 벤치에 앉아서 상암 경기장 스크린에 얼굴 비춰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와 한국 팬의 수평적 상호작용은 털끝만큼도 볼 수 없었다. 한국 팬은 별로 소중하지 않은,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다시 만날 필요성 적은 인연 정도로 간주된다.
서구사회의 일상에서 강조되는 매너 혹은 교양이 리스펙트의 규칙이다. 만약 매너 혹은 교양을 인종이 다르다거나 출신지가 약소국이라고 적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갑질 혹은 인간 말종에 해당된다. 인간은 상호 인정을 토대로 관계의 깊이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가 축구스타로서의 이미지 관리에 중국의 거대한 시장은 존중할지언정 한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면 우리가 윤리적 문제까지 거론하는 건 당연하다. 무시해도 될 만한 작은 나라이고 발을 디뎌주는 것만으로 감동하지, 뭔 잡소리가 그렇게 많냐는 속내조차도 읽을 수 없는 그에게 한국 팬은 분노심이 끓는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해 있어도 자신의 주급 정도도 안 되는 위약금에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사랑했던 스타의 갑질, 무시, 모멸감에 대해 한국 팬은 포르투갈 가난한 집에서 심장병을 달고 태어난 드라마틱한 축구 천재로 숭배하다가 한순간에 윤리적으로 싹수없는 놈이라는 비아냥을 터뜨리고 있다. 이전까지 어린이를 사랑하고 헌혈을 위해 문신을 하지 않는다는 미담 가득한 호날두가 날강두가 되었다.
힘 있고 부자이며 세계적인 스타인 호날두는 한국을 무시한 대가로 싹수없는 강도로 전락했지만, 그는 오늘도 그의 일상을 살고 있다. 사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행동에 한국 매체와 팬들은 더 화가 났다. 하늘의 별처럼 가까이하기에 멀었던 스타지만 이제는 이런 태도 논란에 스타가 쓰레기가 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내가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본질은 이런 스타의 태도 논란과 갑질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듯이, 한국이 외국인 노동자와 사회의 힘없는 계층에게 보이는 갑질과 태도는 어떠한가 하는 부분이다. 무시하는 사람은 무시당하는 사람을 감지하지 못한다. 힘을 향해 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누릴 권력과 위세만 생각한다. 리스펙트의 부재는 우리 자신에게 더 적용하고 생각해야 할 주제이다.
불과 20년 전 IMF의 환난에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 발전하면서 상호 인정의 원칙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힘이 있고 돈이 많아도 약자의 말을 귀 기울이고 내가 너의 말에 내 행동을 바꿀 수 있어,라는 경청의 태도를 접하기란 하늘의 스타 가까이 마주하기만큼 어렵다.
매너와 교양이 세워지지 않은 우리에게 호날두는 반사체이다. 자주 무시당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예민함이 있다. 재수 없는 놈이라 욕하기 전에 나의 재수와 싸가지는 얼마나 있는지 '예민하게' 살펴보는 것이 성숙한 매너의 시작일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유익하다는 설교를 무수히 듣는다. 어떤 모습으로든 행동하기 전에 내가 무시한 사람들 한번 떠올려보는 것이 호날두가 남긴 메시지란 생각이 든다.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자.
그리고 내가 무시당한 상처에 집중하는 것보다 내가 무시해서 상처 준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호날두는 그런 어른이 될 인간은 아니고 그저 돈 많은 축구인이다.
경상도에서는 축구를 바보라고 뜻한다. 날두, 이 축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