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복과 파란 구두를 수리하며 얻은 유쾌한 메시지
신병훈련소에 가면 이름 대신 사용할 번호표 명찰을 준다. 그리고 바늘과 실도 준다. 조교들은 짧은 시간 안에 옷에 달라고 명한다. 지금은 종영된 MBC 예능 <진짜 사나이>를 봐도 훈련소에 첫발을 내디딘 남녀 연예인들이 모두 그 바느질 장면에서 버벅거리는 분량을 보여줄 만큼 가족과 떨어진 뒤 강렬한 첫 경험(?)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바느질 솜씨를 타고났나 보다. 엉성한 바느질 때문에 훈련 중에 자주 터져 나가던 동기들에 비해 내 옷의 명찰은 거의 오버로크 수준의 깔끔함을 자랑하며 왕튼튼 달려 있었다. 훈련소 퇴소식 때 면회 오신 어머니가 군복 가슴에 달린 내 명찰의 바느질 솜씨를 보고 놀라셨다. 그때 허리를 뒤로 젖히며 크게 웃으시던 엄마 모습이 생각난다.
아침마다 깨끗하게 빨아 놓은 어머니 옷을 입혀 드릴 때는 옷의 팔 부분을 먼저 적당히 접은 뒤 한쪽 팔부터 입히고 등을 들어서 옷자락을 밀어 넣은 후 반대편에서 옷자락을 당겨 남은 한쪽 팔을 입힌다. 그래서 옷의 뒷목 부분이 당김을 견디지 못하고 잘 찢어진다.
여름엔 모시메리를 입혀드리지만 부드러운 면 소재의 앞 단추가 있는 환자복은 새로 사기도 뭐하고, 자꾸 헤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서 시간을 내어 촘촘히 바느질을 하고 약해 보이는 단추도 실로 더 보강했다.
어머니 간호하던 시절에 가장 오래 신은 나의 파란 구두는, 맑은 물에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그야말로 새파란 에나멜 구두다. 처음 이 구두를 신고 교회에 갈 때 “이런 걸 어떻게 신고 다니냐? 십 대냐? 그것도 교회에서……”라고들 하실까 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달리 신을 신발도 없었기에 눈 딱 감고 신고 갔다. 예배 마친 뒤 점심식사를 들기 위해 본당 앞쪽 식사 줄에 서 있는데, 내 구두를 본 청년회 친구며 후배들이 자꾸 웃었다. 좀 민망해지려는 찰나, 줄 뒤쪽에 서 계시던 장병두 목사님이 다가와 건네신 말씀이 있다.
“교진이가 마음이 다 치유되어 아주 밝아졌구나!”
장 목사님은 내가 어머니의 생명을 지키며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에 늘 격려와 기도로 응원해 주셨다. 축 처져 있지 않고 톡톡 튀는 패션과 밝은 표정으로 교회에 나와 생기 있게 사는 얼굴을 큰 형님처럼 기뻐해 주셨다.
‘하하, 그래요. 마음이 계속 상처투성이면 누가 파란 구두 신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구두는 단순히 튀는 패션을 좋아해서 산 것이 아니다. 돈은 없고 신발은 다 떨어진 시기, 그러니까 IMF 여파로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해 가던 1999년 봄, 강변테크노마트 1층 대형 매장에선 매일 중소기업 상품들이 헐값에 판매되는 이벤트가 열렸다. 우연히 들렀다가 한구석 매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에 가서 보니 제법 이름이 알려진 모 브랜드 신발이 떨이로 팔리고 있었다. 제법 멋지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부츠도 무조건 한 켤레 1만 원이었다. 이때다 싶어 내 발에 맞는 사이즈를 열심히 찾았지만 표준 발 사이즈는 이미 품절이었다. 아쉬움에 그냥 돌아서려는데 모퉁이 아래 칸에서 뭔가 새파란 게 눈에 띄었다. 꺼내 보니 힙합 스타일의 문제의 그 파란 구두다. 신어 보니 내 발에 딱 맞았다. 앞도 뭉툭하니 넓어서, 안방마님의 영원한 로맨스 상대인 마당쇠 발인 내 발에도 무척 편했다. 디자인과 색깔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순전히 싼 맛에 구입했다.
파란 구두를 신고 외출하면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며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나만이 느끼는 유쾌함에 흥이 나기도 한다. 지나가는 행인들도 마치 예쁜 여자(?) 쳐다보듯 내 구두에 시선이 머문다. 처음 신고 교회에 갔을 때 뜻밖에도 목사님이 격려해 주신 덕에 용기를 얻어 누가 쳐다보든 말든 용감하게 잘 신고 다녔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싸구려 값을 하는지 신고 다닌 지 일주일도 안 돼 신발 등의 실밥이 모두 터져 버렸다. 구두 수선점에 맡기려고 알아보니 수리비가 3만 원이었다. 구입가보다 세 배나 비싼 값을 지불하고 수선받을 수가 없어 바늘 통을 열고 한번 꿰매어 봤다. 손가락에 피가 나고 바늘 한 개를 부러뜨린 후 내 손으로 말끔하게 수리해서 한 시간 만에 내 파란 구두를 완전히 부활시켰다. 그 후 4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리 막 신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특유의 광이 나서 닦으면 더 튀어 보이므로 일부러 먼지 앉아도 안 닦는다. 타고난 광택 덕분에 여전히 거리에서 사람들 눈길을 끄는 파란 구두는 내게 ‘연예인 구두’가 되었다.
교회에서 나의 파란 구두를 보는 사람들 반응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이제 그만 신고 버리라며 구두 티켓을 선물하는 사람들.
네 장 정도 받았다. 계속 신고 다니면 나중에 구둣가게도 차릴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농담으로 한 백 장 받아서 이다음에 우리 딸 시집도 보내고, 가세도 일으켜 보겠다고 떠들고 다닌다. 명절이나 도우미 아주머니 휴가 때 우리 집에 와서 도와준 교회 동생들 혹은 엄마 가게 일로 고생하는 여동생에게 선물로 썼다. 주일 아침 파란 구두 신고 교회에 가려고 구두끈을 맬 때면 티켓 선물한 사람들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날 생각해 주는 분들께는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냥 신고 다닌다.
두 번째, 멋지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들.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멋지게 봐주시니 힘이 난다. 근데 너무들 크게 웃으신다. 값싸지 안 떨어지지, 사실 이보다 좋은 구두 있으면 나와 보라고!
세 번째,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놀리고 핀잔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 또 감사다.
이 구두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 약속할 때 아주 유용하다. 한번은 월간지 <낮은울타리>의 기자가 전화를 주시며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미리 귀띔해드렸다.
“저 파란 구두 신고 가요. 금방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야말로 그 기자 분과 나는 아주 쉽게 만났다. 이 새파란 구두 덕분이다.
구입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실밥이 다 터져나간 구두처럼 내 몸과 마음은 멀쩡했다가도 자주 고장 난다. 별 쓸모가 없어 버려져도 상관없을 만큼 부실하다. 약한 부분은 너무나 많고, 고통이 가해지면 견디지 못하고 쉽게 허물어진다.
그런데!
만 원짜리 구두도 버리기 아까워 직접 고쳐서 신을 때 더 사랑스러운데 예수의 피 값을 치르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겠는가. 지금까지 내가 연약해 쓰러지려 할 때마다 참을성 있게 줄곧 수리해 주셨다. 나는 고장 나기 전보다 더 쓸모 있는 모습을 얻었다. 버려져도 될 만큼 엉성한 존재가 제대로 되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때 그분은 나를 더 귀하게 보듬어 주실 것이다. 아주 작은 투자를 해도 버리는 것이 아까운데, 아들의 생명을 주고 택한 백성들을 그분은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약한 부분은 꿰매고 보강하여 더 강하게 하고, 바른 목적의 삶을 향해 갈 때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 주실 것이다.
세상은 갈수록 능력과 실력을 중요시하지만, 가난함과 약함을 가진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어야 존귀해진다. 가난함과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자주 나타날 것이고, 그분의 보호에 힘입은 나는 더 강해지고 사랑받기에 합당한 모습이 될 것이다. 바느질 후 제 몫을 더 튼실하게 해내는 환자복과 파란 구두처럼 내 인생은 자주 수리를 받고 더 선한 가치를 추구할 것이다. 고장이 날 때마다 그 결핍을 채우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생기 있게 걸어갈 수 있다.
결핍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어둡고 고단한 인생길에서 나는 유쾌한 일들로 새파란 희망을 일구어 간다. 내일은 오늘보다는 좋은 날이 오겠지 믿으며,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 있다. 내일 일을 모르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1997년 11월 27일 그 새벽에 보호자 각서를 쓰고 수술실로 어머니를 들여보낸 뒤 차가운 수술실 철문 앞에서 기도했을 때 “교진아, 내가 네 어머니를 살릴 거야. 그런데 너는 식물 상태의 엄마를 오랜 세월 책임지고 돌봐드려야 해” 하고 미래의 일을 알려 주셨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무슨 일이 다가올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내일을 소망하기 때문에 나는 긴 세월의 오늘을 견딜 수 있었다. 미리 다 알았다면 하루도 못 견딜 날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1년, 5년, 10년, 그리고 20년이 흐른 그 세월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특별한 간증이 되고 있다. 어머니는 낫지 않으셨지만 우리 모자의 사랑은 한국 사회에 소중한 메시지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며 보듬고 있다. 그 어떤 고난도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을 알아 갔고, 유쾌하게 감당해 가는 나 자신이 행복한 성장을 했다는 사실도 고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