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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Jul 05. 2021

뒤늦게 정주행한 슬기로운 의사생활

이런 따뜻한 드라마를 계속 보고 싶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가 시작돼 3화까지 방영됐다. 나는 화제를 몰고 온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케이블 tv가 집에 설치돼 있지 않아 공중파 드라마를 볼 기회가 없는 데다 메디컬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본 메디컬 드라마가 2007년 방영된 <하얀거탑>이다. 납득이 되는 빌런이 주인공이라는 이색적인 설정이 궁금해 찾아봤고, 흠뻑 빠져들었다. 장준혁 역 김명민의 인생작이지 않을까 한다.    

 

난 외과수술이 주로 나오는 메디컬 드라마를 편안하게 볼 수가 없다. 의사들은 비현실적이어서 자신들 얘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머리를 열어 수술한 어머니를 20년이나 간호했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겪은 아픈 기억들 때문에 수술 장면이나 환자 가족들의 고통을 드라마로 볼 수가 없다.     

 

그러다가 슬의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순전히 시즌2에 등장한 배우 한 사람 때문이다.

뮤지컬 배우 박지연. 2015년 겨울에 공연한 <레미제라블>의 에포닌 역을 맡은 그녀를 인상적으로 보았다. 후배가 VIP석 티켓을 마련해 주어 무대 가까이서 박지연 배우의 노래와 연기를 보고는 팬이 되었다. 작년에 <고스트>에서 주인공 몰리 역을 맡았을 때 티켓을 샀다가 코로나가 심각해져 자동 환불이 되는 바람에 공연을 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거리 두기 좌석으로 다시 예매를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일단은 미루고 말았다. 에포닌은 소매치기 부모님과 전혀 닮지 않은 순수한 여자이고 험한 인생을 살며 사랑이 뭔지 모른 채 마리우스를 사랑하는 마음을 깨달아가는 인물이다. 박지연 배우는 이 역할을 단독 캐스팅으로 훌륭하게 소화했다. 무대에서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서 내 마음의 어떤 억압 기제와 통하는 부분이 느껴졌다.     


최근에 <헤드윅>의 넘버 <Wig in a Box>를 여러 버전으로 듣다가 헤드윅의 억압과 고통, 삶의 얼룩짐도 나와 비슷한 결이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주인공 헤드윅과 이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에 몰입해 여러 영상을 보다가 박지연 배우의 유튜브를 발견하고 그녀가 부른 에포닌의 <On My Own> 댓글에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 2>에 출연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시즌2의 1화, 2화에서 김대명의 신비로운 전처로 잠깐 나온다). 박지연을 보기 위해 나는 뒤늦게 슬의생 시즌1을 정주행하기로 했다.     


이 드라마는 칭찬할 부분이 많다. 비현실적인 것은 말해 뭣하겠냐마는 응답하라와 슬기로운 시리즈의 이우정 작가, 신원호 PD가 만드는 드라마는 시청자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방법을 명확하게 끌어안고 있다. 이 제작진의 드라마 캐릭터에는 '좋은 사람'이 탁월하게 그려진다. 레트로적인 향수, 설렘, 판타지를 이들처럼 심쿵 포인트와 울컥 포인트를 적절히 구현해내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무려 시즌1의 12화(스페셜까지 13화), 시즌2의 3화, 99즈의 '미도와 파라솔' 라이브 공연까지 긴 영상을 일주일 만에 모두 달려왔다. 그만큼 재밌었고 감동적이었고 소리 내어 웃다가도 각티슈를 옆에 놓고 눈물을 닦으며 감상하기도 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볼 때는 눈물을 참거나 쓱 닦느라고 혼났다.      


먼저 OST 이야기

90년대 초중반 인기 가요가 매회 새롭게 소개된다. 특히 이소라의 <바람이 부네요>와 모노의 <넌 언제나>는 이 드라마에서 재탄생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모노의 <넌 언제나>가 엔딩에 나올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가 있다. 내가 군 복무 말년 병장일 때 히트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참으면 제대하는 그 시절, 내무반 TV에서 기분 좋게 듣던 노래여서 드라마의 좋은 일이 생길 때 흘러나오는 이 곡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동물원, 이승환, 신효범, 부활, 쿨 등, 사실 90년대 초중반 노래만큼 가요의 르네상스가 또 있었을까. 대학 시절 좋아한 노래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 노래가 OST로 나올 때마다 내 청춘의 좋았던 기억, 아팠던 기억이 떠올라 드라마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음악을 맡은 제작진을 칭찬한다. 주인공들이 드라마 버전으로 부른 음원들을 플레이리스트에 걸고 매일 듣고 있다. 슬의생 음악은 드라마 장면이 떠올라 더 행복해진다.

    

뮤지컬 배우인 주연들

주연 배우들이 미도와 파라솔이라는 밴드가 가능하고, 레트로 감성의 곡을 드라마 색깔에 맞게 부를 수 있는 것은 조정석, 유연석, 김대명, 전미도가 모두 뮤지컬 배우이기 때문이다(정경호는 뮤지컬을 했는지 검색되지 않는다). 이번 드라마에서 채송화 역의 전미도를 처음 알게 됐고,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나오는 원탑 여배우의 매력을 채송화 선생이 잘 살려 주었다. 뮤지컬 가수가 음치 캐릭터 연기는 또 얼마나 매력적으로 해내는지... 사실 슬의생은 채송화의, 채송화에 의한, 채송화를 위한 드라마다. 1화에서 신경외과 최고의 닥터이면서 환자 보호자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전미도의 모습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한순간에 끌어모았다. 13시간 수술을 해내는 여자 의사, 목 디스크를 참으며 고단함을 견디는 히어로, 뇌수술 권위자이면서 미소가 따뜻한 친절한 교수, 99학번 동기 남자 의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홍일점. 이런 요소는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여성들의 판타지를 완전히 자극해 주고 남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조정석과 유연석은 헤드윅을 맡기도 했다(흉부외과 레지던트 도제학으로 나오는 정문성 배우도 헤드윅 역을 열연했다). 개성이 강한 남자 배우들 중에 단연 눈길을 끄는 배우는 조정석이다. 조정석의 연기를 보면 거미가 부럽고, 거미의 노래를 들으면 조정석이 부럽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의 밝은 에너지가 슬의생의 숨 막히는 장면들을 달달하게 중화시킨다. 의벤져스라고 할 만한 이 드라마의 의사 중에 간담췌외과 천재 교수 이익준을 맡은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의 납득이가 연기가 아니라 실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밝은 에너지는 불행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난 아내가 자신과 아들을 버리고 떠났어도, 돌싱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계속 밝게 자기 인생을 살아간다. 친구 양석형(김대명)이 의대 시절에 송화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을 때 친구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만, 그는 아빠와 의사 인생을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며 문제를 해결해 낸다. 아들 우주와의 장면은 이 드라마 최고의 웃음 포인트다. 조정석은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미도와 파라솔 밴드의 메인 보컬로 음원 강자로까지 올라섰다. 건축학개론의 납득이, 엑시트의 용남, 그리고 슬의생의 이익준 모두 조정석 그 자체이다.  

    

한국 드라마는 배경이 병원이든 군대이든 어디서든 연애한다는 특징이 있다. 내 기억에 첫 메디컬 드라마는 고등학교 때 본 <사랑이 꽃피는 나무>였다. 청소년 성장드라마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주축은 의대생 최재성, 최수종과 최수지 3최가 만들어가는 멜로가 꽃피는 나무였다. 슬의생도 병원 안에서 여러 멜로가 피어난다. 소아외과 안정원(유연석)과 레지던트 장겨울(신현빈)의 사랑이 이뤄지는 것으로 시즌1이 마무리되는데, 내 관심은 산부인과 양석형(김대명)과 레지던트 추민하(안은진)가 궁금했다. 양석형은 안정원처럼 재벌2세지만, 자신만의 세계에서 누군가 챙겨줘야 할 것 같은 결핍이 보이는 인물이라 탁월하고 자상한 의사인 그에게 애착감이 든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목소리만으로 섬뜩함을 안겨주었고, <돌멩이>에서 8살 지능의 어른아이 연기로 천상 배우인 김대명이 미생에 이어 슬의생에서 잘 되어가는 모습이 흐뭇하다. 그가 부른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들어보면 미성의 노래 실력 또한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다. 내가 좋아한 박지연 배우가 김대명과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가 된다. 설마 2화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드라마의 인기에 힙입어 라이브 합주를 들려준 <미도와 파라솔>에서 세컨드 기타를 맡은 정경호는 츤데레 흉부외과 교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악마 의사로 통하지만, 뒤로는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심장수술 권위자가 연기를 떠나서는 맑은 소년 그 자체였다. 드라마에서는 정확하고 섬세한 표정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어 보이는 연기자이지만, 시청자 보답 합주 연주에서는 세상 순수한 모습이다. 시즌2 3화에서 영국에 유학 간 익순이와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잘 풀어지길 빈다. 40세 의사들이 청춘드라마처럼 연애하는 모습이 심쿵하게 하면서도 좀 비현실적이지만 서두에서 밝힌 대로 현실성과 개연성은 내려놓고 봐야 한다.      


이런 의사들이 있을까, 보다는 이런 의사들을 TV로 보니까 기분 좋고 감동과 감탄을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이 드라마의 백미 중 하나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눈물 연기다. 어설픈 눈물이 아니라 진심으로 슬프게 우는 모습들에서 몰입하게 만든다. 내가 바로 그 가족이었고, 어머니가 바로 그 중환자여서 더욱더.

특히 이란성쌍둥이 인턴 홍도와 윤복이가 의사가 된 배경이 자신들 어머니를 마지막에 보살펴 준 의사 때문이고, 그 의사가 채송화 교수임을 알게 됐을 때 윤복이가 채송화에게 감사해하는 장면은 최고의 울컥 포인트였다.      

유연석의 엄마 김해숙과 병원 이사장으로 나오는 김갑수의 캐미는 부럽고 유쾌한 장면이다. 늘그막 어른이 되어도 어렸을 때 우정으로 툭툭 던지는 말과 격의 없는 행동이 재밌고 아름답다. 머리 희끗한 어른들이 하는 마피아 게임, 어디서 이런 대본을 쓸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이우정 작가는 천재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세계관과 맞닿은 슬의생이 시즌2에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이제 시즌2 3화가 나왔지만, 이렇게 따뜻한 드라마를 만드는 tvN을 응원한다. 욕하면서 본다는 펜트하우스보다 훨씬 낫다. 펜트하우스 시즌3는 시간이 아까워 그만 보기로 했다. 양아치 같은 아버지가 유서로 남긴 재벌 기업을 물려받게 된 양석형 선생이 "시간이 아깝다"고 말하며 친구들 앞에서 의사를 계속하겠다는 표현을 감동적으로 했듯이 시간이 아깝다. 슬의생의 OST를 듣는 게 훨씬 좋다.     


나이가 들면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의 장난, 위로,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마음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응급 콜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밴드를 하는 다섯 명의 의벤져스, 그런 따뜻한 설렘과 웃음과 눈물을 주는 사람들을 드라마 속에서나마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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