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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Jul 24. 2021

슈퍼밴드 시즌2와 나의 고교 시절 드러머 친구

33년 전 기억 속 우정과 대화, 환희!

가마솥 더위다. 94년 5월 제대하고 그해 여름, 수련회와 농활 갔을 때 역대급 더위였다. 내가 봉사한 마을의 소가 더위에 지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근로 학생들과 심은 콩은 열기에 타서 발아하지 못했다. 코로나와 함께 겪는 2021년 여름, 34도까지 올라가는 무더위에 쓰레기 버리러 나가 아파트 정원을 산책한 것 외에는 집에만 있었다.


오전에 실내에서 운동하고, 글 한 편 쓰고, 큐티와 영어 공부 마친 뒤 오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슈퍼밴드>를 찾아보았다. 운동하면서 비긴즈 편을 보다가 예사롭지 않은 오디션 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즌 1도 찬찬히 감상해 볼 마음이 생겼다. JTBC의 오디션은 특별함이 있다. <팬텀싱어>, <싱어게인> 모두 첫 오디션 무대에서 시선을 끈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들이 지원해, 기획사의 프로 가수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신선함을 펼치며 실력마저 상당한 경지에 다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편집도 다른 오디션 프로에 비해 덜 짜증나게 물 흐르듯 잘 연출했다.


노래 천재들이 <팬텀싱어>에 나온다면 <슈퍼밴드>에는 음악 천재들이 나온다. <슈퍼밴드>는 초등학생 최연소 기타리스트부터 20대 후반의 클래식과 팝, 헤비메탈, 국악을 넘나드는 실력자들이 나오는 점에서 기존의 어느 오디션 프로보다 다채롭고 파워풀했다. 이 코로나 시국의 무더위에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기획과 편성이다. 프로듀서 윤상의 말처럼 한국만큼 실용음악과가 많은 나라가 없다고 하니, 음악을 잘할 뿐만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고 무대가 절실하다. <슈퍼밴드> 구성에는 <팬텀싱어>와 <싱어게인>의 특징이 잘 배합돼 있다.


사실 홍성수 교수님의 글대로 오래전부터 늘 나오던 사회자와 심사위원인 것이 좀 식상해 보이기도 했다. 심사위원석의 새 얼굴은 이상순과 CL이다. 기타리스트이면서 밴드 활동을 쭉 해온 이상순의 심사평이 돋보였고, CL도 나름의 스타성을 주제로 한 심사평을 잘 해내고 있다. 전현무의 진행은 유머러스하고 매끄럽지만 오디션 프로마다 등장하니, 익숙함이 반가움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몇 달 전에 아이 핸드폰 액정이 깨져 서비스센터에 방문해서 수리를 기다리는 시간에 간만에 패션잡지를 들춰본 적 있다. 깜짝 놀란 사실은 젊은 여성의 화장품 광고에 김희선이 나오는 것이다. 언제적 모델인가. 여전히 화장품 모델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상에 광고주의 계산이 있겠지만, 젊은 모델들이 진입할 자리가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희선만큼 예쁜 화장품 모델이 없지는 않을 텐데, 인기를 오래 누린 사람이 계속 누리고 있는 현상은 좀 불편했다. <팬텀싱어> 심사위원석에도 프로듀서로 앉아 있던 윤종신과 윤상을 보니 반가우면서도 내가 패션잡지에서 본 화장품 모델의 올드함에 대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다.


2030이 5060을 대하는 태도가 Cancelation이라고 한다. 윗세대가 가진 경륜을 배우고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기보다 윗세대를 모두 삭제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도화지에 자기 시대를 구축하기를 원한다. 나는 이런 2030의 Cancelation을 비판적으로 보는 편이지만, 부족한 의자들에 독보적인 존재들이 오래도록 앉아 있는 것은 반대다.


그런데 <슈퍼밴드 시즌2> 3화까지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오디션 심사위원은 음악성도 있어야 하지만 오랜 경험의 프로듀싱 능력과 방송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유희열, 윤종신, 윤상은 그런 면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음악성이 있어도 방송을 잘 끌고 가지 못하면 짜증내는 시청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상순은 그런 선배 심사위원들 속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어서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방송을 잘 이끌어 갈 심사위원과 밴드를 잘 이해하는 새로운 심사위원을 매칭시킨 점에서 말이다.




첫 오디션 들어가기 전에 어게인 편에서 심사위원들이 모여 나눈 대화가 인상적이다. 그때 자주 등장한 단어가 '파고다'다. 지금 인디씬의 메카가 홍대이듯이 80년대 중후반 헤비메탈이 언더 장르이면서 음악 듣는 이들에게 최고의 인기 장르였을 때 종로의 파고다는 스쿨밴드들이 실력을 닦아 공연하는 메탈의 메카였다.


내가 메탈 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 스콜피온스, 고등학교 때 본 조비 정도였다. 재수할 때는 헬로윈에게 푹 빠져 있었다. 약간 멜로딕한 사운드를 좋아했는데 사실 이들보다는 듀란듀란, 컬처클럽, 웸을 더 좋아했으니 밴드 음악을 특별히 사랑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고등학교 절친과 파고다에 얽힌 특별한 기억이 있다. 이 글을 그가 볼 수도 있다. 내 페북으로 코로나 확진 소식을 알고 난 뒤 두 차례나 전화해 준 친구다.


86년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 그는 우리 반 반장이었다. 근육질의 탄탄한 몸, 잘생긴 외모, 허스키하고 우렁찬 목소리에 반 아이들 모두가 인정하는 탁월한 리더십을 지녔다. 국민학교 때부터 반장, 전교회장을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외향적인 친구다. 특히 그는 운동을 잘했는데 농구와 달리기에서 고3 형들을 제칠 정도였다. 어느 학교나 그렇듯이 폭력 서클이 존재한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밴드부가 유명했다. 아무도 밴드부를 건들지 못했고, 음악실의 밴드부 공간은 일진들의 거점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밴드부 아이들도 우리 반 반장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외향적인 그와 완전히 내향적인 내가 친해진 것은 2학기 말부터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나와 얘기하고 싶어 한 그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서 신문을 편집하며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이 좀 많고 깊었는데 어느 순간 그 친구는 내가 다른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내게 먼저 다가와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 2학기에는 아무도 내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 내 옆자리는 반장의 공식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잠실에 살던 그는 하교 후 일부러 우리 집 부근까지 긴 거리를 같이 걸으며 대화하다가 버스를 타고 자기 집으로 가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서 스타성을 가진 반장과 절친이 된 것에 자존감이 높아졌다. 2학년 오르며 다른 반이 되었고, 3학년 때 그 친구는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해 같은 반이 되는 게 불가능했지만, 우리는 수업 끝나면 거의 매일 만났다. 심지어 재수할 때 학원도 같은 곳을 다녔다.


반장은 1학년 겨울방학 때 갑자기 드럼을 배웠다. 막내아들이던 그가 사고 싶어 한 것은 부모님이 모두 사주었다. 드럼을 배우면서 드럼도 구입했다. 그가 다닌 교회에 메신저스라는 밴드가 있었는데 그는 교회 밴드를 보고 드럼을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에 연습을 시작했다고 했다. 아주 짧은 기간에 송골매의 곡을 연주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2학년 봄 수학여행 때 그는 밴드를 급조해서 2학년 전교생과 선생님들 앞에서 화려하게 연주했다. 스틱이 부러질 만큼 파워풀한 드럼을 연주한 그는 단연 돋보였고, 그런 모습의 그를 무서운 선생님들도 존중했다. 입시 위주의 엄격한 한국 고등학교지만, 그는 미국의 자유로운 고등학교를 다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근거리에서 그 친구를 지켜보며 나는 저 녀석이 나와 친한 친구가 맞나, 싶을 만큼 화려하고 멋있어 보였다.


고3에 올라가기 전 방학 때도 자주 만났는데, 고3이 되는 긴장감으로 하루하루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와 달리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3월에 첫 모의고사를 치르고 좌절해 있을 무렵 갑자기 그는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공연을 한다며 내게 티켓을 주었다. 언제 외부에서 밴드를 결성해 그런 대중 공연을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원하고 목표를 세우면 그런 도전을 충분히 해내는 친구였다. 그가 공연한 팀은 교내 스쿨밴드 수준이 아니라, 날고 기는 연주자들이 모인 팀이었다.


나는 1988년 어느 봄날 파고다극장에서 헤비메탈을 연주한 여러 아마추어 밴드를 본 기억을 잊지 못한다. 억눌린 고3의 심정이 엄청난 사운드의 자기 멋에 흠뻑 빠져 있는 밴드 모습에서 이질감과 몰입감을 느꼈다. 친구의 팀은 가장 실력 있는 팀이 나오는 마지막 순서였다. 그때 친구는 투베이스 드럼을 연주했다. 블랙 사바스, 주다스 프리스트 등 레전드 곡들을 무대에 올렸는데 친구의 두 발이 때리는 베이스 소리가 대포처럼 귀에 박혔다. 옆머리에 무스를 잔뜩 발라 넘긴 친구는 고등학생 같지 않게 멋스러웠다. 나는, 고3은 스포츠머리로 통일한 학교 방침에 따라 어색하고 촌스러운 얼굴로 파고다극장의 허름한 객석에 앉아 답답한 공기 안에 울려 퍼지는 친구의 드럼 소리에 환희를 느꼈다.


공연 마치고 단 기간에 연습해서 칼 같은 연주를 해낸 드러머 친구에게 다가가 엄지척 올리며 언제 이런 공연을 다 준비했냐고 물었다. 그는 마지막에 화합이 안 돼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끝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연주 모습은 6월 교내 축제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인근의 여학교 학생들이 잔뜩 와서 자리를 메운 노천강당에서 밴드부 위주의 팀이 앞부분에 나와 스콜피온스 곡들을 부르고, 친구의 팀은 드림팀으로 결성돼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때 여고생들의 환호와 눈물은 친구의 드럼에 꽂혀 있었다. 친구 밴드의 기타는 고등학생이 아닌, 전문 연주자스러운 포스가 있던 이가 맡았는데 신들린 듯한 연주였다.


그 친구는 가족과 LA로 이민 가서 거기서 대학을 나와 사업을 하다가 2008년쯤 귀국해 지금 강남파이낸스빌딩의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여전히 운동을 좋아해 여름에는 골프와 야구, 겨울에는 스노보드에 푹 빠져서 산다. 그때 그 드럼 실력을 지금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 내성적인 이과생이면서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한 나는 그 친구 덕에 메탈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자유로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슈퍼밴드에서 윤종신과 유희열이 파고다를 언급할 때 참 반가웠다. 33년 전 기억 속 우정과 대화, 환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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