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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세계를 향한 렌즈: 분쟁지역의 침묵 속 희망

고향을 등진 불가피한 선택: 바다를 건넌 난민들 (2)

by 해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연 그리고 또 한 번의 좌절


한국에 몇 주간 머물 때도 난민에 관련된 기사를 계속해서 찾아본다. 지난 두어 달 동안 큰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이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서 알고 있었지만, 난민들을 향한 이집트인들의 경멸의 시선과 난민들이 탄 배들이 출발하지 못하게 보다 철저해진 해안선 경계로 인해 이집트 북부 해안에서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을 통해 유럽을 가고자 했던 난민들의 숫자가 전년도에 비해 급감한 것이다.

하지만 수요는 그대로 존재했던 만큼 브로커들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터키에 있었다.

터키 해안에 인접한 그리스 영토의 많은 섬들, 특히 레스보스(Lesvos), 치오스(Chios), 코스(Kos)와 같은 섬들이 새로운 목적지가 되었다. 이 새로운 목적지들은 사실 난민들 입장에서도 기존의 리비아-람페두사 또는 이집트-시칠리아 경로보다 여러모로 훨씬 더 매력적인 옵션이었다. 일단 누구나 알고 있던 고무보트 또는 걸핏하면 고장 나기 십상이던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훨씬 줄어든 사실이다. 이전의 루트들은 해상 위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짧게는 며칠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일주일이 넘는 경우가 많았다. 이집트 해안에서 시칠리아로 가는 배는 해상 위에서 평균 일주일씩 보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해상에서 배를 같아 타고 기다리는 시간도 포함한 것이었다.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식량과 물을 가지고 많은 인원이 좁은 배에서 그 시간을 보내면 어떨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새로운 목적지인 그리스 섬들은 터키 해안가에서 멀리 보일 정도로 근접한 곳에 위치한 섬들이었기에 그 짧은 거리가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브로커 입장에서도 장거리 운행을 위한 큰 보트를 구하는 데 들여야 하는 비용과 그 큰 배들을 운반하거나 출발 전 단기간 항구에 의심을 사지 않고 정박하는 방법을 찾을 노력 없이, 출발 해안가에서 바로 조립해서 쓸 수 있기에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고 운반하기에도 좋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무척 쌌던 작은 고무보트로 단기간에 훨씬 더 많은 난민들을 태울 수 있어 결과적으로는 이전 루트에 비해 훨씬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런 루트와 배 크기의 변화로 인한 비용의 절감은 난민 개개인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기존의 절반 수준으로 낮추어 결과적으로 더 많은 난민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면 왜 이전에는 이 루트가 활성화되지 않았는지 자연스럽게 묻게 되는데,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이 경로로 유럽(그리스)에 도착하게 되면 대부분의 난민들이 가고자 했던 서유럽 또는 북유럽에 이르기까지는 통과해야 하는 국가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는 것이 과거에 이 경로를 많이 이용하지 못한 이유였다. 첫 번째 서유럽에 해당하는 국가인 오스트리아나 독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발칸반도와 헝가리를 거쳐야 하는데 발칸반도에만 6개의 국가가 있었고 이 모든 국가를 통과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만큼 통과해야 하는 국경의 숫자도 많았던 것이다. 더 많은 국경은 그만큼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문젯거리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데 이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난민 수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는데 난민들의 최종목적지가 자신들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들을 붙잡고 비자나 여권 없이 도달한 이들과 적법에 관한 실랑이를 벌이느니 차라리 자동문처럼 최대한 자신의 나라를 통과하게끔 해 준 것이다.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제발 최대한 빨리 떠나 달라는 듯.

터키는 당시에 아직까지는 시리아인들이 비자 없이 단기여행 목적으로 입국이 가능한 몇 안 되는 국가였다. 하지만 이런 정책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던 것이었기에, 그리고 터키가 계속해서 몰려오는 시리아 인들의 입국을 마냥 허용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난민들조차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기에, 더 늦기 전에 일단 터키로 넘어가고 보자는 이들이 많았고 이집트에 체류하고 있던 상당수의 시리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에 가고자 했던 그리고 구역구역 여행경비를 어떻게 마련했던 이들은 대거 비행기를 타고 터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리아인들 이외에도 이란을 거쳐 육로로 터키에 들어오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과 ISIS의 활동과 내전이 십 년 가까이 지속되던 이라크 출신의 난민들도 대거 합류하면서 터키는 곧 유럽으로 향하고자 했던 난민들이 모이게 되는 출발 집합장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난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마음을 많이 내려놓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그토록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났지만 결국에 내가 동행할 수 있는 그 한 명의 난민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약간의 좌절감이 주된 상실감의 원인이었고 이제 와서 터키에 넘어간다고 한들 소용이 있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스스로에게 인연이 닿지 않은 것에 너무 마음 쓰지 말자는, 조금은 체념에 가까운 나 스스로에게 할 수밖에 없던 위로였다.

딱 이러한 시기에 운명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네덜란드에 돌아온 며칠 후였다.

전년도에 방문해 연이 있던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살고 있던 시리아 친구 아말(Amal)이 올린 포스팅을 보고 오래간만에 메시지를 보낸 게 계기였다. 안부를 묻고 그간 있었던 이집트에서의 일들과 난민들의 여정을 기록하고자 했던 나의 계획을 이제는 좀 내려놓고 있다는 얘기를 하자 아말이 내게 말한다.

“오므란한테 연락해봐. 지금 이스탄불에 있어. 아마도 곧 배에 탈거라고 들었어. 마람 기억나지? 둘이 결혼해서 얼마 전에 같이 터키로 넘어갔어.”

하늘이 이런 식으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며 장난치는 것 같았다.

오므란은 내가 그때까지 만났던 많은 시리아 난민들 가운데 그저 다큐사진가로서 맺은 관계 이상의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였다. 다른 시리아인들이었다면 이런 여정을 합류하고 싶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부탁을 해야 했을 테지만, 그는 그저 “야, 기다려. 나랑 같이 가. 내 자리 마련해 놔.”하며 선언하듯 얘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었을 테다.

애초에 여권 없이 요르단으로 넘어와 어디로도 갈 수 없었던 신분이었던지라 난 그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꼼짝없이 요르단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고 단정했는데 어떻게 용케 여권을 마련해서 그 림보(Limbo: 지옥의 변방, 천당과 지옥 사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을 표현) 같은 생활을 벗어난 것이었다.


“나의 친구. 기다리고 있을게.”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낸 내게 오므란은 나의 예상대로 예의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온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터키에서 재회하지 못했다.

며칠간 나름 최대한 준비를 빨리 해서 이스탄불로 향하는 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오므란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해리, 너무 미안해. 예상보다 빨리 출발하게 되었어. 브로커가 오늘 밤 출발해야 한대. 오늘 안 가면 순서가 더 밀릴 거라고. 행운을 빌어줘. 무사히 도착하면 다시 연락할게. 미안해.”

또 한 번 하늘이 보내는 신호 같았다. 그냥 포기하라고. 억지로 가려하면 내게 어떤 화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한 번도 아니고 이렇게 재차 막판에 일이 틀어지는 건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일단은 비행기에 올라타기로 한다. 첫 시도에 성공 못하고 이스탄불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스탄불에서 며칠 쉬다가 오는 거지 하며 스스로를 달래 본다.

이스탄불에 새벽에 도착해 값싼 호스텔에 숙소를 잡고 온종일 전화기만 쳐다본다. 언제라도 오므란이 메시지를 보낼까 하며. 그날 밤, 끝내 오므란으로부터 듣지 못한 것을 그와 마람이 무사히 그리스에 도착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인터넷이 연결되는 대로 연락을 달라며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에 행운을 빌어주는 메시지를 남겼다. 아야소피아가 내려다 보이는 숙소의 루프탑에서 맥주를 마시며 내가 얼마나 근접했었는지를 생각하며 조금은 허탈해했다. ‘안 될 일은 안 되려나보다.’

이스탄불은 처음인지 다음날 일정을 신나 하며 짜고 있던 옆 테이블의 배낭여행객들이 이스탄불에는 왜 왔냐고 물어 “그냥 배 타러 왔어.” 답하고선, 얘기가 길어질까 그들을 뒤로하고 숙소를 나와 갈라타 타워까지 걸었다.

다시 느끼지만 참 예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교차하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던, 과거에 한때는 세계의 중심지였던 그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때, 이집트에 있는 오베이다라는 친구에게 메시지가 온다.

카이로에 있을 때 연락처를 받고선 서로 바빠서 정작 만나지는 못했던 시리아 출신 외과 의사였던 오베이다는 시리아 내전 이전부터 이미 카이로에 정착해 있던 난민이 아닌 이집트의 국외거주자였다. 하지만 내전이 시작되고 다수의 난민이 발생하자 그 지경까지 가게 만든 정부를 비판하며 이집트에 와있던 난민들 관련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다.

이집트에서 내가 보트에 타려 한다는 계획을 얼핏 알고 있었는데,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내가 터키에 간다는 소셜미디어 포스팅을 접하고 혹시나 해서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주고 별 기대 없이 혹시라도 현재 이스탄불에서 보트에 타려 대기하고 있는 지인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번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 했지만 솔직히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또다시 체념 모드로 돌아가는 것이 마음이 편할 듯했다.

한참을 더 걸어 다니다가 늦은 밤 숙소에 돌아와 루프탑에서 홀로 앉아 이스탄불 전역의 모스크에서 확성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코란을 읊는 이맘들의 엇박자 선율을 듣고 있었다. 들으며 생각한다. 무슬림도 아니지만 그 에코가 있는 기도소리가 어찌 그리 내게 깊은 평화를 가져다주는지를. 그 아름다운 울림에 심취해 있을 때 오베이다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해리, 여기저기 물어봤는데 불행히도 많지는 않아. 한 명은 지금 이즈미르에서 대기 중인데 내일이라도 출발할지 몰라 반나절은 꼬박 걸릴 거리인 거기까지 가는 건 좀 리스크가 있을 거고, 대신 카이로에서 내 룸메이트였던 바젤이 현재 이스탄불에 있다고 하네. 연락해 봐. 괜찮은 친구야. 어쩜 널 도와줄지 몰라.”

자정이 넘었던 늦은 밤 연락함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온 바젤의 답장에서 친절함이 느껴졌다.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고 했다. 그는 전에 이집트에 있을 때 오베이다로부터 나의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며 다음 날 만날 때 자신의 파트너를 데리고 와도 되겠냐고 묻는다.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데 내 얘기를 듣고 궁금해한다고 했다.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적어도 무언가 잡힌걸 다행이라 여기며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내가 집착하듯 계속해서 추적하던 이 이야기, 이 여정이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것이 정말 우연일까?


바젤과 루나


바젤과 루나는 악사레이(Aksaray) 지하철 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던 바젤은 면도한 지 며칠 된 듯했고 청바지에 파란 난방을 입고 있었고 피곤해 보였지만 차분하고 깊은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그보다 조금 어려 보이던 루나는 청바지에 빨간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큰 눈으로 다가오는 나를 바라보며 지긋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아닌 척 살짝 긴장하고 있던 나에 비해 나와의 만남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이 느껴졌다.

이 둘을 만난 첫날, 난 마치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될 어떤 중요한 인터뷰에 나간듯한 기분이었다. 여러 번의 좌절 끝에 어쩌면 나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를 그 만남에서 이 시리아인들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를 하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며 길을 나섰다.

다행히 둘 다 첫인상이 굉장히 온화했고 처음부터 나를 편하게 대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거의 4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오랜 기간 보지 못한 옛 친구에게 그간의 일들을 고백하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듯 편안한 시간이었다. 루나는 바젤에 비해 영어가 편하지는 않았는지 중간중간 바젤에게 통역을 부탁했고 마치 나의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진정 경청을 하는 것이 좋은 신호로 느껴졌다.

알레포 출신의 본디 치공기사였던 바젤은 영어를 꽤 잘해서 부업으로 통역 일을 하며 지난 몇 년간은 이집트와 쿠웨이트 등에서 살았다고 했다.

2011년 중동 전역에 아랍의 봄이라 불리던 독재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데모 그리고 이를 참여하는 시민들의 표현으로는 혁명이 시작되는 한 해였는데 시리아에서도 남부의 다라(Daraa)라는 아주 작은 도시에서 인근 국가들의 아랍의 봄 혁명에 영감을 받은 학생들이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하였다. 그 규모가 꽤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철저하게 싹을 자르겠다는 의지를 보인 아사드 대통령은 이를 과잉진압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 다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리아에서 십 년 넘게 지속된 내전의 시작이었다. 학생들의 죽음은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한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결과를 가져왔고 당시에 조용히 가정주부로 살고 있던 루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면에서 꿈틀 하는 반응에 그녀는 본격적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살아생전 처음으로 큰 용기를 내어 폭압정치로 일관해 오던 아사드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을 본인의 블로그 등을 중심으로 공개적으로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Luna(달)이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한 그녀는 점차 그녀의 목소리에 동조하는 많은 서포터들을 가지게 되었고 바젤 또한 이 시기에 그녀의 팔로우어로 인연을 처음 맺게 되었다고 얘기해 줬다.

반정부 활동을 하는 공통의 지인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소개를 받은 그들은 루나의 블로그를 바젤이 영어로 번역해서 시리아 사태에 관심을 표하는 해외 언론사 또는 기관에 소개하는 등 같은 목적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애로 관계가 긴밀해졌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에 루나의 사회운동가로서의 반정부 활동은 결국 정부로 하여금 위험인물로 지정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녀를 침묵하게 만들기 위해 어느 날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쳐 온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 루나를 체포했다.

그녀는 그대로 일 년 넘게 고문을 당하며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체포 이전에도 이미 그녀의 반정부 활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남편으로부터 감옥에 있는 동안 이혼을 당했지만 그보다 그녀를 더 괴롭혔던 것은 자신을 체포할 당시 군인들이 그녀에게 했던 협박이었다. 체포 당시 옆방에는 그녀의 14살이던 아들이 숨어있었는데 그를 발견한 군인들이 그 아이도 나중에 지 어미랑 똑같은 길을 갈지 모르니 차라리 죽여서 길거리에 본보기로 내던지겠다는 얘기하는 것을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듣고 난 후 감옥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아들의 생사여부도 모르고 지내던 그 첫 몇 개월이 얼마나 지옥처럼 느껴졌을지 여전히 떨며 얘기하는 루나의 목소리가 대변해 줬다.

자신의 동지가 체포되었을 당시 쿠웨이트에 있었던 바젤은 루나가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안 그 누구보다도 그녀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역시 체포될 가능성이 있어 시리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루나를 향한 감정이 사랑으로 발전했음을 깨닫고, 루나가 마침내 풀려났을 때 그 감정을 고백하며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시리아를 떠나 자신과 새로운 시작을 하자고 설득했다.

십 대였던 두 자식을 놔두고 시리아를 떠날 수도 없었고,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바다에서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라며 주저하던 루나에게, 바젤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이들을 잠시 친척에게 맡기고 루나가 먼저 유럽에 도착해 초청장을 보내면 안전하게 그들을 데려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지금의 시리아에서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는 바젤의 말에, 루나는 결국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몇 개월 전 터키로 넘어왔다. 이미 서로에 대한 감정이 깊어진 그들은 비로소 조국이 아닌 타지에서 처음으로 만나 사랑을 키우며 함께 배에 오르기로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한동안 들은 후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난 그들에게 그때까지 나의 전반적인 삶과 함께 어떻게 다큐사진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난민 보트에 탈 결심까지 하게 되었는지 꽤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왜 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져야 한다고 믿는지 얘기했다. 루나의 사회활동가로서의 역할이 단번에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없을 듯이 내가 목숨을 걸고 그들의 여정을 아무리 잘 기록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갑자기 시리아에서의 전쟁을 멈추게 관심을 가질지는 않을지라도 그저 우리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얘기했다. 또한 그에 더해서 나의 동행 자체가 그들에게 어떤 리스크로 돌아올지 알 수 없고 만약에 그들이 너무 부담스러워 나와 함께 갈 수 없다고 해도 난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행운을 빌어주겠지만 그래도 이 여정에 내가 동행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최선을 다해 그들의 현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최대한 많은 이들이 알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바젤이 구체적인 통역을 해주고 난 후 루나는 꽤 열정적으로 바젤에게 한동안 얘기를 했다. 그 아랍어의 어감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쁘지 않게 들렸고 바젤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 나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해리, 루나가 네가 마음에 든데.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시리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왜 이 여정에 나설 수밖에 없는지 한 사람이라도 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뭐 사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건 너도 알 테니 일단 우리 브로커에게 물어볼게. 내일 사무실을 방문해서 돈을 지불하기로 한 날인데 그때까지 혹시 돈 준비할 수 있겠어? $1,200. 잠시 후에 브로커에게 연락을 하고 가급적 내일 같이 사무실에 가는 걸로 얘기해 볼 텐데 뭔가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할 듯 해. 너와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브로커에게 듣기로는 매일 밤 200~300명씩 떠나는데 거의 대부분이 시리아인들 또는 이라크인들이라고 했어.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하룻밤만에 널 아랍 사람처럼 보이게는 못 할 것 같아(웃음).”


브로커와의 거래


무언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듯했다. 이번에는 뭔가 일이 풀릴듯한 예감.

오므란과는 아쉽게 놓쳤지만 더 깊은 이야기, 더 의미 있는 여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바젤과 루나의 사랑 이야기, 그들의 저항과 투쟁,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향한 위험한 항해. 이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마도 내 심리가 그랬을 것이다. 갑자기 이스탄불의 햇살이 유난히 밝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운명은 때로 기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법이다.

다음날 오전, 우리는 다시 만나 함께 브로커를 만나기 위해 한 사무실을 찾았다. 엄연히 불법일 텐데 이토록 많은 난민들이 이용하는 돈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내심 궁금했다. 브로커들이 버젓이 사무실까지 갖추고 불법 행위를 하며, 난민들이 돈을 지불하면 과연 어떤 보장을 받는지. 사기를 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듯했다.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이제 곧 모든 것이 드러날 터이니 조금만 더 인내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무실’이라 불렸던 곳은 막상 도착하니 브로커의 본거지가 아닌, 단지 돈거래를 위한 중개하는 이스탄불 내 한 공증사무소인 걸로 드러났다. 도착 후 공증인과 악수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증인은 장부를 꺼내 우리의 정보를 기입했고, 잠시 후 우리는 현금을 꺼내 액수를 확인한 뒤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공증인은 작은 종이쪽지에 적힌 일련 코드를 장부에 옮겨 적은 후,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는 단호한 경고와 함께 그 종이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브로커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거래를 하며 무덤덤해진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그들 스스로가 이 행위를 철저히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른 시장 경제의 원리로 정당화하는 당당함이었다. 단지 자신들은 틈새시장을 잘 공략한 것뿐이라고 말하듯. 그들의 눈빛과 태도에서는 ‘난민들은 단지 클라이언트일 뿐이며, 우리는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서비스 제공자’라는 뉘앙스가 물씬 풍겼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비즈니스의 성공을 위해 자신들의 ‘신용’을 무기로 삼아, 다른 브로커들보다 자신들의 서비스가 성공률이 높다는 것을 알리는 광고에도 꽤 공을 들인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이 불법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영업할 수 있겠느냐”며 되묻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논리였다.

속으로는 그 ‘광고’라는 것이 당연히 음성적인 루트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 아니냐고 반박하려다가,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하기 직전에 굳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 침묵을 지켰다. 어차피 그들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것이 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었기에.

한편으로는 터키 정부가 정말로 그 활동 자체를 막으려 했다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었을 텐데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현실은 터키 정부가 이들의 활동을 눈감아주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궁금해하던 비용을 지불 후의 서비스 보장은 바로 공증인이 건넨 코드에 있었다. 거래 과정에서 워낙 큰 금액이 오가고, 매일 수백 명이 몇 안 되는 브로커들을 통해 현금으로 거래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리스크가 컸을 텐데 이런 브로커와 난민 간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바로 이 공증사무소였던 것이다.

즉, 난민들은 보트를 타기 위해 브로커와 합의한 금액을 공증사무소에 위탁하고 코드를 받는다. 그리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후에야 브로커에게 그 코드를 알려주면, 브로커는 이 코드를 제시하고 공증인으로부터 돈을 받아가는 구조였다.


사실 난민들 입장에서는 무사히 바다를 건넌 후 브로커들에게 코드를 주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보복할 수도 있었다. 물론 돈은 돌려받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던 브로커들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바젤에게 “그냥 그 놈들이 돈을 챙기지 못하게 코드를 주지 마.”라고 제안했을 때, 그는 내게 대답했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시리아인들은 이런 사람들과의 약속도 신의를 가지고 지키려 해. 그들 입장에서도 우리를 믿고 거래를 한 거고. 그 신뢰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더구나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피해는 아마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다른 시리아인들에게 돌아갈 거야. 분하지만 이게 도리라고 생각해.”

그의 현명한 답변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이 거래 과정에서 알게 된 또 하나의 흥미로웠던 점은 더 많은 난민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이 놀랍도록 기발하고 자생적이라는 것이었다. 거의 피라미드 구조에 가까웠다. 누구든 클라이언트이자 동시에 브로커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시리아인 난민들과 직접 소통하는 이른바 ‘새끼 브로커’들은 대부분 난민 출신이었다. 이들은 월급을 받는 대신, 더 많은 시리아인들을 모집하는 노동의 대가로 보트의 한 자리를 인센티브 형식으로 얻었다. 예를 들어 20명의 난민 클라이언트를 브로커 업체에 소개하면, 그 새끼 브로커는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보트에 한 자리를 보장받는 계약 조건이 존재했다.

단순히 생각하면, 목숨을 걸고 모든 대산을 동원하고, 그마저도 부족해 주변 지인들에게까지 돈을 빌려 가성비 최악인 유럽행 보트를 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과다 지불하는 난민들을 착취하는 이 브로커 비즈니스에 제재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들의 활동이 지속되지 못하도록 법적, 실무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약한 자들을 등쳐먹고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이런 브로커들의 비윤리적인 행위는 분명 정당화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안의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면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이 거래 과정에서 목격한 바와 같이, 항상 이해하려고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너무 성급하게, 너무 단순하게 정의 내리지 않으려고.

공증사무소에 들어선 나를 브로커가 유심히 살핀다.


전날 바젤과 함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이렇게 입을 맞추기로 했다. 나는 본래 탈북자 출신으로, 북한 정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파견한 수많은 노동자 중 하나로 중동에서 중국 건설 대기업의 현지 용역으로 일하다가 한 시리아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여성의 사촌이 바젤이라는, 우리의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바젤의 사촌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지만, 전쟁이 격화되면서 약혼자는 그녀의 가족과 함께 전년도에 이집트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현재 독일에 정착했다는. 하지만 여권이 없던 나는 부득이하게 사촌인 바젤의 도움으로 아랍 브로커를 통해 그와 동행하려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우리 딴에는 꽤 그럴듯한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허점이 많은 설정이었기에 혹시라도 브로커가 어떤 증빙 서류를 요구하거나 더 자세히 캐물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앞섰다. 바젤이 전날 밤 브로커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고, 브로커는 일단 나를 데리고 오면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무실에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내심 거짓말이 들통나 배를 탈 수 없다고 할까 봐 불안해하며, 나는 연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어’라는 순진한 표정을 만들어내려 애썼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왠지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듯한 이 브로커가 또다시 막판에 초치는 행동을 할까 걱정됐다. 다행히도 그들의 음지 사업이 그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결국 “돈은 가져왔어?”라는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내가 봉투에서 $100짜리 현금 뭉치를 꺼내자, 이내 나의 출신이 뭐든 상관없다는, 다분히 ‘이건 비즈니스일 뿐’이라는 태도로 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준비하고, 때로는 내가 지나치게 집착하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기도 했던 난민들 여정 동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내일모레 밤 9시 출발. 장소는 개별적으로 메신저로 공지가 갈 거야. 늦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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