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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세계를 향한 렌즈: 분쟁지역의 침묵 속 희망

고향을 등진 불가피한 선택: 바다를 건넌 난민들 (1)

by 해리

아일란 쿠르디: 세상을 뒤흔든 사진 한 장


터키 해변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은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시리아 출신의 세 살배기 난민 아일란 쿠르디(Aylan Kurdi)가 터키 해안가의 모래사장 위에 얼굴이 모래에 박힌 채 싸늘하게 남겨진 주검을 찍은 사진이었다. 파도에 휩쓸려 온 영혼이 빠져나간 그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이던 그 아이를 차가운 파도가 끊임없이 때리던 그 사진에 먹먹함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 한 장의 사진처럼 역사의 흐름에 큰 변화의 물결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이미지를 우리는 살면서 마주치게 된다. 목숨을 건 여정을 나서는 누군가가 그런 엄숙한 여정을 위해 입는 옷이 따로 있는 게 아닌 듯 우리 주위의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여느 아이들처럼 너무나 평범했던 빨간 짧은 소매의 티셔츠와 푸른 반바지 그리고 그 작은 신발이 고스란히 신겨진 채 엎드린 채 뉘어있던 쿠르디가 제발 일어나 새 삶의 희망을 모두에게 주기를 바랐다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하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난 그 아이의 그 장면의 작은 디테일들이 난민 위기의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사진 한 장으로 난민에 대해 온갖 루머를 만들거나 극히 일부인 어떤 부정적인 사례를 확대해석하며 반대하던 유럽의 극우 지지자들조차도 그들의 주장에 힘을 잃게 만드는 그런 힘을 가진 이미지였다. 이 처절한 이미지는 난민수용 문제에 소극적이던 유럽과 그 밖의 국가들의 국민들, 그리고 그들의 정치 지도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사진이 공개된 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열린 문 정책(Open Door Policy)”을 선언했다. 이 정책의 기본적 방침은 육로로 독일 국경에 도착하는 난민들에게 국경을 열어 그들이 합법적으로 독일에 정착할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그런 대담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지도자라는 찬사가 쏟아졌고 그 희망이 생각만큼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결정이었다.

그 결과, 2015년 한 해에만 13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유럽에서 난민 신청을 하게 되었다.


난민들과 함께한 여정, 그 시작


2015년 9월 초, 아일란 쿠르디가 터키 보드룸에서 운명이 뒤바뀐 보트에 올라탄 바로 그날, 난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터키의 또 다른 해안가의 수풀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시리아를 떠나온 쿠르디의 가족과 마찬가지 이유로 유럽으로 향하고자 했던 수많은 난민들과 동행하기 위해 햇살은 따뜻하지만 그 아래 출렁이던 파도는 꽤 차가웠던 늦은 오후 그리스 레스보스로 향하는 보트에 올라탔다.

내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이주했던 2013년부터 지중해에서 난민을 실은 배가 침몰하는 대형사고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10월에 리비아에서 출발한 500명의 난민을 태운 배가 리비아 해안으로부터 수백 km 떨어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중간쯤에 있는 람페두사 섬 근처에서 침몰해 36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사실 그 이전에도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유럽을 향해 새 삶을 찾으려 보트에 올라타는 이들은 늘 존재해 왔었다. 하지만 그런 여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브로커들이 이때만큼 조직적이거나 대담하지는 않았었다. 2011년에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2010년 말부터 2011년 초에 걸쳐 시작된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의 장기 집권 독재정권에 항의한 민주화 운동. 튀니지에서 청년 노점상의 분신자살로 시작되어 이집트, 리비아, 예멘, 시리아 등으로 확산되었다)과 전쟁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며 살기 위해 고국을 떠나야 하는 난민들이 시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이 시기를 기점으로 브로커들은 점점 스케일 큰 운반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만큼 희생자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커져만 갔다.

포토저널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이래 난 알고 있었다. 시간의 문제이지 언젠가 나의 주활동지를 중동으로 삼을 것이라는 것을. 사실 아랍의 봄이 일어났을 시기에 이미 그곳에 갔어야 했지만 미국 워싱턴에서 거주하고 있던 나는 그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던 시기였다. 그러다 당시 파트너가 네덜란드에 직장을 가지게 되고 유럽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좀 더 쉽게 중동을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일상에서 아랍계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를 접할 일이 많아졌다.

몇 개월간 부지런히 중동을 갈 수 있는 네트워크와 일거리를 찾기 위해 움직인 끝에 2014년 초에 한 NGO의 의뢰로 처음으로 요르단과 레바논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 요르단 암만에서 만난 시리아 다마스쿠스 출신의 대학생이었던 오므란과 파디 형제는 나에게 당시 많은 시리아 난민들이 유럽을 가는 루트와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파디는 자신의 약혼자가 전년도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 이미 독일에 정착해 있다고 얘기해 주며 자신도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떠나고 싶지만 전쟁으로 모든 현역 군인들의 복무기간을 정부가 강제 연장했을 때 여권을 압수해 갔고 돈도 없어 요르단에서 꼼짝 못 하고 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람페두사의 사고를 접했을 때 그리고 이 시리아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막연하게 난민들이 유럽에 오기까지의 그 여정을 기록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언뜻 했지만 처음부터 보트를 직접 타는 대담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만약 이 주제를 다음 작업으로 정한다면 다수의 난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한 개인의 여정을 출발부터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사람이 그 과정에서 목격하고 마주하는 것들이 뭔지를 기록한다는 것이 내가 가진 어렴풋한 큰 그림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과정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확실성이 큰 구간인 바다를 건너는 그 순간의 그림이 필요했을 터이다. 그들과 배를 같이 차지 않는 한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표정을 보지 않는 한 난민들이 어떤 두려움과 심리상태로 그 길 위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직접 배에 타는 상상은 정신 나간 짓인 듯했다. 기본적으로 스토리를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나 스스로를 내던질 의향이 있는지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배를 직접 타야 하나?”라는 질문이 스치듯 내 곁으로 다가왔다가 떠나기를 반복하며 그저 내가 어떤 작업할 때 브레인스토밍하는 과정에서 떠올리기는 하지만 실현화되지는 않을 수많은 미친 아이디어들처럼 금세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마치 내 안의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하는 듯했다.

그저 그들이 배를 타기 전까지 그리고 유럽에 도착해서 겪을 일들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만족하자며 스스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는 핑계 아래 애써 배 위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고자 했지만 머릿속에 한번 박힌 그 미친 아이디어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지중해를 건넌 이들의, 또는 그 바다에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인터뷰를 계속 찾아 읽고 들으며 난민들의 바다 위의 모습을 은연중에 형상화하고 있었다.

다라라는 남부 작은 도시에서 시작되었던 시리아 내전은 단순히 오래 지속된 독재정치에 반발하는 국민들과 이를 탄압하던 정부군의 싸움에서 9.11 테러를 일으킨 후 미국과 국제 사회의 노력으로 표면적으로는 큰 활동을 하지 않았던 알카에다가 이 지역에서 알 누스라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더 충격적으로는 급작스레 부상하고 빠른 속도로 영향력을 확대하던 ISIS가 등장하면서 그 전쟁은 점차 복잡해지고 끝이 안 보이는 것처럼 보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저 그 어떤 전투에도 관여하지 않고 일상을 살고 싶어 했던 시리아 국민들에게 갔다. 계속해서 시리아 내전은 세계 뉴스의 중심에 있었고 그에 따라 시리아를 떠나야 하는 이들의 행렬도 멈추지 않았다.

시리아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터키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난민들이 갈 수 있는 국가들이었지만 이집트 또한 몇 가지 이유로 많은 난민들이 가게 되는 목적지였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30년 동안 독재를 해왔던 호스니 무바락 대통령이 사임을 한 후, 국민 투표를 통해 선출된 무슬림 형제단의 리더였던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권력을 잡았을 때만도 시리아인들에게 이집트는 나쁘지 않은 옵션이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였긴 했지만 난민들에게 우호적이던 무슬림 형제단, 싼 물가 그리고 비자 없이도 이집트에 올 수 있다는 이점들이 많은 시리아인들로 하여금 전쟁의 소용돌이가 좀 가라앉고 안전할 때까지만 피해있기에는 어쩌면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시리아인들의 운명은 2013년 7월, 압델 파타 엘 시시(Abdel Fattah el-Sisi) 육군 대장이 쿠데타를 통해 무르시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직후, 거짓말처럼 하룻밤 사이에 뒤바뀌었다. 새로운 정부는 기존 정부가 세운 거의 대부분의 정책들을 뒤엎기 시작했고 시리아인들을 무슬림 형제단에 동조하는 테러리스트로 둔갑시켰다.

여전히 전쟁터인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살고 있는 이집트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씌어 감옥에 가는 등의 고초를 감당해야 하는 난민들은 떠밀리듯이 지중해 건너편 유럽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제안: 모하메드와의 만남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많은 시리아 난민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해 여름 수많은 난민들이 유럽을 향한 배에 올라타던 출발지인 이집트를 가보기로 결정하고 10월에 카이로에 도착하였다.

사전에 찾아낸 시리아 난민 관련 인권 단체, 저널리스트 또는 그간 만난 이들의 소개로 난민의 신분으로 이집트에 와서 살고 있던 많은 시리아인들을 만났다. 그들 중 곧 배에 올라타 유럽으로 가려는 이들을 열심히 찾아 나섰다. 내 딴에는 이곳에 와있는 대부분의 시리아인들이 배에 올라타는 걸 고려하고 있는 잠재적인 인터뷰 대상자였다. 자신의 사연을 배에 올라타기 전에 공유하고 싶을 난민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건 나의 오산이고 착각이었다.

많은 시리아인들은 내게 말했다. 이집트인들의 시리아인들을 향한 태도는 정말 하룻 사이에 뒤바뀐 느낌을 받았다고. 단지 정부가 바뀐 그 사실 하나로 많은 불특정다수의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에게 적대적으로 변화하던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그 당시 시시 대통령은 시리아인들을 모조리 테러리스트 취급하는 것에만 그친 게 아니라 유럽을 향하는 배를 타는 행위조차도 심각한 범죄로 규정해 많은 난민들은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빈번히 아무 이유 없이 체포되는 경우가 생기고 배를 타려다 잡히면 꼼짝없이 감옥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그러한 정부의 감시가 무서워 솔직하게 유럽에 가고자 하는 자신들의 계획을 나 같은 외지인에게 이야기해 주려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저 배 값을 마련할 수 없던 이들이 혹시라도 내가 금전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경우가 더 외래 나를 통해 혹시라도 배에 오를 수 있는 비용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

시리아 육군 대위 출신이었던 모하메드를 만난 건 이 시기였다.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에 비해 별 성과가 없어 조금은 맥이 빠지려던 차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위한 인권 단체를 이끌고 있던 헤바로부터 전화가 왔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얘기를 하려다 말았는데 아직도 유럽 가고자 하는 난민을 찾고 있으면 한 명 소개해줄 수 있어. 이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에 타려다 실패해서 감옥살이 좀 하다가 풀리고 나서 지금은 카이로 외곽에서 머물고 있데.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모하메드가 자신과 가족 인터뷰해도 된다고 하네. 여기서 한 4시간 가야 할 텐데 생각 있으면 연락처 줄게.”

이미 와있던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가급적 인터뷰를 하고 싶었지만 여태껏 마땅한 후보자를 찾지 못해 차라리 확실하게 인터뷰를 하겠다고 자청한 모하메드를 만나러 가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 시간 걸려 카이로로 돌아오는 기차에 올라탔고 다시 차를 렌트해 카이로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이스라엘과의 1973년 전쟁 기념일을 도시 이름으로 한 “6th of October”에 살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와의 첫 만남은 꽤 인상적이었다. 기품 있어 보이는 외모에 진중한 태도 그리고 차분하게 말하는 스타일에 영어도 나름 해서 그가 시리아를 떠난 이유에 대해 통역 없이 대부분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눈에서 어떤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난 군인이야. 군인은 명령을 따르는 존재이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번만큼은 뼛속까지 군인이던 나조차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어. 내게 총격을 가해서라도 진압하라고 명령을 받은 시위대 안에는 내가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들도,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시리아를 사랑하던 애국자들이었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오던 시민들이었어.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기 싫어하던 이들이었고. 그런데 그들이 한 목소리로 생애 처음으로 시위를 하는 거야. 난 유사시에 그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생전 처음으로 의심이라는 걸 하게 되었어. 만약 내 상부의 명령이 옳지 않은 근거에서 나온 지시라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그렇게 주저하던 그를 그의 상관은 명령 불복종의 이유로 그를 처벌하려 했고 그는 그대로 체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부인과 어린 두 아이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오게 된 것이었다. 즉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본인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그는 그저 명령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 하에 시리아에 남아 아직은 우위에 있던 시리아 정부군의 보호막 아래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 테지만 그의 양심이 조금 더 그에게 큰 목소리로 다가온 것이다. 용기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테지만 그로 인해 그는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자신과는 달리 그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었던 대다수의 난민들과 이집트에 와서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타지까지 와서 고생하는 것에 대해 큰 미안함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지만 그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결정을 내렸을 거라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내게 말했다

.

그는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이슈들에 대해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고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늦어져서 인사를 하고 나오려던 내게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했고 이는 여태껏 내 안에 작은 불씨로만 남아있던 그 정신 나간 아이디어에 본격적으로 불길을 살린 한 마디였다.


“해리,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주는 네가 고마워. 솔직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렇게 오래갈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알다시피 이집트에서는 미래가 없어. 오로지 전쟁이 금방 끝나면 바로 다마스쿠스로 돌아갈 수 있게 여기서 이집트인들의 뭐 같은 대우도 참으면서 살고 있었던 건데 그마저도 언제가 될지 모르겠어. 올해 혼자 유럽으로 가려다 실패했지만 내년에 바닷물 온도가 따뜻해질 5~6월쯤에 난민들을 실는 밀항선이 다시 운행하기 시작하면 다시 도전하려고 해. 이번에는 온 가족이 다 함께 가는 걸로. 지금까지 얘기해 보니 넌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 깊게 알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만약에 네가 정말로 우리가 어떤 일을 겪는지 네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면 보트에 같이 타는 건 어때? 브로커들을 위해 일하는 중개실무자들은 시리아인들이 많은데 그들은 내가 시리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음에도 군대를 떠났다는 이유로 나를 리스펙트해. 내가 얘기하면 보트에 네 자리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뭐 그렇게 했다가 마지막 순간에라도 너무 미친 짓 같으면 그냥 타지 않으면 되는 거고.”

내색은 안 하려 했지만 내 안에서 요동 치기 시작했다. 그냥 잠시 왔다가 가버릴 아이디어라고 치부했는데 내 안 의식 기저에 기회를 엿보며 숨어 있었던 듯했다. 모하메드의 말 한마디에 이리 쉽게 마음이 쏠리는 걸 보니. 마치 그저 누가 미끼만 먼저 던져주면 바로 덥석 그걸 물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게 이집트를 떠나 네덜란드에 돌아와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진가가 있는지도 찾아봤다.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호주의 크리스마스 섬으로 향한 한 사진가 그리고 아이티에서 미국으로 향한 배에 몸을 실은 또 다른 사진가)

그리고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나 스스로에게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도 갈 수 있겠냐 또 한 번 묻지만 결국엔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이 시점에서 가부를 결정하지 말자는. 일단 모든 의견을 수렴하고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후 모하메드가 얘기한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아니다 싶으면 그냥 빠지면 된다는. 그저 마지막 순간에 어떤 공포심이 밀려와 내 안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괜한 객기에 그대로 밀고 가지만 말자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시켰다.


스페인 해안경비대에서 근무하며 아프리카에서 배를 타고 넘어오는 난민들을 해상에서 구조하는 일을 했던 친구와도 상의를 해보고 동시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ECRE(European Council on Refugees and Exiles; 난민과 망명자들을 위한 유럽 평의회) 기관에서 일하던 시리아 출신 아잠(Azzam)과 그가 소개해준 기관 내 직원들과도 많은 얘기를 했다.

런던에 있는 프런트라인(Frontline)이라는 국내외의 사회적인 이슈에 관한 포럼을 자주 주최하는 공간이 있어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있는지 보고 참여하곤 했는데 연말에 방문했을 때 때마침 현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던 분쟁지역의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패널리스트 등으로 로이터 등의 언론사 관계자들이 참여했어서 이벤트가 끝나고 네트워킹하는 시간에 나 자신을 소개하며 염두에 두고 있던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다들 흥미로워하면서도 결국에 돌아오는 답변은 똑같앴다. 개인적으로는 임팩트가 클 수 있는 시도이고 그 용기에 경의를 표하지만 기관 입장에서 그런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에 공식적으로 관여하기에는 일이 잘못될 경우 법적 책임소재가 너무 클 것이어서 힘들 거라는.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한다. 혹시라도 정말 감행하고 성공하면 자신들에게 알려달라는 그러면 기꺼이 출판을 돕겠다고. 조금은 얄밉게 들렸지만 그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들의 자리에 있어도 아마도 똑같이 얘기했을 테니.

이집트를 떠날 때도 모하메드에게 생각만 해보겠다고 했지만 크리스마스 즈음에 메시지를 보냈다.

“너랑 갈게. 내 자리도 마련해 줘.”

모하메드를 만나기 전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시리아 여성 림(Reem)은 내게 약혼자의 비극적인 사고에 대해 얘기를 해주었다.

일 년 전쯤 이집트에 넘어와 살고 있던 그녀와 약혼자는 유럽행을 결심하지만 돈이 부족해 약혼자가 먼저 유럽에 홀로 넘어가기로 결정을 했다고 한다. 독일에 무사히 도착해 난민 신청을 하고 받아들여지면 배우자 비자로 림을 초청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온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가족 구성원 중에 한 명이 배에 올라타고 추후에 배우자 또는 미성년자 자식을 초대해 나머지 가족은 안전하게 유럽으로 넘어올 수 있는 많은 난민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약혼자가 탄 배가 지중해에서 사고가 나 시체조차 못 찾고 그대로 림은 사랑하는 이를 지중해 바다에 빼앗겨버렸다. 예상치 않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림은 원망과 그리움이 섞인 감정으로 그 지중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질 무렵부터 같이 바닷가를 걸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안 될 정도의 무한대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소름을 돋게 만드는 공포심이 밀려왔다. 어느새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나는 저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출렁이는 바다 위에 표류하고 있는 난민을 가득 실은 배 한 척에 타고 있는 그 광경을 떠올리며 그 위에 있는 이들의 공포에 질린 그 표정과 소리가 가깝게 느껴지며 내 몸이 마비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한동안은 밤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저 멀리 어딘가에 표류하고 있는 배와 그 위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보통은 사람들은 어떤 매우 괴로운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것이 일상인데 난 마치 내가 실제로는 겪지도 않은 일을 상상만으로 내 안에 실현화시켜 PTSD를 겪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자청해서 그 배를 타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고 있던 나 자신의 모순이 솔직히 설명이 되지는 않던 시기였다.

해를 넘기고 2015년 5월에 카이로로 다시 넘어갔다. 출발 전날 모하메드에게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아파트로 가겠다고 얘기하고선 내 나름의 마음의 각오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하자마자 차를 렌트해 “6th of October”시를 향해 가면서 조금의 비장함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여기까지 왔어. 마지막 순간에는 어찌 느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큰 모험일 수도 도박일 수도 있을 거야.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

몇 개월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 반가웠다. 우리는 포옹을 진하게 하고 나머지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눈 후 차를 마시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어느덧 중동 지역 차의 특징인 설탕이 듬뿍 담긴 그 블랙티를 아랍인들과 마시는 게 편안하게 느껴졌고 이들과 배를 같이 탈거라 상상하며 또 한 번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그려본다.

“모하메드, 우리가 배에 타기 전에 최대한 너의 이집트에서의 삶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괜찮으면…”

“해리, 그전에 할 말이 있어.”

말을 자르는 그의 모습이 익숙지 않았지만 안에서 드는 불길한 느낌에 마치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이미 어렴풋이 예감이 들었다.

“응, 얘기해.”

“한동안 고민을 했는데 우리 가족은 이집트에 남기로 결론을 내렸어.”

“........”

“와이프가 가기 두렵데. 힘들어도 이집트에서 버티다가 상황이 나아지면 다마스쿠스로 돌아가기를 원해. 지난 몇 개월간 설득하려 했어. 여기에는 그 어떤 미래도 없다고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오랜 기간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런데 뭐라고 해도 살고 싶다는데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기가 힘들었어. 지난번에 얘기해서 알고 있잖아,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도 이미 내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미안해하는지를.”

“………”

제대로 한 방 맞은 듯 꽤 길게 느껴졌던 몇 초가 지난 후, 온갖 생각과 감정이 물밀듯 내 안을 뒤집어 놓는 느낌이었다.

‘왜 네덜란드 출발 전에 그 얘기 못해 줬어? 이렇게 큰 심경의 변화나 결정을…?,’

‘휴우, 그래. 내가 막판에 겁쟁이처럼 포기하는 것보다는 이들을 핑계로 배에 오르지 않은 게 차라리 나을지 몰라,’

‘사람 가지고 장난하니? 내가 지난 몇 달간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는지 알아?,’

‘아냐, 당연히 이해해야지. 너라도 가족의 생명을 담보로 쉽사리 배에 못 오를 거 아냐?,’

‘미쳤구나 전해리. 본질을 잊어버린 거야? 그깟 작업이 뭐라고.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었어?’

내 안에서 충돌하는 제각각의 목소리와 달리 난 이렇게 밖에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 이해해. 쉽지 않았을 거야. 계속 연락하자. 너의 가족에게 행운을 빌어줄게.”

카이로로 돌아오는 길에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이집트행 편도 비행기표를 끊고선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큰 전투를 앞둔 군인처럼 각오를 굳게 하자고 다짐하던 나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고 너무나 허탈한 심정에 그냥 다 포기하고 헤이그로 돌아갈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엔 혹시라도 모하메드의 대타를 찾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알렉산드리아행 기차에 올라탔다. 꽤 긴 시간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온 이 프로젝트는 시작을 하기도 전에 엎어지고 이미 물 건너간 실패로 돌아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저 마치 떠난 사랑에게 미련 남은 사람처럼 행동하듯 난 왠지 내가 찾는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고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를 걸으며 천천히 놓아주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모하메드를 대체해서 나를 난민들의 행렬에 합류를 시켜줄 이를 찾디 못할지도 모른다는 나의 예감은 애석하게도 어긋나지 않았다. 한 달 가까이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났지만 결국 원하던 그곳으로 데려갈만한 이를 끝내 찾지 못했다.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문득 든 ‘이집트 두 번이나 한 달씩 지내면서 남들 다 가보는 피라미드 한번 못 보고 가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패잔병처럼 귀국했고 한 달여 후에 동생의 결혼식을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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