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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가져온 약혼반지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삶

by 해리

분쟁지역, 특히 전쟁터를 간다고 하면 사람들에게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을 테다.

죽음과 상실, 빈곤과 기근, 그리고 가장 심하게는 왠지 희망이 없을 것만 같은 현실.

물론 이 모든 것이 만연하게 존재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어서 선진국에서 일상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각박한 환경에 자신이 놓인다면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의 끈을 더 쉽사리 놓지 않을까 싶을 테지만, 나는 또한 목격했다. 인간이 얼마나 회복력이 강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아무리 척박한 환경이라 해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은 그 누구에게도 온다는 것을. 돌 밖에 없는듯한 절벽에 그리고 사막의 틈새에서도 꽃이 피어나듯,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삶은 그 길을 찾아내는 법이다.


고착화된 이미지와 내면의 모순


분쟁지역에서 다큐 사진가로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내 머릿속에서 고정화되는 이미지들을 주의하려 한다. 열악한 상황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서 묻어 나오는 그 눈빛과 표정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다행히 자주 볼 일은 없지만, 가끔 식당에서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 프로그램 중간중간에 방영되는 공익광고들을 보며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분쟁지역 또는 자연재해의 피해를 입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한 후원 기금을 모으기 위해 국제구호단체들이 만든 광고들이다.

큰 눈망울을 가진 멍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이들. 전쟁과 기아에 지친 채 애처롭게 비치는 모습을 배경으로, 그들이 비극적 상황과 도움의 필요성을 차분히 설명하는 유명인의 내레이션. 기부를 호소하는 가장 전형적인 광고 형태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가슴을 세차게 때리는 연민을 불러일으켜 즉시 전화기를 들고 광고에 안내된 번호로 후원하게 만드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 영상이다. 그러나 이런 강렬한 장면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보는 이에게 피로감을 안겨줄 수 있다. 특히 직접 도울 여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미묘한 죄책감을 심어, 결국 그 애처로운 눈빛에서 시선을 돌리고 싶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죄책감도 일으키는 그래서 그 눈망울을 외면하고 싶게 만들 광고일 수도 있을 테다.


내가 낯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나 자신이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광고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면서도, 과연 그런 방식으로밖에 보여줄 수 없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곤 한다. 동시에 현장에서나 자신이 그러한 고착화된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다는 내면의 어떤 모순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아마도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는 직업을 가진 내 안에 상존하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런 모습에 오랫동안 노출되며 조금은 무감각해진 나 자신이 이들의 고통을 전달할 새로운 방식을 찾고 싶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하는 좌절감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강한 감정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그런 전통적 광고 방식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현실은 그런 연민을 자아내는 눈빛과 표정이 실제로 존재하며, 내가 찾아 나서는 많은 이들은 보다 나은 환경에 있는 이들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런 표정을 마주할 때면 자연스레 카메라가 들려 셔터를 누르게 되지만, 속으로는 이 행위가 또 다른 형태의 ‘비극 포르노’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스스로 상기시킨다 - 이러한 현실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이런 고통의 존재를 더욱 쉽게 부정하고 더 외면하게 될 것이라고.


미소 뒤의 비극


역설적으로, 모든 이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고통스럽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이들로부터 그와 상반되는 모습을 목격할 때 느끼는 의외성이 난 반갑다. 마치 내 안의 편견이 깨지는 듯해서이다.

그 당시까지는 아직 중동발 난민들을 자주 접할 기회가 없어 난민들의 삶에 대해 아주 피상적인 지식과 정보 밖에는 없던 내게, 시리아 난민으로서는 처음으로 만났던 오므란은 여러 차례 나의 편견을 깨 준 고마운 친구였다.


오므란은 늘 웃고 있었다. 덩치가 크지만 동글동글하고 덥수룩한 수염 하나만으로도 실제보다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여느 아랍 남자들과 달리, 그의 얼굴을 뒤덮은 수염마저도 인상을 더 부드럽게 만드는 장식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서글서글한 친구였다. 전형적인 ‘예스맨’으로, 남들이 꺼려할 만한 일도 두 말 없이 받아들이고 주어진 일에 진심으로 열성적이었다. 생김새나 행동 하나하나가 주변 사람들이 호감을 갖게 만드는, 어떻게 모든 것이 저리도 만족스럽고 행복해 보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그런 겉모습과 미소 뒤에 숨겨진 비극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오므란을 처음 만난 것은 중동을 처음 방문한 2014년 초였다. 국제구호단체 중 하나인 케어 인터내셔널(Care International)의 의뢰로,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진행 중인 시리아 난민 지원 캠페인에 쓰일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물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언급한 형식의 광고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독일 출신의 공보관 요하나와 함께 일하며 그들의 활동을 기록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고, 첫날 암만에 위치한 케어의 요르단 지역 사무실에서 일하는 몇 명의 시리아 출신 난민 자원봉사자들을 소개받았다. 그중 한 명이 오므란이었다.


상대방을 곧바로 무장해제시킬 듯한 그 환한 미소 때문에, 그가 전쟁을 피해 온 난민이라는 사실보다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밝은 대학생 같은 인상이 강했다. 환한 미소를 달고 살던 그의 이미지는 케어에서 원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굳이 그의 사진을 찍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른 난민들과 달리 모든 것을 잃지는 않은 철없는 학생이라 저렇게 미소를 띠고 다닐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그가 조금 가벼워 보이기까지 했던 것 같다. 이 또한 내 경험 부족과 편견이 만든 오판이었음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므란의 일과는 꽉 차 있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자원봉사자로 NGO의 행정 업무와 통역 역할을 하고, 잠시 쉬었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인근 샌드위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강행군을 주 5일 해내고, 주말에는 그 가게를 직접 열고 닫는 등 하루 종일 일하는 근면한 청년이었다. 일과를 마친 어느 저녁, 그의 가게를 방문했을 때도 밤늦은 시간임에도 그 미소는 상대방까지 밝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고, 그가 만들어준 시리아 스타일의 슈와르마 샌드위치는 그때부터 하루 한 끼는 꼭 먹어야 하는 특식이 되었다.

그는 형과 시리아 군 복무 시절 알게 된 두 친구와 함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처음 요르단에 도착했을 때는 난민 캠프에서 생활했지만, 그곳의 무료함과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도시로 나와 무작정 일을 찾다가 우연히 케어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문득 캠프 밖에서 사는 난민들의 생활도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어 인터내셔널과의 계약은 열흘이었고, 그 이후에 한 달여를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지내며 시리아의 인접국에 살고 있는 난민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는 개인 작업을 이어갈 예정이었다. 왠지 20대 초중반의 이 시리아 친구들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환경이나 상황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않고, 그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오므란에게 그들의 아파트에서 며칠 같이 지내도 되는지 물어봤다. 예상대로 돌아온 대답은 또다시 “물론이지!”였다.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해서 내 숙소를 마련해 준 직원에게 지정된 숙소를 떠나 오므란의 아파트에서 며칠 보내겠다고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요하나가 잠시 따로 얘기하자며 날 불러냈다.

“해리, 나랑 먼저 상의하고 결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암만은 위험지역이 아니라서 너처럼 외주로 고용된 프리랜서들은 숙소를 어디로 정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른 측면이 조금 걱정돼. 오므란이 먼저 초대한건 아니지? 편한 숙소를 두고 굳이 그 집에 머물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간과한 점이 있어. 아랍인들은 거절을 잘 못하는 문화가 있어. 특히 상황적으로 오히려 그들이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도, 그들은 우리를 중동을 방문하는 손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언가 부탁하거나 요청하면 자신들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일단 ‘예’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아. 모든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 익숙한 나 같은 독일인에게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비생산적인 소통 방식이지만, 중동에서 더 시간을 보낼수록 그저 네가 받아들여야 할 문화적 차이야. 이미 오므란과 얘기가 끝난 것 같으니 상관에게는 네가 외부에서 며칠 지낼 거라고 잘 설명할게. 그런데 많은 아픔을 간직한 친구니까 이왕 하는 거 인터뷰 잘해줘.”

“아픔?”

“몰랐구나, 오므란 가족에 대해서. 그 친구가 늘 미소 짓고 다녀서 그런 비극은 전혀 눈치채기 힘들지만, 그의 어머니가 살해당한 지 얼마 안 됐어. 임신 중이던 오므란의 누나가 출산이 임박해 병원에 가는 길이었는데. 문제는 택시 운전사가 하필 저격수들이 잠복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치 게임하듯 쏘아대는 다마스쿠스의 한 지역으로 잘못 들어간 거야. 택시 안에서 한낮에 스나이퍼의 총격으로 즉사하셨대. 말이 돼? 그 충격에 누나는 사산했고.”

“…”

“시리아 정부가 반군들이 숨어 있다고 믿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러시아 용병 스나이퍼들을 배치했는데, 이들은 심지어 일반 시민들도 가리지 않고 총을 쏘았어. 미친 짓이지. 사람 목숨이 그저 장난감이야. 오므란은 제대를 앞두고 있었는데 정부가 전쟁을 이유로 복무 기간을 연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 같이 사는 친구들과 함께 휴가 때 복귀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 요르단으로 온 거야.”

전날에도 마주했던 오므란의 미소가 내 머릿속에서 그의 가족들의 택시 안에서의 비명과 공포와 겹쳐 갑자기 밀려온다. 그 미소 속에 내가 놓친 어떤 단서가 있었을까? 내가 바보처럼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걸까? 그런 고통을 감당하고서도 일상에서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내가 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다음 날, 출근하는 오므란을 은근히 관찰했다. 내가 놓친 것은 없었다. 누가 봐도 그의 움직임에는 상실과 연관된 고통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조금 덜 바빠 보일 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네 어머니 얘기를 어제야 들었어. 왜 말하지 않았어? 완전히 놓쳤어. 그뿐만이 아니야. 그 평온한 미소 때문에 네가 아무런 아픔 없이 자라온 철부지였을지도 그리고 군대에 더 있기 싫어서 탈영한 케이스일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어. 미안해.”

내 말을 듣던 그의 미소 띤 얼굴이 처음으로 잠시 미소를 거두고 묵직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잠시 하늘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냐, 괜찮아. 어머니가 하늘에서도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걸 알아. 보살펴 주실 거고. 다만, 많이 그리워.”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이지만, 가까운 이의 예상치 못한, 준비되지 않은 죽음과 그에 따르는 슬픔을 감당하는 일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저렇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라는 무대에서는 원치 않는 순간에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닥뜨릴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과 며칠 전에 만나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한 친구의 아픔이 갑자기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세상의 모든 죽음을 애도할 수는 없으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서도 차등을 둘 수밖에 없다. 뉴스로 접하는 먼 곳의 전쟁 사망자 수나 바다를 건너려던 난민들 사고 사망자 통계는 그 죽음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부족하기에, 좀처럼 단순한 뉴스 이상의 감정적 울림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연을 가장한 인연으로 오므란과 같은 아픔을 품은 이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그것이 감정적인 교류로까지 발전하면 비로소 누군가의 구체적인 고통과 아픔이 내게도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내 안에서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와 개인적인 교감을 나눈 친구가 겪어야 하는 그 고통을 야기한 전쟁이, 그것이 어떤 형태로이든 간에, 왜 일어나선 안 되는지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게 된다. 가능한 한 더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라며 그들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분쟁 지역을 찾아오지만, 동시에 그 한계 역시 처절하게 느끼기도 한다.


난민의 현실


며칠 후 오므란이 알려준 주소를 가지고 택시에 탔는데, 주소지가 분명하지 않은지 운전기사가 내게 친구에게 전화해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길을 묻는 그 짧은 대화에 운전사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내용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랍어였지만,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것도 아닌데 그 작은 어조의 변화에서도 불쾌감이 감지됐다. 처음에는 그저 오므란이 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그런가 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기사는 내 직감을 확인시켜 주었다.

“시리아인이지? 지긋지긋해. 어느 순간부터 요르단은 중동의 쓰레기통이 된 느낌이야. 처음엔 망할 놈의 이스라엘 건국 때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우리나라에 밀어 넣더니,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집권 내내 그리고 그 인간이 죽고 나서도 이라크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왔거든. 좀 잠잠해지나 싶더니 이제는 시리아인들까지.”

이웃국가에서 벌어진 불행을 안 됐다고 여기며 나름 시리아에서 발생하는 난민들에 대해 대체적으로는 수용적이었지만, 이웃의 문제가 내 문제가 될 때 자연스레 느낄 수 있는 감정일 테다.


그들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오므란이 이미 일하러 나간 후였고, 그의 룸메이트 오마르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놀라지 않은 척하려 노력했지만, 속으로는 아파트의 상태에 꽤 충격을 받았다. 말이 아파트지 이건 건물을 짓다 만 그저 시멘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창문도 설치하다 만 상태라 두꺼운 커튼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고 있었고, 전선들이 천장과 벽에서 그대로 노출된 채 매달려 있었다. 가구라고는 어디선가 구한 싱글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가 전부였다.

오마르가 영어를 꽤 잘해서 그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네 명의 친구는 내전이 시작했을 때 이미 의무복역 기간을 거의 마치고 다마스쿠스 대학에 복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전이 발발하자 정부는 군인들의 전역을 허가하지 않고 복무 기간을 연장했고, 고민 끝에 이들은 탈영을 선택해 자발적으로 난민이 되어 국경을 넘었다. 남았다면 같은 시리아인을 죽이는 데 동원되거나 반대로 목숨을 잃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 전쟁의 명분이 양측으로 갈라져 싸우던 다른 시리아인들만큼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에게 중간지대를 허락하지 않았고, 한쪽을 선택하기만을 강요했다. 그들은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요르단의 난민 캠프에 몇 개월 보냈는데, 그것 역시 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고 했다. 젊고 건강한 몸으로 하루 종일 무력하게 빈둥거리며, 국제 구호단체에서 제공하는 쿠폰으로 캠프 내 제한된 물품만 살 수 있는 가게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들은 여전히 꿈 많은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다. 다행히 지인의 소개로 보수는 적지만 일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암만으로 왔다는 것이 오마르가 요약해 준 상황이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법률가, 기업인, 선생님이 되기 위해 한 걸음씩 꿈을 향해 나아가던 청년들이었지만, 이곳 요르단에서는 그저 불법이민자에 불과했다. 그나마 운이 좋아 일자리를 구한다고 해도 요르단인들보다 현저히 낮은 임금으로 단순노동만 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희망


며칠간 신세를 지는 만큼 뭐라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에 함께 마실 맥주 몇 캔을 사 들고 갔다. 무슬림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막상 암만에 와서 보니 젊은 요르단인 중 꽤 많은 이들이 술을 마시는 데 거부감이 없어 보였고, 이 시리아 청년들도 그럴 거라 짐작한 내 실수였다. 오마르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하우스메이트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밤이 되자 오므란의 형인 파디가 먼저 돌아왔다. 오므란과는 달리 매우 마른 체형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파디는 몸살 기운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아파트의 유일한 침대 이불속으로 들어가 나와 오마르의 대화에 간간이 참여했다. 영어가 편하지 않았던 파디는 주로 오마르와 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오므란과 또 다른 오마르까지 아파트로 돌아와 작은 방에 약간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농담을 했다. 시리아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데 요르단 여자 만나서 결혼하면 비자 나오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요르단 여자와 시리아 여자를 비교하면 누가 더 아름다워?” 이 질문에 다들 한 목소리로 발끈했다. “시리아 여성들이 당연히 훨씬 아름답지!”


연이어 “그럼 레바논 여자와 비교하면?”하고 묻자 그들의 반응이 묘하게 변했다. 끙끙거리며 마지못해 인정하는 듯, “글쎄… 레바논 여자들이 평균적으로 더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재빨리 덧붙였다. “거긴 성형수술이 흔하잖아! 자연미인으로는 단연코 시리아 여성들이 중동에서 가장 빼어나!” 그러면서 다들 장차 시리아 여성과 결혼할 것이라고 굳게 선언했다.

그때 오마르가 슬쩍 귀띔했다. 파디는 애인이 지금 독일에 있다고.

“독일 어디? 나 독일 바로 옆에 사는데.”라고 말하자, 그동안 대화에 소극적이던 파디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편치 않은 영어로 그가 대답했다.

“내 정혼자가 독일에 있어. 이름은 키나나이고. 그레벤(Greven)이라는 도시에 산다는데, 네가 사는 곳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어?”

생소한 지명이라 검색해 보니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대략 3시간 거리에 있는 독일 서부의 작은 도시였다. 그다지 멀지 않다고 답하자 파디의 다음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될까? 혹시 내 약혼녀에게 반지를 좀 전해줄 수 있을까?”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하하, 파디. 우리 겨우 한 시간 전에 만났잖아. 정말 나를 믿을 수 있어? 내가 그 반지를 가지고 사라지면 어쩌려고?”

내 농담에도 파디는 그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You are really serious, aren’t you?”

정말 그랬다. 그는 눈빛 하나만으로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간절함이 담긴 눈동자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내 양심이 절대 편치 않을 것이라고. 그 죄책감은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흠, 알았어. 며칠 후 레바논으로 가서 3주쯤 있을 거야. 그동안에 반지 준비해 둬. 유럽으로 돌아가기 전에 암만에 몇 시간 경유할 예정인데, 도시로 들어갈 시간은 없을 테니 공항으로 반지를 가져오면 그 행운의 여인에게 전해줄게.”

레바논에 머무는 동안, 그의 갑작스러운 부탁이 떠올라 미소 짓다가도 전쟁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을 겪어야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그리고 그 아픔이 오히려 사랑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한 날이 다가왔고, 공항에 파디와 함께 오마르도 동행했다. 파디를 보고 웃음보가 또 터져버렸다. 파디는 몇 주 전 그 허름한 아파트에서 피곤에 절어 낡은 스웨터를 입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단정히 손질한 채, 심지어 꽃까지 들고 나타난 것이다. 반지만 전해주는 것보다 영상 메시지라도 찍자고 제안했더니,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한 신사가, 전혀 다른 페르소나를 풍기는 인물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완벽히 변신한 그를 보며, 우리가 얼마나 쉽게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오마르가 자청해서 디렉터 역할을 맡았다.

“무릎 꿇고 해야지, 더 로맨틱하잖아 낫지!”

부끄러워하며 구석으로 가자는 파디를 오마르가 설득한다. 긴장한 나머지 무언가 어색한 표정과 어투로 말하는 파디에게 오마르는 웬만한 영화감독 못지않은 열정으로 코치했다. 감정을 그렇게밖에 표현 못해?”라는 면박에 파디는 땀을 삐질거리면서도 조금씩 자연스러워졌고, 마침내 원하는 장면이 완성됐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작은 상자를 열어 반지를 보여주는 순간까지. 나 역시 그때 처음으로 반지를 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잘 고른 것 같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이 너무나 잘 전해지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반지로 보였다.


재회


네덜란드로 돌아온 나는 지체 없이 독일로 향했다. 당사자도 아닌데 운전하는 내내 가슴이 설레었다. 파디는 이미 키나나의 언니인 파이하의 연락처를 알려줬고, 파이하에게 연락해 이 전달을 작은 깜짝 이벤트로 계획하기로 동의했다. 약속한 카페에 도착하니 파이하와 남동생이 먼저 와 있었다.

키나나는 나중에 어머니와 함께 올 예정이었다. 기다리는 동안에 파이하를 통해 그들이 독일에 오게 된 과정과 지난 일 년간의 정착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적응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지방 정부는 두 개의 방이 있는 집을 보스니아 출신의, 네 명으로 구성된 다른 가족과 함께 쓰게 했다. 문화권과 언어가 달랐던 두 가족이 작은 집을 공유하는 것은 분명 어려움이 많았을 테고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파이하에게 많은 부담감이 주어지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독일로 바로 합류하지 않고 쿠웨이트에서 일을 하던 키나나의 아버지가 빚을 내 별도의 아파트를 구하려 해도 독일의 난민 승인 절차상 현재 거주지를 떠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문득 영어를 전혀 모르는 이 보스니아 가족이나 통역할 가족구성원이 없는 다른 난민들은 얼마나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침내 키나나와 어머니가 도착했다. 이미 파디로부터 내 방문에 대해 들은 키나나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조용히 인사했다. 언니와 달리 내성적인 성격이 느껴졌다. 파디가 직접 올 수 없어 너무 아쉬워했다며, 그가 남긴 영상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애초에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었고, 키나나가 먼저 독일로, 얼마 후 파디가 요르단으로 가게 된 것뿐이었으니 프러포즈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각자 힘겹게 살아가는 중에 이렇게 뜻밖의 방식으로 약혼반지를 받고 정식 청혼을 듣는 것은 분명 키나나에게 깊은 감동이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키나나와 그 뒤에서 딸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내는 어머니를 보며, 이 특별한 순간에 작은 역할을 맡게 해 준 파디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파디와 키나나의 재회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해 보였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에도 까다로운 절차를 걸쳐 직계가족만 초대할 수 있었기에, 파디가 키나나를 만날 유일한 방법은 그녀처럼 목숨을 걸고 고무보트에 몸을 실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탈영하며 여권을 남겨둔 그로서는 요르단을 벗어나는 그 첫 관문조차 넘기 어려워 보였다.

요르단에 갇혀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 발이 묶인 파디와, 낯선 독일에서 새 삶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키나나. 함께라면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을 텐데, 이들은 그저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되뇌며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갈라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일 년 여의 시간이 지난 후, 뜻밖에 소식을 접했다.

그 생이별의 시간이 예상보다 짧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난민 이동이 일어나던 그해, 파디와 오므란도 요르단을 탈출할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떠난 수많은 난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대열에 합류해 배에 올라타고, 걷고 또 걸으며 조금씩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었다. 오므란 역시 요르단에서 함께 자원봉사하던 마람과 약혼한 채 파디와 함께 보트에 올랐고, 시간이 흘러 파디와 키나나가 정착한 곳 가까이 도르트문트에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내가 목격한 삶의 아름다움은 이것이다 - 남들 눈에는 절망적으로 열악해 보이는 환경에서도, 삶에 감사하고 웃을 수 있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사실.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는 이들이 있듯, 나락에 떨어진 듯한 상황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는 영혼들이 있다. 이들은 어쩌면 가장 강인한 사람들로,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하며, 그들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존재들이다.

유럽에서 앞으로의 삶도 분명 쉽지 않은 여정일 것이다. 그들 인생의 새 장에는 오직 행운만이 가득하기를 바랐다. 적어도 제2의 고향 독일에서는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두려워하며 죽음의 그림자 아래 살지 않아도 될테니. 그리고 오므란이 말했듯, 어머니가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지켜주실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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