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등진 불가피한 선택: 바다를 건넌 난민들 (3)
출발
우리는 출발 전까지 각자 시간을 보냈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배를 타는 여정 동안 내 장비가 바닷물에 젖지 않도록 방수 파우치를 구해야 했고, 이제 배를 타는 것이 확정된 이상 다른 난민들처럼 구명조끼도 마련해야 했다.
그동안 나 자신에게 속삭이던 모든 합리화가 무색해졌다. ‘배를 타는 위험은 과장된 것일 수 있어’, ‘만약 마지막 순간에 겁이 나면 그냥 돌아서면 돼’라며 스스로에게 늘 빠져나갈 여지를 주었던 내가, 이미 배에 올라탄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난 어느새 출발을 앞둔 여느 난민들처럼 몸과 마음이 분주해져 있었다.
아마도 당시의 긴장감과 흥분에 휩쓸렸기 때문일 것이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배에 오르는데, 내가 여기서 빠지는 건 말이 안 되지.’ 확실히 이성보다는 감정이 내 결정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이스탄불, 특히 많은 시리아인들이 임시 거처를 잡고 브로커를 만나며 해안가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던 출발지였던 파티(Fatih) 지역은 이미 출발을 앞둔 난민들로 넘쳐났다. 특히 악사라이 역 주변은 빈틈없이 시리아인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터키인인지 난민인지는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먼 여정을 앞두고 있음을 알리듯 짐을 들고 있었고, 하나같이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검은 봉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지만, 곧 그것이 구명조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웃지 못할 광경은 이 일대의 거의 모든 가게들 밝은 색상의 구명조끼를 팔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터스포츠 상점뿐만 아니라 식료품점, 부엌용품점, 구두수선소, 약국, 심지어 중동 특유의 슈와르마 샌드위치 가게에서도 구명조끼를 판매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 동네에서 구명조끼가 얼마나 ‘핫’한 상품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마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으로, 구명조끼를 구매하면 판매자들은 마치 배에 타기 전에 당신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배려라도 하듯, 커다란 불투명한 검은 플라스틱 봉지에 담아서 주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절반은 그런 검은 봉지를 손에 들고 있는 듯했다.
네덜란드를 떠날 때 나름 배에 타고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낼 것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물품을 선택했지만, 막상 출발이 확정되자 마음이 조금은 조급해졌다. 혹시라도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더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어떤 형태의 여행이라도 짐을 꾸리는 일은 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목적지만 있고 여정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고민의 깊이는 더할 수밖에 없다.
문득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낭 하나에 미래를 담아 길에 나선 주변의 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준비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 경험 많은 여행자는 배낭에 더 많은 것을 넣으려 하기보다, 짐을 최소화하는 법을 터득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결국 돌아갈 집이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 난민들은 원치 않는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된다. 인생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진리를,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배우게 된다. 포기하는 법에 관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이 짧은 여정에서 실천해야 하는 교훈. 내가 그들의 입장이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여정에 나설 때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아쉽고 어려울까.
이런 철학적인 질문은 접어두고, 나는 내 역할에 집중하기 위해 체크리스트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조난 상황을 대비해 위성 신호로 위치를 추적하거나 간단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장치를 점검하고, 옷은 마르고 젖고 춥고 더운 모든 상황을 고려해 필요한 한 벌씩만 챙겼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장비였다. 물 위에서, 그리고 길 위에서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최대한 줄여 가져왔지만, 여전히 배낭의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카메라와 충전기를 개별 방수 파우치에 넣자 그 안의 공기 때문에 오히려 부피가 더 늘어났다.
출발 당일 오전,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의 거리를 걸었다. 이 순간 내 감성은 증폭되어 평소라면 쉽게 지나쳤을 작은 디테일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어떤 광경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직접 스케치하는 것이라고. 사진을 찍는 것은 너무 순식간에 순간을 프레임에 담아 다음으로 넘어가게 하기에, 나중에 그 기억을 사진을 통해 끄집어낼 수 있으리라 착각하게 만든다. 정말로 잊고 싶지 않은 광경을 마주했다면 잠시 멈춰 수 분간 그 디테일을 명확히 볼 수 있도록 스케치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날, 나는 마치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시간인 양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스탄불의 거리 풍경을 시간을 들여 머릿속으로 스케치했다. 일상을 유지하는 터키 시민들과 곧 바다 위에서 미래를 건 여정을 떠날 난민들이 한 거리에 자연스레 뒤섞여 있는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전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앞에 앉아 있던 대여섯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뒤를 돌아 나를 멀뚱히 쳐다보다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20대로 보이는 엄마 앞에 놓인 검은 봉지 속 구명조끼를 보며 그들 역시 난민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들 또한 곧 바다 위에서 운명을 건 시간을 보낼 터였다. 엄마와 눈이 마주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행운을 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그저 딸에게 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나무라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그녀 역시 떠나기 전에 세상을 마음에 담아두려는 듯했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집합장소인 악사라이 역에 해가 많이 기울어진 여섯 시경에 도착했다. 바젤과 루나는 이미 나와 있었다. 그들은 전날과 같은 옷을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다가가는 나를 보고 일어나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작은 미소를 건넸다.
“그 시간이 왔어, 나의 친구.”
“좀 피곤해 보여. 잠은 좀 잤어?”
“별로. 루나는 시리아에 있는 아이들과 한동안 통화하느라 그러고 나서도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에 대해 꽤 늦게까지 대화를 나눴어. 조금 흥분되기도 했고.”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보트에 탄다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여자 친구와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결국엔 호스텔 루프탑에서 이스탄불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혼자 감성에 젖어 있었어.”
지하철역 옆으로는 꽤 큰 광장이 있었고, 퇴근하는 시민들과 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이들, 그리고 오늘 밤 배를 타려는 난민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중 누가 대기 중인 난민인지는 그들의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조하고 상기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어떻게 해안가까지 이동할지, 해안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배에 탑승하게 될지, 그 과정에서 발각될 위험은 없는지 철저히 어둠 속에 있었다. 브로커들은 그저 저녁 여섯 시에 이곳으로 집한하라는 단순한 지침만을 주었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고 여명이 거의 사라져 어둠이 짙어졌을 때, 갑자스러운 웅성거림에 고개를 들어보니 호화스럽게 보이는 대형 관광버스 일곱 대가 도착해 있었다.
‘설마!’라고 생각하는 사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짐을 챙겨 들고 그 버스들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젤은 “우리도 서두르자”라며 루나의 손을 이끌고 대로로 나섰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엊그제 만났던 브로커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손에 명단을 든 채 인원을 확인하고 우리에게 버스를 배정해 주었다.
“솔직히 이런 괜찮은 버스는 전혀 예상 못했는데? 오히려 난민들이 이렇게 좋은 버스를 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을 역으로 이용한 거 아닐까?” 농담을 하자 바젤이 받아쳤다.
“그럴지도. 하지만 이게 저 브로커들이 우리에게서 그렇게 돈을 받고선 약간의 양심이 있어서 베푸는 선심이라면, 기꺼이 받고 한숨 푹 자겠어.”
짐을 밑칸에 밀어 넣고 버스에 올랐다. 거리의 노란 가로등이 만들어낸 빛이 버스 안의 난민들을 비추는 색조가, 버스 안의 침묵에 더한 엄숙함을 주는 듯했다. 버스 중간쯤 통로 쪽 빈자리에 앉으며, 창가에 앉아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던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살람 알레이꼼.”
“알레이꼼 아살람.”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옆에 앉은 비아랍인의 존재가 분명 이 중년 남성의 호기심을 자극했음이 분명했다.
출발 후 약 30분이 지난 후, 그는 영어로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난 홈스에서 역사 선생님이었어요. 시리아 어디에서 오셨나요?(웃음)”
나는 미국식 억양을 숨기고 한국어 억양으로 브로커에게 했던 거짓말을 반복했다. 주로 고향의 현재 상황과 전쟁 발발 이전의 아름다웠던 고향에 대해 애정을 담아 설명하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삶의 연륜이 느껴지면서도 겸손한 그가 마음에 들어, 거짓말로 관계를 시작한 점이 조금 미안해졌다.
구글맵으로 우리가 지나는 경로를 계속 확인하며 지도에 표시했다. 에게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남서쪽으로 진행했고, 페리를 타고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차나칼레 지역으로 건너가 계속해서 남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자정이 넘어 우리는 해협을 건너기 위한 작은 항구에 도착했고, 배를 타는 구간에서는 모든 승객이 내리게 되어 이스탄불 이후로 운명을 함께 할 이들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 적어도 백 명은 넘어 보였는데, 거의 전부 아랍인으로 보였지만 내가 이 그룹의 비아랍인은 아니었다. 의외로 아프리카인으로 보이는 한 사람도 우리 그룹에 있었다. 자연스레 그 사람의 사연도 궁금했지만 일단은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다.
바젤과 루나가 뒤쪽에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반대편 불빛을 향해 항해하는 배의 앞부분으로 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칠흑 같이 어두운 바닷물이 뱃머리에 의해 하얀 물줄기를 내며 갈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이브라힘이 슬며시 다가왔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브라힘, 아까는 거짓말을 했어요. 나는 사실 포토저널리스트예요. 당신들의 이 여정을 기록하기 위해 따라나선 거고요. 처음부터 솔직하게 얘기하지 못해 미안해요. 왜 그랬는지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이제라도 용기 내어 말하는 거예요.”
그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역사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북한 사람을 이런 곳에서 마주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의문스러웠어요. 걱정 마세요. 당신의 비밀은 안전하니. 우리가 겪는 이 상황을 잘 담아두세요. 우리는 당신 같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우리는 해협 맞은편 차나칼레시 항구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 남쪽으로 향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도착할 터였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모두가 스마트폰 충전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버스에는 한 자리 건너 띄엄띄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가 있었고,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은 다음 충전소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에 최대한 전화기 배터리를 완충 상태로 여정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문득 전년도에 World Press Photo(세계보도사진전)에서 대상을 받은 사진이 떠올랐다. 아프리카 지부티에서 한밤중에 난민들이 전화기를 높이 쳐들고 신호를 잡기를 바라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난민들의 여정은 완전히 다른 광경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스마트폰은 편의를 위한 도구지만, 난민들에게는 그저 편의 이상의 생명선과 다름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시에 누군가에게 상황을 알리거나, 멀리서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집트에서 전년도에 만났던 림도 지중해에서 약혼자가 탄 배가 침몰할 당시, 연락이 되지 않을 때 느꼈던 극심한 스트레스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나 역시 구글맵에서 계속해서 현재 위치를 표시하며 메모를 남겼다. 레스보스 맞은편 해안가에 가까워질수록 버스가 자주 멈춰 섰다. 운전사 옆에 앉은 브로커는 무전기로 끊임없이 도로 상황을 보고받는 듯했고, 아마도 그래서 버스가 계속 진행해도 되는지 지시를 받는 듯했다. 그렇게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혹시 도착했는지 창밖을 살폈지만, 바닷가에 이르기까지는 적어도 한두 시간은 더 가야 할 듯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깜빡 잠들었는데, 브레이크 소리와 주차를 위해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떴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다섯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바젤과 루나 역시 매우 피곤해 보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버스 아래에서 짐을 꺼낼 때 뒤로 물러나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내 배낭을 꺼내고 나서 당황했다. 다른 이들처럼 검은 봉지에 넣어뒀던 내 구명조끼가 사라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표시를 해두기도 했지만, 나는 솔직히 모든 이가 구명조끼를 가져왔을 거라 생각해 굳이 그러지 않았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진짜로? 제발! 왜 여기까지 와서 양심을 팔아?” 푸념처럼 내뱉었지만, 내 조끼가 돌아올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바젤, 우리가 조난당하면 미안하지만 네게 매달릴 거야. 그러니 네 조끼는 절대 잃어버리지 마!”
어딘지도 모를 공터 같은 곳에 버스를 세워 우리를 내렸고, 지도를 보니 해변까지는 최단거리로 가도 수 킬로미터는 되어 보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이곳에서 지도상 가장 가까운 마을은 우리 위치로부터 약 20km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달빛이 유난히 환해 어떤 조명 없이도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시야는 그럭저럭 확보할 수 있었다. 아니면 불행하다고 해야 할까? 만약 터키 군경찰이 우리를 잡으려 한다면, 그들도 쉽게 우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
한참을 걷자 언덕 위에 자그마한 창고가 보였다. 우리가 탈 배에 대한 답을 얻는 시간이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난민들이 에게해 바다를 건너 그리스의 섬들에 도착하기 위해 주로 해상 구조용이나 바다낚시꾼들이 사용하는 고무보트를 이용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크기나 어떤 형태로 준비되어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매일같이 수십 척, 또는 그 이상의 배가 출발하려면 어딘가에 미리 정박시켜 놓아야 할 텐데, 모든 과정이 은밀하게 진행되어 온 것과는 맞지 않는 듯했다.
창고 앞에 멈춰 서자 총을 들은 브로커가 그룹에서 몇 명을 지정해 창고 안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창고로 들어가 관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묵직한 상자들을 꺼내왔다. 무게가 상당했는지, 창고에서 밖으로 나오는 짧은 거리에도 다들 힘겨워했다. 여전히 너무 어두워 우리가 총 몇 명인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대략 200명쯤 되는 듯했고 창고에서는 네 개의 상자가 나왔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던 운반자 중 한 명이 도저히 힘을 쓸 수 없다고 하자, 나는 바젤에게 내 배낭을 맡기고 그 사람 대신 합류했다.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고, 팀워크가 잘 맞지 않아 무게를 균등하게 나눠 운반하기보다는 울퉁불퉁한 수풀길에서 누군가 중심을 잃을 때마다 그 무게가 한쪽으로 쏠려 우리는 더디게 전진했다. 여러 차례 멈추고, 떨어뜨리고, 쉬었다가 다시 운반하기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해안가까지 약 4~5km의 거리를 어떻게든 완주했다. 해안가 바로 옆 수풀 속에 상자들을 쌓아 올리는데, 내려놓던 한 남자가 한 마디 하자 모두가 침묵을 깨고 오랜만에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했는데?”
“자신이 들어갈 관을 직접 운반하는 것 같더래.” 바젤이 알려주었다.
수풀 속에 들어가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 은신처 첫 방문객은 아니었다. 7월경부터 유럽행 배의 출발지가 터키로 이동했으니, 9월 초였던 이때까지 그 두 달이라는 기간 동안 이 침묵의 숲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희망과 두령무을 안고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해 보았다. 이미 곳곳에 수많은 난민들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특히 어린이들의 인형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서둘러 출발하는 과정에서 일일이 챙기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오전 일곱 시경, 갑작스러운 소란에 고개를 들어 보니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또 다른 그룹이 도착하고 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어리둥절하게 브로커의 지시만 기다리던 우리와는 달리, 이들의 움직임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조금은 저돌적으로 우리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우리 옆 쪽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잠시 우리 측 브로커가 그들에게 다가가 이곳은 이미 우리가 선점했으니 다른 데로 가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들은 마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라는 묵시적 인정인지, 브로커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일시적인 공간 공유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아프간 난민들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시리아 내전 훨씬 오래전부터 끝없는 고통의 나선에 갇혀 있었다. 80년대 공산주의를 확장하고자 했던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10년간의 전쟁, 미국의 무자히딘 지원과 그 결과로 등장한 탈레반의 무자비한 통치, 그리고 2001년 9/11 이후 20년간 지속된 미국의 전쟁까지. 수 십 년간 단 한 번도 평화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땅에서, 그날 우리가 마주친 이들은 생존의 기술이 몸에 각인된 사람들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20대로 보이 청년들이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그룹을 잘못 선택한 것 같은데? 우리와 함께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극동아시아인으로도 충분히 오인될 만큼 외모가 비슷했다.
“우린 하자라야.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치 않았어. 대부분 걸어서 이란과 터키를 통과해야 했는데 이란에서 터키로 넘어가는 산악 국경에서는 이란 혁명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어. 많은 이들이 그 산에 영원히 남겨졌고.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그 시신들을 지나치며 최대한 빨리 산을 넘어야 했어.”
“연을 쫓는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통해 하자라족의 아프가니스탄 내 차별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직접 만난 것은 이 터키 해안가가 처음이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감추고 싶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숱한 역경을 견뎌낸 이들답게 밝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재치 있게 농담을 던졌다.
“우리가 훨씬 ‘유능한’ 여행자들인데, 배를 갈아타고 우리랑 함께 가는 건 어때?”
“하하. 고맙지만 함께하는 일행이 있어. 그래도 나중에 진행 상황을 공유할 수 있게 연락처를 교환하자.”
그들이 도착한 것만큼이나 효율적으로, 아프간 난민들은 재빠르게 상자를 열고 세 척의 고무보트를 조립한 후 조금의 지체도 없이 우리를 뒤로하고 출발하였다. 꽤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덕분에 수풀은 다시 우리의 차지가 되었고, 우리는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 계속해서 기다렸다. 시리아인 몇몇은 불평하기 시작했다.
“아까 출발한 아프간인들은 이미 섬에 도착했을 텐데, 여기서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이유가 뭐죠?”
그 이유는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시리아 난민을 위한 브로커 시스템은 더 체계적인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고, 육지뿐 아니라 해상에서도 그리스와 터키 해안경비대의 순찰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이 신중함은 결국 옳은 판단이었음이 일주일 후 우연히 하자라족 그룹을 다시 만났을 때 확인되었다.
“너희를 뒤로하고 출발했는데, 얼마 가지 못해 터키 해안경비대에 붙잡혔어. 결국 이스탄불로 되돌려 보내졌고, 며칠 후 다시 시도해서 어제야 섬에 도착했어.”
아프간 난민들이 떠난 후, 정오쯤 되자 브로커들이 드디어 상자를 개봉하라고 지시했다. 이 위험한 여정에서 보트 조립마저 우리의 몫이었다. 설명서를 따라 머리를 맞대고 차례차례 조합을 맞춰나가는 과정에서 협동의 아름다움을 잠시 느끼다가도, 작은 실수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특히 작은 풋펌프로 천천히 공기를 주입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조여들었다. 그래도 무언가 진전되고 있다는 생각에 대부분의 난민들은 뭐라도 거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터키인 브로커는 난민들이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흥분해서 소란이 일 때마다 총을 겨누며 그곳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보트가 하나씩 완성되어 큰 나무 아래 하나씩 쌓아 올려졌다.
그리고 브로커는 사람들을 모아 통역을 통해 묻는다.
“이중에 이런 보트를 몰아본 사람이나 자원할 사람은 손을 들어.”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해안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그런 세부사항까지는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다가, 해안가에서의 대기시간이 길어지면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잠깐, 이 보트는 누가 운행하는 거지? 브로커들이 조타수로 가는 건가?’
그에 대한 대답이 방금 들려왔다.
약 200명 중에 이런 보트를 운행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밖에 없었지만, 당연히 자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뒤에 있던 빌이 브로커에게 내가 경험 있다고 알려 가슴이 철렁했다.
빌은 전날 밤 페리에서 봤던 아프리카 케냐 출신이었다. 대기하며 짧게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에게 비밀을 지켜달라는 부탁과 함께 내가 포토저널리스트라고까지는 말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에 비슷한 모터의 작은 보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불필요한 정보까지 추가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브로커의 질문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 위기를 넘겼을 뿐, 200명을 실을 4대의 고무보트에 한 명을 제외하고는 운전할 후보자가 없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보트 한 대를 물에 띄워 짧은 테스트 겸 교육을 진행했다. 결국 자원자들을 찾았고, 브로커는 그들에게 엔진 시동 방법, 속도 조절, 방향 전환 같은 기본적인 조작법만 설명했다. 파도가 옆에서 치면 전복 위험이 더 커지니 돌아가더라도 파도를 정면으로 타고 넘어가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말이 쉽지. 그것도 연습이 필요한 건데. 이러다 촬영하다 말고 내가 조타수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무전기에서 해안경비대의 접근에 관한 경고가 울려 퍼지고 우리는 서둘러 테스트하던 보트를 다시 나무 뒤로 숨기고 해안 쪽에서 보이지 않는 수풀 깊숙이 몸을 숨겼다.
이번에는 기다림이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다는 차가웠지만 바람 한 점 없는 한낮의 땡볕으로 인한 더위와 물 부족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놀랍게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엄마의 품에 안겨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거나 잠들어 있었다. 마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햇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제는 이 비좁은 수풀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빽빽이 앉아있기도 힘든 공간에서 어떻게 잠을 청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무전기에서 짧지만 단호한 몇 마디가 들렸다.
“얄라(가자)!”
대장 브로커의 그 한 마디가 오랜 시간 유지되던 정적을 순식간에 깨트렸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면서도 두려워하던 그 순간이 왔다. 쌓아둔 고무보트를 내리고 바다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에 긴장의 떨림이 묻어났다.
혼란 속에서 모두가 해안가에 몰려들어 배낭을 배 안으로 던지고 허리까지 잠긴 물을 헤치며 보트에 올라타려 했다. 한쪽에서는 어린아이들과 여성을 먼저 태우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다른 쪽에서는 자신이 먼저 타려는 이들의 고함이 뒤섞였다. 이 순간을 다들 머릿속에서 수없이 상상해 왔을 텐데도, 실제 상황에서는 모두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탕!!”
대장 브로커가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위협사격을 하고 말을 듣지 않는 한 난민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나서야 비로소 소란이 잦아들었다.
‘저 인간, 미쳤나? 저 총소리에 해안경비대가 몰려오면 어쩌려고.’
하지만 근방에 순찰선이 없음을 확인한 후의 계산된 행동이었다.
대기 중에 말을 나눴던 오마르가 자신이 올라탄 배에 합류하라고 손짓했다. 나는 바젤과 루나를 찾아 주변을 살폈다. 둘은 아직 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채 머리를 맞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둘이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듯 느꼈다. 둘은 오랜 시간 포옹을 하고 나서 바젤이 루나의 손을 잡고 그들에게서 가까운 보트로 다가갔다. 그가 내게 외쳤다.
“해리! 이리로 와. 이 배를 타고 가자.”
난 오마르에게 행운을 빌어주며 반대 편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다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 또한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그의 보트가 가장 먼저 사람들로 채워졌고, 브로커는 조타수에게 멀리 보이는 오렌지 색깔을 향해 가라고 지시했다.
길이 10m, 너비 2m가 채 안 되는 고무보트에 약 50명이 빽빽하게 탑승했다. 정원을 훨씬 초과한 이 배는 작은 파도에도 심하게 출렁거렸다. 사람들의 팔다리가 서로 얽혀 움직일 여지조차 없었고, 배가 한쪽으로 기울 때마다 눌린 쪽의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오마르가 탄 배가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먼저 출발했다. 모터가 최대 출력으로 굉음을 내지만, 무거운 하중 때문에 속도가 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첫 번째 배를 바라보며 다들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 긴박한 순간에 몰입해 깊은 사색을 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바젤이 선택한 보트로 황급히 물살을 헤치고 다가갔다. 그는 이미 루나를 보트 위로 끌어올리고 있었고, 두 명의 어린 여자아이들도 돕고 있었다. 체구가 큰 노부부가 배에 올라타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배낭을 보트에 던져 넣은 후 내 손으로 디딤대를 만들어 그들이 올라탈 수 있게 도왔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운명을 같이 할 사람들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강한 연대감을 느꼈다.
어느덧 우리 보트도 사람들로 가득 차서 나는 그제야 보트의 후미로 뛰어올랐다.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공간이 부족했다. 고민 끝에 조타수 무하메드 바로 옆, 배의 가장 뒷부분 오른편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아예 밖으로 빼낸 자세였다. 균형을 조금이라도 잃으면 바다로 떨어질 위험한 자세였지만, 그래야만 촬영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왼쪽 다리는 사람들의 몸과 무게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바깥쪽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자리를 겨우 잡자 아차 싶었다. 좀 전에 던져놓은 배낭이 이미 사람들 밑에 깔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빽빽하게 채워진 보트에서 모두가 서로 끼어 숨 쉬시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그들 누군가 밑에 깔려 있을 내 배낭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나 자신을 질책했다.
원래 계획은 보트가 출발하면 카메라를 꺼내 바다 위에서 난민들의 표정과 감정선을 담는 것이었다. 브로커가 함께 타는지 확실치 않았지만, 이제는 설사 원한다고 하더라도 장비를 꺼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 있던 모바일폰 카메라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무하메드가 “얄라!”라고 외치며 모터의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브로커의 “오렌지를 향해 가라”는 지시가 들려오는 가운데, 보트는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하루 종일 은신했던 해안가 수풀을 뒤로하고 나아갔다. 우리 모두는 바짝 긴장한 채,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파도를 가르며 미지의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