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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슬럼에서 마주친 무장강도

by 해리

2010년 1월,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리던 아이티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지진이 발생했다.

프랑스 식민지배와 미국의 간섭, 독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세계 최초의 노예 출신의 흑인들이 세운 독립국가로서 자존심을 지켜왔던 이 나라는 뒤이은 50여 차례의 여진 속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특히 인구 밀집 지역이던 수도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에서 피해가 집중되었고, 아이티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30만 명 이상이 생명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해 초, 나는 Corcoran College of Art & Design을 막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인 사진기자 캐롤 구찌(Carol Guzy)를 만난 것은 그때였다. 당시 그녀는 이미 퓰리처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사진계의 거장이었지만, 나 같은 초보 사진가에게도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그녀는 쉽지 않은 포토저널리스트로서의 삶을 택하고 막 시작하려는 나와 같은 후배들을 챙겨주려 했다. 백악관 건너편 모교 Corcoran에서 만난 우리는 커피를 들고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로 걸어갔다. 분수대의 물소리를 배경으로, 워싱턴 모뉴먼트와 국회의사당이 멀리 보이는 이 상징적인 장소에서 세계 분쟁지역을 누비며 30년 가까이 활동해 온 그녀와의 대화는 내게 무한한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그녀가 나눈 이야기는 다소 의외였다. 퓰리처상을 세 번이나 받은 스타 사진가도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에서 오랫동안 일했음에도 사진가들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낀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게 캐롤이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도 비슷하지만 사람을 만날 때 조금은 필터가 없다고 할까, 결이 비슷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서면 그저 솔직하게 앞뒤 너무 재지 않고 안에 있는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류의 인간이었다.


“해리, 넌 신문사 오지 마. 행복하지 않을 거야. 홀로 일하는 방법을 찾아봐.”

캐롤, 너무 의외인데? 퓰리처 3번이면 그냥 찍고 싶은 사진 찍으면서 살만한 여건 만들기 쉽지 않아? 퓰리처상 하나만 받고도 강의 등을 하면서 프리랜서로 잘 사는 사람들 봤는데. 그냥 프리랜서로 가도 기회가 많지 않아?”


“난 평생 사진만 찍고 살았어. 이 나이에 프리랜서로 가는 게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아. 내가 탁월한 마케팅 능력이 있거나 행정적인 일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유능한 어시스턴트가 있으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난 한편으로는 이런 조직 사회 틀 안에서만 사진 찍는데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 너나 나와 같은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면 얼마나 좋아. 우리가 무슨 큰 집이 필요하거나 그런 게 아니잖아. 그저 우리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를 위해 현장에서 계속 작업을 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기여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녀가 방문했던 수많은 국가들 중에서도 아이티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특별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이티 이야기를 할 때면 미묘하게 달라졌다. 편집장과의 갈등도 아이티 관련 프로젝트에 대한 캐롤의 지원 요구가 거절당했기 때문이었다.


“나 보고 정 아이티 가고 싶으면 내 휴가 시간에 내 돈 쓰고 가라는 거야. 내가 거길 놀러 가려는 것도 아니고 분명 들려줘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아 결국엔 신문사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을 텐데. 여하튼 해리 너도 기회 있어서 아이티를 가보면 느낄 수 있는 게 많을 거야. 아이티 사람들처럼 잡초 같은 근성을 가진 국민도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들의 생존본능 그리고 어떠한 굴곡에도 꺾이지 않는 그 강인함은 너를 절로 고개 숙이게 만들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만남 몇 개월 후, 아이티에서 지진이 발생했고 그 편집장은 캐롤을 아이티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때의 활동으로 네 번째 퓰리처상을 받게 된다.


캐롤과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그것은 마치 운명의 손짓처럼 느껴졌다. 이전에 파키스탄 지진 이후 재건 현장을 경험했던 터라, 아이티 현장도 도전해 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취재 활동 이외의 활동은 따로 직원이 있어 지원을 받는 기관 소속 저널리스트들과 달리, 프리랜서인 나는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체류 계획을 세우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파키스탄 때와 마찬가지로 지진 방생 몇 개월 후에야 아이티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 안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이 몰려왔다. 캐롤이 얘기하던 강인함은 택시 창문 너머로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마치 폭격 맞은 도시처럼 보였지만, 그 흔적들 사이를 채우고 있는 근육질 아이티 남성들의 생명력은 압도적이었다. 파키스탄 지진이 비교적 작은 도시들에 영향을 미쳤다면, 아이티는 인구 밀집 지역인 수도가 직격탄을 맞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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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전, 아이티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연락처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애리조나 출신 미국인 ‘폴’뿐이었다. 현지에 도착하면 내 성향상 금방 사람들과 친해지고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는 다소 무모한 자신감으로 비행기표를 예매했지만, 실제로 탑승할 때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폴과의 메시지 교환은 지나치게 간략했고, 그는 자신의 활동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내 메시지에 형식적으로만 답했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 직전, 그는 간략하게 그게 제공한 주소로 오면 숙소를 구해주겠다는 메시지만 남기고 다시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 느낌은 마치 전쟁터로 향하는데 단 하나의 나쁜 선택지만 가진 것 같았다. 내 운명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곳으로 스스로 데려가는 중이었고, 그 주소 하나만을 들고 폐허가 된 포르토프랭스의 시내를 관통하고 있었다.


지진 이전의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이 도시의 인프라는 지진 전에도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지진이 남긴 파괴는 충격적이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를 치우는 데만도 수년이 걸릴 듯했다. 대부분의 포장도로는 곳곳에 균열이 생겼고, 싱크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운전자들은 지그재그로 도로를 헤쳐 나가야 했다. 비포장도로에서는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나, 땀에 젖은 거리의 사람들을 회화의 한 장면처럼 희미하게 배경에 묻히게 만들었다.


폴이 살고 있던 곳은 상대적으로 손상이 적은 2층 주택이었다. 일행은 두 명의 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현지에서는 ‘빅 폴(Big Paul)’과 ‘리틀 폴(Little Paul)’로 구분되었다. 빅 폴은 190cm 이상의 육중한 체격과 수염으로 덮인 얼굴로 첫인상은 다소 위압적이었고, 리틀 폴은 탄탄한 몸매에 비교적 날씬하고 나보다 약간 작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긍정주의와 자신감이 넘치는, 약간의 과장과 이상주의가 물씬 배어 있는 전형적인 미국 중서부 출신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빅 폴에 대한 첫인상은 기우였다. 그는 단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귀찮아하는 성격이었을 뿐, 사실은 인간미 넘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외형적 첫인상과 달리 두 사람 모두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빅 폴은 지진 당시 응급구조사(EMT: Emergency Medical Technician)로 활동했고, 리틀 폴은 작은 시공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진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이티를 돕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끊었고, 출발지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팀을 이루게 되었다. 연고도 없는 재난 현장에 자원해서 달려가는 이런 행동이 다소 순진하고 무모해 보일 수 있지만, 미국에서 살면서 이런 이상주의적인 미국인들을 더러 봤기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지난 몇 개월 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 사람은 펀드레이징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효과적인 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빅 폴은 아이티의 역사와 사회적 이슈에 대해 해박했고, 리틀 폴은 단순하게 그게 누구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제공한다는 접근법을 취했다.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는 이렇게 무작정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순수한 이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 계산하지 않고, 그저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특히 일회성 아닌 지속적으로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자금을 모으는 이들을 보면서, 내 안의 염세적인 세계관이 조금씩 희석되고 다시 긍정적인 휴머니즘을 생각하게 된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포르토프랭스에서의 첫날을 시작했다. 전날 나를 숨긴 채 차창 너머로 조금은 관음적인 방식으로 거리를 관찰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카메라를 메고 직접 거리로 나섰다. 지나고 보니 그저 첫 경험이 주는 미지의 두려움이었을 뿐이다. 모든 새로운 것은 접하는 순간 미스터리가 사라지고 점차 익숙해지듯, 포르토프랭스에서 첫날 느꼈던 강렬함도 지금 다시 방문한다면 아마도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시스템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미지의 세계에 나를 던져 넣고 노출시키는 것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길거리에 나선 나는 전날보다 몇 배 강도 높은, 나를 압도하던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다. 이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의 경험보다 훨씬 강렬한 이질감이었다. 오직 나만이 유일하게 흑인이 아닌 이곳에서, 나는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시선을 끌어당겼고 나의 존재 자체가 그곳에 큰 파동을 일으키는 듯했다. 단순한 호기심의 시선도 있었지만, 내 존재 자체를 못마땅해하는 적대적인 시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태연한 척 그 적대적인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찾아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것은 내가 쉽게 눈에 띄는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방어 본능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허점을 보이면 나 같은 존재는 순식간에 집어삼켜질 것 같은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강렬함이었다.

특히 서민적인 시장을 걸을 때면 극단적인 ‘날것(Rawness)’의 감각을 느꼈다. 마치 인류의 태초 시절이 이러했을까 하는 상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상상은 이 문화권에 처음 던져진 내가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동시에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점을 몸소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이 바뀐 환경을 빠르게 내재화하고, 피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을 마치 내가 이미 오랜 기간 살아왔던 세계라고 스스로 최면하는 나 자신을 보며 놀랐다. 북적이는 시장을 지나면서 나를 따라오는 시선들에 점차 익숙해지자,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들의 크리올 언어의 리듬과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호탕하게 웃는 이들의 웃음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불과 며칠 후에는 그런 강렬함조차 일상적 되어 더 이상 내 심리를 위축시키지 못했지만, 이 또한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음을 몇 주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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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과 달리, 지진 발생 후 반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이티에는 여전히 많은 외국 NGO와 외국인들이 인도주의적 활동과 복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많은 호텔들이 무너지거나 파손되어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은 포르토프랭스 외곽 페쳔빌(Petion-Ville)이라는 비교적 부유하고 지진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지역에 숙소를 잡거나, 도시 곳곳의 온전한 주택들을 임대했다. 도심 중심부에는 운영 중인 호텔이 두 곳뿐이었고, 자연스럽게 이 호텔들이 정보 교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번에도 파키스탄에서와 비슷한 루틴으로 한 달을 보내기로 계획했다. 포르토프랭스의 여러 이웃을 돌아다니며 오전부터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고, 지치면 도심부 속 오아시스 같은 르 플라자 호텔에서 그날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같은 시기에 아이티에 온 방문자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다음 날 계획을 세우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3주 동안 이 쳇바퀴 같은 일상이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참선하듯 평온함을 주었다. 도착 후 첫 며칠간 느꼈던 긴장감은 완전히 사라져, 이제는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경계하는 이들에게조차도 미소와 정중함으로 다가갔다. 수도인만큼 교육받은 이들도 더 많고, 크리올 언어가 불어에서 파생된 영향으로 불어를 구사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그중에는 영어도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지진의 영향이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건축물 자체가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가난하거나 갱단 문제가 심각한 지역에서는 소통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아이티인들이 자청해서 가이드 역할을 자처할 때도 있어 나름대로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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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는 곳들은 자연재해든 전쟁이든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함이었다. 그런 장소에 모여드는 다양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관찰하고 파악하게 된다. 빅 폴과 리틀 폴처럼 따뜻한 마음 하나로 무작정 달려와 도움을 주려는 이들을 보며 겸손해지기도 하고, 재난 상황에서 모금된 자금을 노리고 모여드는 사업가들을 보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르 플라자 호텔 내 공유 오피스처럼 쓰이던 레스토랑에서 사진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한 캐나다인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친근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그의 접근 목적이 드러났다. 그는 태양광 발전으로 작동하는 돔 형태의 소형 임시 주택을 판매하는 회사 대표로, 내게 영업을 시도했다. 웃으며 답해줬다.


“D, 나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난 그저 프리랜서 자격으로 이곳에 와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라 내게는 당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곳 네트워크나 자금도 없고. 한데 궁금하기는 하네. 그 돔 하나 만드는데 비용이 얼마야?”


“아, 그래? 슬쩍 봤을 때 어느 NGO의 빅타임 스태프처럼 보였어서 말해본 거야. 한데 모를 일이야. 네가 여기서 지내면서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될지. 그럴 때는 이 제품을 설명해 줘. 아이티인들에게 꽤 좋은 옵션이 될 수 있다고. 유닛 가격은 $7,500인데 물론 여러 개 구매하면 할인이 들어가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4~6인 가족이 겨우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 지속가능성을 주장하더라도 결국 임시 거처에 불과해 보이는 구조물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책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부 기금으로 활동하는 수많은 단체들, 특히 큰 액수의 긴급자금이 투여될 수 있는 UN 산하 기관들이 기부자들에게 성과를 보고해야 입장에서는 이런 ‘그럴듯한’ 디자인의 주택 공급이 보고서 구색 갖추기에는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행운을 빌어.”

처음 만난이에게 너무 솔직하게 무례를 표하기보다는,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가능성이 높아 형식적인 인사로 마무리했다.


며칠 후, 같은 공간에서 앞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보던 남미계로 보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헤이 아미고, 혹시 일본에서 왔어?”

늘 내 국적을 지레짐작하며 시작하는 대화였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아니. 한국인이야. 사는 건 미국이지만.”


“아, 미안. 보통은 그런 실수 안 하는데 사실 오늘 여기서 일본인 파트너를 만나기로 했거든. 둘러봐도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네가 유일해서 혹시나 했지.”


“불행하게도 나는 아냐. 무슨 일로 아이티에 왔어?”


“아, 반가워. 내 이름은 산초야. 칠레에서 온 테초(TECHO)라는 헤비타트 관련 NGO의 현장 자원봉사자 리더이고. 만나려던 일본인 파트너도 곧 우리 프로젝트에 동참하려는 일본인 자원봉사자들 이끌고 올 거라 사전 미팅하기로 한 거였고.”


한동안 산초와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현장 방문 초대를 받았다. 라틴계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유머 감각을 지닌 산초는 봉사자들을 잘 이끌 타입처럼 보였다. 숙소로 돌아와 폴에게 테초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는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응, 이곳에서 몇 안 되는 효과적인 팀이지. 와서 뭘 얻어가려고 하는 단체가 아니라 실제로 휴머니티를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고 봉사자들도 꽤 많이 모이는. 내일 그들 현장 근처로 갈 일 있는데 데려다줄게.”


다음 날, 폴의 픽업트럭을 타고 아이티에 온 이후 처음으로 번잡하고 먼지 나는 도심을 벗어나 외곽지역으로 향했다. 대로의 바닷가 쪽으로 있는 이웃은 지금까지 봤던 어떤 곳보다도 열악해 보이는 슬럼가였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시테 솔레이(Cite Soleil: 태양 도시)”라는 이름의 지역이었다.

먼지가 잦아지고 트럭 짐칸에 서서 풍경을 둘러보며 맞는 바람이 상쾌했다. 약 한 시간을 달려 넓은 들판과 언덕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테초의 집짓기 프로젝트로 보이는 현장에서 약 50여 명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트럭에서 내려 폴을 보낸 후 테초의 현장 지휘소처럼 보이는 큰 천막으로 걸어가자 산초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해리, 환영해. 초대는 해놓고 교통편 마련해주지 못해서 좀 마음에 걸렸는데 역시 수완이 좋구나. 우리 핵심 멤버들 소개해줄게.”


해비타트 프로젝트는 실제로 처음 목격한 것이라 자연스레 질문이 많아졌다.


“보통 이런 프로젝트에는 한 기간에 40~50명씩 로테이션으로 참여해 와. 주로 칠레를 비롯한 남미 봉사자들이 많지만, 어제 얘기했듯 세계 곳곳에서 우리 활동을 어떻게 알고 참여하려는 단체들도 많아.” 오랜 기간 땡볕 아래 일을 한 흔적의 그을린 피부와 더러워진 하얀 티셔츠가 유난히 잘 어울리던 좋은 미소를 지녔던 산초였다. “나는 현장에 나오면 최소한 6개월, 보통은 1년 정도 머물면서 드나드는 봉사자들을 관리해. 보통은 다들 좋은 마음으로 오니 그리 어렵지는 않아. 겉으로 보기엔 기본적인 구조물이지만, 적어도 이들이 도시의 잔해를 치우고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고. 유닛당 대략 $200 정도의 재료비, 노동은 봉사자들이 제공하니 효율적이지. 대부분의 펀딩은 칠레 정부와 UN 해비타트에서 공동 부담하지만, 개인 기부자들도 의외로 꽤 있어”


“하! 너 만나기 전에 바로 이 호텔에서 만난, 기본적으로 똑같은 역할의 임시 주택을 지어주는 사업가가 유닛당 요구하는 가격을 넌 알고 싶지 않을 거야.”


“하하. 상관없어.” 산초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 쿨한 미소를 보였다. “남들의 불행을 기회로 삼아 몰려드는 독수리 떼에 마음 쓰다간 비관적으로만 세상을 보게 될 거야.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건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우리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그것이 이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거라 믿는 것뿐이야. 해리, 네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야. 이들의 이야기를 밖으로 알리는 거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만 이런 봉사자들이 모이게 되는 거라고.”


그렇게 난 또 한 명의 올바른 사고를 가진 이로부터 가슴이 촉촉해지는 경험을 한다. 맞다.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것. 그것의 경중을 따질 필요는 없을 테다. 나는 일상을 잃어버린 이들의 모습을 최대한 잘 담아내어, 다른 곳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속 잔잔한 파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산초, 여기 오는 길에 해안가 쪽에 있는 시테 솔레이(Cite Soleil)라는 동네가를 지났는데, 좀 살벌해 보이긴 하던데 어떤 곳인지 알아?”


“하하.” 산초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번 찾아봐. 나도 눈에 띄어서 찾아봤는데. 위키피디아에 나오는 첫 문장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네’이더라. 테초가 집을 지을 부지를 물색할 때, 이왕이면 아이티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치안 문제로 외부 지원이 들어가지 못하는 그곳에서, 누구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민들을 위해 그쪽으로 하자고 제안했다가 바로 야단맞고 퇴짜 당했어. ‘좋은 일하러 가는데 뭐가 문제냐’고 반문했더니, 순진한 생각 말라며 그 안의 갱단 문제는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라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답변뿐이었어. 혹시 가게 되면 나중에 알려줘. 정말 얼마나 나쁜지 궁금하니.”


빅 폴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의 차로 이동하며 근처를 지날 때 내려달라고 부탁하자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돼. 여기는 너무 위험해. 어차피 지진 전에도 치안이 최악인 동네였어. 대부분 판자촌이라 지진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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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마음을 접고 다른 지역에서 계속 작업했다. 하지만 몇 주간 포르토프랭스의 다양한 피해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다시 시테 솔레이가 떠올랐다. 그간 찾아본 바로는 40만 명 가까운 인구가 밀집한 세게 최대 규모의 슬럼이자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고 했다. 또한 아이티에서 활동한 내가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작품들 중 일부가 그곳에서 촬영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즈음, 어떤 두려움이나 이성적 판단보다 내 안의 호기심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역사적으로 아이티는 서구 세계에서 첫 흑인 공화국으로, 1804년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서 성공적인 노예 봉기를 일으켜 독립했다. 그러나 그 독립의 대가는 컸다.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고, 이 ‘독립세’는 아이티 경제를 세대에 걸쳐 억눌렀다. 20세기 초, 미국의 여러 차례 점령과 뒤이은 뒤발리에 가문의 잔혹한 독재(1957-1986)를 거치며, 아이티는 끊임없는 정치적 불안과 빈곤에 시달렸다. 2010년 대지진은 이미 취약했던 국가에 치명타를 입혔고, 시테 솔리에 같은 지역은 그 취약성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다음 날, 숙소를 나와 미리 알아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위 짐칸에 앉아 있던 몇 사람 옆에 자리를 잡았다. 파키스탄에 있을 때도 종종 그렇게 버스 지붕 위에 타곤 했었는데, 특히 짐 위에 앉으면 생각보다 안정적이고 360도 전경을 볼 수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다가오는 시테 솔레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기도 했다(당시는 휴대용 촬영 드론이 보급되기 전이었다).


버스에 내려 슬럼가 주변으로 접근했다. 딱히 중심도로 같은 것은 없었고, 시작부터 공간만 있으면 어떻게든 양철판과 나무조각들을 이어 붙인 구조물이 즐비했다. 지붕은 대부분 양철판이나 플라스틱 패널로, 그저 누울 공간과 비를 피할 지붕만 간신히 얹혀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웃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몇 주간 잊고 있던 아이티 도착 후 첫 며칠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대부분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고 경계심이 가득했다. 잠시 ‘이번에는 좀 너무 무모했나?’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왕 들어온 김에 조금만 더 돌아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나가 자고 마음먹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봤다. 아마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기에 가능했던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그 안의 삶을 목격하면서, 이곳에 오기로 한 결정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가진 건 없지만 건강해 보이던 사람들, 그리고 내 존재에 익숙해지자 각자의 일상을 이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나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물론 이는 나의 착각이었다. 당연히 나를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주민들이 나를 무시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슬럼가 안에서의 일상을 관찰하며 때로는 카메라를 들고, 때로는 그저 내 머릿속 기억의 저장소에 이미지를 담아두었다.


동네 전체가 미로처럼 이어져 방향 잡기가 쉽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일부 구역은 주민들에게도 접근 금지인 듯했다. 무심코 그쪽으로 가려하면, 정체불명의 ‘가디언’이 나타나 카메라를 내던지고 목을 긋는 시늉으로 위험함을 경고하곤 했다.

열심히 아들의 머리를 면도하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고, 부끄러워하며 웃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몇 장 찍자, 옆에 앉아 있던 딸로 보이던 소녀가 내게 다가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시키는 대로 하자, 그녀는 내 뒤에 자리하고는 내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그들의 제스처에서 ‘무슨 남자가 이렇게 머리가 길어? 우리 방식으로 머리를 땋아줄게’라는 의미가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에 모인 이웃들과 머리를 자르던 아버지와 아들 모두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슬럼가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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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되었다는 표현조차 부족한 정체된 물에서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들. 바닷가로 가까워질수록 동네의 하천이 모이는 물로 땅이 질척해졌다. 배설물과 쓰레기, 온갖 오염물질이 가득한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누군가가 나타나 내 발이 그런 오염물에 빠지지 않도록 판자나 작은 돌을 가져와 내 앞에 놓아주며(자신들은 맨발로 거기에 잠기든 말든 상관도 않은 채) 길을 만들어주려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자신들은 이런 환경에 익숙해 아무렇지 않지만, 모처럼 방문한 외지인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씀씀이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금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슬럼가’라는 표현은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바닷가에 이르자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잃었다. 도심 하천에서 흘러온 쓰레기와 바닷가에서 밀려온 잔해들이 해변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그런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쓰레기 더미 위로 파도가 잔잔히 밀려왔고, 물이 쓰레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5~6살 보이는 남매가 손을 잡고 바다 위로 천천히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거대한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손을 꽉 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 어린아이들의 모습만으로도, 이곳에 온 내 결정을 정당화하고 심지어 낭만화하기까지 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마도 그들이 손을 맞잡고 바라본 시간이 10여 분쯤 되었을 터인데, 마치 한 편의 단편영화를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듯했다. 나만 간직할 그런 소중한 순간을. 마침내 다가오는 나를 알아챈 남매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깔깔거리며 도망쳤다. 온갖 플라스틱과 오물이 가득한 해변을 맨발로 뛰어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는, 뒤돌아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 다시 낄낄거렸다. 피부색과 대조되는 새하얀 이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다시 조금씩 다가왔다. 하이파이브를 청하자, 둘이 번갈아 나의 손을 마주치고 온몸을 흔들며 웃어댔다. 내가 가야 할 알리자 묻지도 않고 둘 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고, 여동생은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파키스탄에서 우울증을 앓던 비슷한 또래의 ‘스미나’가 캠프에서 따라다니며 손을 잡곤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해안가로 계속 걸어가자 십 대로 보이는 한 소년이 두 손을 허공에 들고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낚싯줄만으로 두 손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좀 전의 해변보다는 수질이 조금 나아 보였지만, 여전한 악취가 나고 피부를 노출하긴 해로워 보이는 물에 맨발로 들어가 허벅지 높이의 수면에서 최대한 집중하느라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떨어져서 그가 물을 주시하는 것처럼 그를 지켜보았다. 그런 오염된 물에서 어떤 물고기를 잡는지도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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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했던 햇살이 오후 중반이 되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미로 같은 곳에서 너무 늦기 전에 길을 잃을까 봐 나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들어올 때처럼 이번에도 주민 몇이 어느 방향으로 가면 갱과 마주칠 테니 자기들을 따라오라며 가이드를 해주었다. 나는 무사히, 오히려 가슴이 꽉 찬 느낌을 간직한 채 슬럼가를 빠져나왔다.


구글맵이 그다지 통하지 않는 도시, 게다가 지진으로 대중교통마저 불확실한 상황에서 나는 그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가득 실은 밴, 트럭, 버스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어 세우고, 일단 탄 후에 미리 다운로드해 둔 지도로 내 위치를 확인하며 이동했다.

시테 솔레이에서 나와 트럭 뒤편에 매달려 도심부로 돌아오는 길, 느껴지는 바람과 바다 위로 기울어가는 태양의 부드러운 빛 속에서 그날의 경험을 되뇌며 기분이 좋았다.


비센테나이르(Bicentennaire) 구역에서 숙소 방향 버스 갈아타려고 내리면서 멀리 바다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는데, 그날 만난 사람들과 그 좋은 느낌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세 시간 후면 해가 완전히 질 테지만, 산책 삼아 약 2km 떨어진 해안가까지 하천길을 따라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배낭 안에는 그날 찍은 십여 통의 필름(대부분의 포토저널리스트들은 이미 디지털로 전환했지만, 나는 여전히 흑백필름과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여분의 렌즈, 그리고 여권 등이 들어 있었다. 해안가에 도착해 멀리 공장 지대 쪽으로 서서히 지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두 젊은이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 보였다. 살짝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척 지나가려 하자, 그중 하나가 소리쳤다.

뒤돌아보니 권총으로 나를 겨누고 있다. 다른 한 명이 다가와 배낭을 빼앗으려 했다.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들에게 “너희에겐 필요 없는 필름만 빼고 나머지는 가져가도 된다”라고 소리 지르고 몸짓으로 표현하려 하지만 소통이 원활할리 없었다. 하지만 명백히 나보다 더 긴장한 듯한 그들의 눈빛을 보며, 이들이 프로가 아니며 오히려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로라도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이 크게 느껴졌다. 간청하고 저항하고 밀고 당기는 와중에, 나는 어떻게든 디지털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총을 겨누던 이가 내 눈앞에서 리볼버를 열어젖히고 총알을 장전한 후, 하늘을 향해 “탕!!” 발사하고는 내게 다가와 얼굴에 총구를 들이대고 소리쳤다.


총성이 울린 순간부터 내가 포기하고 배낭을 넘겨주기까지의 몇 초가, 마치 영화의 슬로모션 장면처럼 한없이 늘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죽으면 내 시신을 찾거나 신원을 확인하는 데도 한참 걸릴 텐데.’

‘멍청하기는… 멈출 때를 알았어야지. 그 위험하다는 시테 솔레이에서 무사히 나왔다고 기고만장해서 계속 운을 시험해야만 했니?’


다행히 그것으로 끝이었다. 강도들은 내 카메라와 배낭을 가지고 또 다른 미로 같은 골목길로 사라졌다. 아이폰은 가져갔지만 주머니 속 현지 통화용 휴대폰은 남겨두어 폴에게 전화힐 수 있었다.


“폴, 방금 강도 만나서 털렸어.”

“이런, 괜찮아?”

“응, 난 괜찮아. 다행히 물건만 챙겨서 사라졌어. 데리러 와줄 수 있어?”

“어디야? 너 설마 Cite Soleil에서 당한 건 아니지?”

“아냐. 만나서 얘기해 줄게.”


무척 허탈했다. 예정된 출국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카메라 없이 그곳에 머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당장이라도 떠날까 생각했지만 여권마저 없었다.


다음 날, 임시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미국 대사관에 향하는 여정이 시작됐다. 공항 근처에 있던 대사관이 지진 이후 도시 외곽으로 이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도상으로는 주변에 별다른 시설이 없어 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더더구나 스마트폰의 지도도 없이 그리고 도시 중심부만 표시된 종이지도를 가지고 말이다.


“내일이면 데려다줄 수 있는데, 오늘은 우리도 일정이 꽉 차서.”

“괜찮아. 바로 해결될지도 확실치 않으니, 내가 혼자 가볼게. 늘 다니던 방식으로 몇 번 갈아타면 도착하겠지.”

종이 지도에 대사관 위치를 표시하려 했으나, 지도가 보여주는 영역 밖에 있어서 표시된 마지막 도로까지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자가용이었다면 한 시간이면 도착했을 거리를, 동서남북만 파악한 채 버스가 다른 방향으로 가면 내려 다시 타는 방식으로 네 번 갈아타고 두 시간 넘게 걸려 겨우 도착했다. 하지만 엄중한 경비 속에서 정문 군인이 여권과 비자 업무는 오전에만 하므로 이미 창구가 닫혔다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이렇게 어렵게 왔는데, 들어가서 문의라도 할게요.”


나를 맞아준 아이티계 미국 영사는 다가오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그간의 일과 어떻게 그날 대사관까지 왔는지를 설명하자, 오히려 그녀가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며 세부사항까지 물어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하지는 말고. 다행히 당신이 살아남았기에, 지금 제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아이티에서 사망한 미국인’이 아니라 오히려 단조로운 내 일상에 재미있는 일화를 가져다준 케이스라 고마워요. 걱정 말아요. 임시여권은 원래 다음 날 나오는데, 이 대사관을 또 한 번 알지도 못하는 버스 타고 오지 않아도 되게, 오늘 당신이 여권 들고 걸어 나갈 수 있도록 제가 특별 조치해 둘게요.”


두 시간을 기다린 후, 그녀 말대로 나는 임시여권을 발급받아 대사관 문을 나섰다. 그대로 플라자 호텔로 향했다. 카메라가 사라졌으니 출국일까지 그간 찍은 사진들이나 정리할 생각이었다. 내가 몰랐던 건, 하룻밤 사이에 포르토프랭스의 그 작은 외국인 커뮤니티에 내 소문이 이미 퍼져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식으로 유명인사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 호텔 카페에서 랩탑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그저 안면식만 있던 이들이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그중에는 내가 굳이 어울리고 싶지 않아 했던 캐나다인 사업가 D도 있었다.


“해리, 무슨 일 있었는지 들었어. 그 정글에서 살아남았으니 그래도 다행이야. 제안 하나 해도 될까? 여기서 사업하면서 알게 된 친구가 있어. 아이티계 미국인 마크라고 불리는 친구인데, 경호 전문 사설업체를 운영하고 있어. 해리, 네가 원한다면 그에게 연락해 볼게. 네가 강도당한 곳으로 함께 가서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친구는 클린턴 부부가 아이티 방문했을 때도 경호를 담당할 정도로 검증된 사람이야.”


아이러니했다. 내심 거리를 두고 싶었던 인물이 갑자기 선의의 손길을 내밀었다. 내가 그를 너무 가혹하게 판단한 걸까? 그가 개발한 아이템에 높은 가격을 매긴 건 그의 자유고, 특히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모인 기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는 NGO들을 상대로 사업을 한 것뿐인데, 내가 지나치게 비판적이었던 건 아닐까? 어차피 일주일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오전, 플라자 호텔로 돌아갔을 때 나는 경악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D가 나를 건장한 체격의 마크에게 소개해주었는데, 그의 뒤로는 방탄조끼를 완전히 갖춰 입고 소총으로 무장한 20여 명의 장정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나는 단순히 마크가 혼자 와서 나와 함께 현장을 조사하고, 혹시 그가 아는 암시장이 있는지 정도 물어볼 수 있을 거라 상상했는데, 그는 완전한 군사 부대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이거 D가 내 경제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또 일을 벌인 건가? 나중에 엄청난 청구서 날아오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마크에게 물었다. “마크, 초면에 그리고 여기까지 이렇게 많은 직원들 데리고 온건 고마운데 혹시 조사 비용이 발생한다면 미리 알려줘. 나 정말 완전히 털린 상태라서.”


“걱정 마. 오늘은 돈 벌려고 온 게 아니야. 클린턴 같은 고위 인사들이 올 때는 당연히 비싼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네 이야기 들어보니 좋은 의도로 아이티에 왔더군. 난 그저 나 같은 친구들이 아이티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고 떠나는 걸 보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저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트럭 두 대에 나눠 타고 비센테네르 지역을 향해 출발했다.

하천을 따라 트럭으로 한참을 달리다가 길이 좁아져 더 이상 차량으로는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우리는 모두 걸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는 동안 나를 따라온 경호원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강도들을 만났던 지점에 도달해 마크에게 알려주자,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해리, 믿을 수가 없군. 여기는 나조차도 정말 꼭 필요한 이유가 없으면 발걸음을 삼가는 지역이야. 무장한 내가 봐도 그렇다고. 여기 오기 전에 시테 솔레이도 다녀왔다고?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 동네도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야.”

“내 말 잘 들어. 이번 일을 겪고도 아이티에 다시 오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행여라도 돌아온다면 꼭 나에게 알려줘. 최소한 무장 경호원 한 명이라도 붙여 줄 테니. 하지만 지금으로선… 할렐루야! 넌 지독하게 운이 좋은 녀석이야. 이 거리에서 무장 강도를 만나고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


그는 직원들을 골목길 안쪽으로 보내 뭐라도 단서를 찾으려 했지만, 예상대로 성과는 없었다. 그 대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그가 생각하는 조국 아이티의 문제점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1804년 독립 이후 서구 열강의 봉쇄와 착취, 독재자의 통치로 인한 수십 년간의 정치적 불안과 자연재해까지, 그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인들의 끈기와 탄력성에 대해 밤늦게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미국에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캐롤과 다시 커피를 마셨다.

“어땠어?”

“정말 와일드했어. 한데 앞으로는 내 운을 너무 무모하게 시험하지는 않으려고 ”

“하하, 그래. 너랑 얘기하다 보니 내가 아이티에 갔을 때가 생각나더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아이티를 혼자 다녀왔다면, 이제 너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나도 마침내 아이티에 다녀온 후에 새로운 에너지를 얻은 느낌이야.”


아쉽게도 마크를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가장 험난했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티에서의 경험은, 캐롤의 말대로 사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리던 그 섬나라에서 여전히 생존을 위해 그 강렬한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는 아이티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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