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등진 불가피한 선택: 바다를 건넌 난민들 (5)
가파른 해안을 등반하자 언덕 위 등대가 서있었다. 버려진 구명조끼들 사이로 사람들은 흠뻑 젖은 옷을 짜내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언덕에서 바라본 바다 너머로 터키 해안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늘 밤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저 해안에서 숨어 기다리며 불확실한 여정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기도를 하겠지…’라는 생각에 이 끝없는 여정의 종착점은 어디인지 의문이 들었다.
석양이 내리는 해협 위로 고급 요트가 유유히 지나갔다. 요트 위 사람들에게 바다는 모험과 스릴의 장소겠지만, 내 주변의 난민들에게 바다는 원치 않는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상징했다.
멀리서 고무보트 몇 척이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배낭 속 카메라 장비가 걱정되어 확인해 보니 다행히 방수 파우치가 제 역할을 했다. 바젤에게 마을에서 나중에 만나자고 말하고, 도착하는 난민들을 촬영하기 위해 언덕을 다시 내려갔다.
한적해진 해안가를 둘어보니, 파도에 떠밀리는 구명조끼들과 혼란 속에 버려진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보트가 접근하는 것을 지키보며 코끝이 찡해졌다. 한 시간 전 나와 나의 일행이 느꼈던 감정을 그들도 곧 경험하리라는 생각에, 그들이 무사히 도착해 같은 안도감과 환희를 느끼기를 바랐다.
도착 당시에는 나 역시 조금은 흥분해서 촬영을 차분히 못했던 점을 떠올리며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도착하는 이들의 모습과 표정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우리가 그랬듯 감격에 겨워 울거나 서로를 부둥켜안는 가운데, 한 여성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방금 건너온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은 모습을 잠시 보인 후, 파도가 치는 바위 위에 갓난아기를 올려놓고 기저귀를 갈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마치 운명이 어떤 시련을 주더라도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듯, 가장 비일상적인 순간에 가장 일상적인 행위를 하고 있었다.
수 킬로미터 떨어진 클리오(Klio)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꽤 어두워진 이후였다. 평소라면 적막했을 이 작은 마을에 수백 명의 난민들이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내 친구들을 찾을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이 드는 순간, 다행히 조타수 무하메드가 나를 발견하고 마을 꼭대기의 밝게 등불이 빛나던 식당 앞 공터로 안내했다.
“어서 와, 형제여. 우리가 해냈어! 유럽에 도착했다고! 무척 피곤하지만 오늘 밤은 우리에게 축제야. 그러니 어서 즐기자고.” 바젤은 평소의 차분함을 잃고 기쁨에 들떠 있었다.
공터와 식당의 주인은 30년 전 레바논 내전을 피해 그리스로 이주한 난민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며 이곳을 난민들에게 개방했다. 공터는 바젤 말대로 축제처럼 활기찼고, 모든 이의 얼굴에는 피로와 미소가 공존했다. 우리 배의 최연장자였던 70대 이라크인 노부부가 환한 미소로 내게 차를 권했다. 모두가 내일의 불확실함을 잠시 잊은 채 현재의 안도감을 만끽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작은 마을에 수백 명의 난민을 수용할 숙소가 당연히 없었고, 추운 밤바람 속에서 모두가 노숙을 해야 했다. 사람들은 분주해졌다. 곳곳에서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고, 옷을 조금 말린 후 사람들은 맨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루나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생애 처음 노숙을 해야 하는 현실에 혼란스러워하던 그녀였다. 바젤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종이상자를 펼쳐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깔아주었지만, 루나는 밤새 추위에 떨며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캠핑 경험이 풍부했던 나조차도 젖은 옷을 입은 채 바닷바람을 맞으며 딱딱한 바닥에서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며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던 첫날밤이었다.
새벽이 오기 전에 많은 이들이 일어나 짐을 꾸렸다. 모두가 바다를 건너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그 이후의 여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아는 것은 그리스 본토로 가는 배를 타려면 섬의 가장 큰 도시인 미틸리니로 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배에 탔던 15명 정도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새벽 6시 전에 길을 나섰지만, 우리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다른 난민들도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섬 전역에서 난민들이 미틸리니로 향하는 도로에 모여 대규모 행렬을 이루었다.
우리 그룹에는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딸과 함께 온 아버지도 있었다. 루나가 말했다.
“그의 아내는 시리아에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위해 남았대. 딸들이 조금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내 곁에서는 편안해하는 것 같아서 우리와 함께 가도 되냐고 물어봤어.”
한편으로는 그 아버지의 선택이 이해됐다. 두 딸을 책임져야 하는 그로서는 우리 그룹의 건장한 청년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우리의 눈치를 꽤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행여라도 뒤처지지 않으려 계속해서 딸들을 독려하는 그의 모습에서 애틋한 부성애가 느껴져 마음이 짠해졌다.
며칠간의 여정으로 우리 모두 외양이 누추해졌다. 밤새 이동하고, 무더운 해안가에서 종일 있다가, 바닷물에 젖은 후 찬 바람 속에서 밤을 지새운 우리의 모습은 분명 볼품없었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는 순간부터 그곳에서의 나의 역할이 조금 모호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다큐 사진가로서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그들의 여정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지만, 이미 감정적으로 그들과 하나가 되어 때로는 내가 이 그룹에서 유일한 비아랍계라는 사실도 잊곤 했다.
이른 아침부터 몇 시간을 걸은 우리는 강렬한 햇살에 쉽게 지쳤다. 갈증을 느껴 오래간만에 나타난 구멍가게에 들렀을 때, 상점 주인의 미묘하지만 명확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그는 난민들을 잠재적 도둑으로 간주하는 듯했다. 난민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겪게 될 서러움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바젤은 이를 의식한 듯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게 돈을 지불하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똑같이 돈 내고 사는데 마치 뭐라도 훔칠 것처럼 취급하네. 기분이 좀 안 좋은데?”
“한편으로는 이해돼. 지금 우리 모습을 봐. 바닷물에 젖고 지친 모습으로 한꺼번에 가게에 들어오면 내가 상점 주인이라도 경계할 것 같아. 거기다 우리는 ‘무슬림 테러리스트’잖아.”
바젤은 윙크하며 농담을 던졌지만 나는 상점 주인의 태도에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바젤은 부당한 대우에도 몇 수 접고 들어가는 데 익숙해진 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가 겪었을 서러움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몇 시간을 걸어 도착한 마을에서 200여 명의 난민들이 버스 정거장에 앉아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버스 시간을 확인하려 근처 가게 종업원에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기다려도 소용없어요. 당신들은 버스를 탈 수 없어요.”
“왜요?”
“지방 정부가 난민들에게 차량을 제공하면 브로커로 간주해 벌금을 부과한다고 했어요.”
“그럼 이 모든 이들이 미틸리니까지 걷게 하는 것은 괜찮고요? 아직도 40~50km는 족히 남은 거 알고 있죠?”
난민들이 해안가에서 미틸리니까지 걸어야 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런 비인간적인 정책에 분노하고, 애꿎은 종업원에게 따지고 있었다. 하지만 힘없는 난민의 항의는 허공에 맴돌 뿐이었다. 화가 난 나는 렌트카를 구해 최소한 몇 명이라도 미틸리니까지 데려다주겠다고 결심하고 인터넷이 되는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카페에 홀로 앉아있던 주인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눈을 부릅뜨고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저돌적으로 다가오며 소리 질렀다.
“당장 내 카페에서 나가!”
당황한 나는 물었다. “문제가 뭐죠?”
그는 내 억양이 아랍인들과 다른 것을 알아채고 잠시 망설이다가도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저들과 함께인가?”
이 대화가 어디로 가는지 조금은 분명해졌지만 나는 난민들과 함께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냐며, 똑같이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으려는데 차별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난민들이 가져오는 비즈니스는 필요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는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며 내게 소리 높여 울부짖었다.
최대한 진정한 후 그에게 말했다.
“이봐요. 나도 유럽에 살고 있어요. 저들이 목숨 걸고 바다에서 공포에 떨다 겨우 도착해 한숨 돌리고 있는 와중에 유럽의 첫 관문에서 이런 대우를 받으면 당신 같으면 서럽지 않겠어요? 조금 더 인간적으로 대해줄 순 없을까요?”
그는 하소연하듯 답했다.
“이 섬은 항상 난민들이 오는 곳이지만, 올여름부터 갑자기 숫자가 폭증했어요. 나도 처음엔 그들의 처지가 안타깝기도 해서 이불도 빌려주고 물도 건네줬지만, 이제는 하루에 수백 명씩 지나가고 관광객도 많이 줄었어요. 난민들끼리 아랍어로 소리 높여 논쟁하 도대체 여기가 중동인지 유럽인지 헷갈릴 정도예요.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알지만, 일부는 마을을 무슨 공공화장실인양 아무 데서나 일을 보고, 그들이 지나가며 남긴 쓰레기는 왜 우리가 다 치워야 하나요? 주민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어요.”
그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내가 포토저널리스트라고, 전날 난민들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고 설명을 하자 그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조금은 누그러진 태도로 하지만 다시 한번 자신의 관점을 방어하려 했다. 내게는 인터넷을 사용하도록 허락했지만, 난민들은 여전히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카페를 나와 바젤에게 다가가자, 그는 이미 안에서의 대화를 들었는지 걱정하지 말라며 버스 정거장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렌트카들은 미틸리니 시내에서만 픽업이 가능하였다. 조금 실망한 채 밖으로 나오니, 대부분의 일행은 이미 떠나고 바젤과 루나, 그리고 동명이인의 무스타파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정거장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던 남은 이들에게 버스가 와도 태워주지 않을 거라 알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레스보스 북부의 산악 지형과 늦여름의 강한 햇살은 우리를 금방 지치게 했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힘겹게 걷고 있던 백발의 노인들과 도로 한 복판에 주저앉아 울며 부모에게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건강한 나도 이렇게 힘든데, 선택의 여지없이 걸어야 하는 그들의 고통은 얼마나 클까.
몇 시간을 침묵 속에 걸었을 때, 어디선가 빨간 소형차가 다가와 멈춰 섰다. 젊은 남성과 중년 여성이 50유로를 받고 미틸리니까지 태워주겠다고 제안했다. 조금 비싸게 느껴졌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그들에게 감사하며 작은 차에 몸을 구겨 넣었다. 하지만 차는 10km도 채 가지 않아 멈췄다.
“미안하지만 앞에 경찰 단속이 있을지 몰라서 여기서 내려 걸어가야 해요. 캠프까지는 1km 정도만 더 가면 돼요.”
지도를 봤을 때는 여전히 미틸리니까지가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캠프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차에서 내리면서 중년 여성에게 거듭해서 감사함을 표했다.
“당신은 천사 같은 존재예요. 당신 덕분에 유럽에 대한 첫인상이 좋아졌어요.
캠프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지만 이상하게 조용했다. 도착한 다음 마을에서 한 남성에게 물어봤다.
“난민들이 가는 캠프를 가려하는데 여기 근처에 있다고 들었어요.”
“미틸리니로 가야 해요. 20km는 더 가야 할 거예요.”
그제야 우리는 그 여성이 속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젤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덕분에 몇 km 덜 걸었으니, 그냥 비싼 택시 탔다고 치자.”
정오쯤 자갈 해변 옆 소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젖은 물건들을 말리고 있을 때, 뒤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현지인들이 탄 차에서 그들이 손을 흔들며 컵케이크가 가득 담긴 상자를 건네주었다. 난민임을 알아보고 나눠 먹으라며 건넨, 작지만 무척 따뜻한 친절이었다. 이전 마을에서 겪은 서러움을 씻어주는 듯한 제스처였다.
우리는 그 긍정적인 기운을 뒤따라올 난민들도 느끼길 바라며, 남은 컵케이크와 메모를 벤치에 남기고 왔다. “조금 전 이곳에서 현지인이 우리에게 친절함을 베풀었어요. 그 친절을 다른 이와도 나누고자 해요. 잘 먹고 힘내서 나은 여정도 무사히 마치기를 바랍니다.”
몇 시간을 더 걸어 오후 다섯 시경, 우리는 마침내 미틸리니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