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등진 불가피한 선택: 바다를 건넌 난민들 (6)
미틸리니에서 첫날밤
미틸리니에 가까워질수록 난민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 외곽의 한 언덕에 빼곡히 들어선 천막들이 난민촌임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예상외로 캠프는 한산했다. 유럽 출발 전, 소개받은 레스보스 난민캠프 관계자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답이 왔다.
“응, 캠프에 사람 없는 이유가 있어. 지금 항구에 가면 지옥 같을 거야. 어제 지방 정부가 캠프 내 난민 등록소를 항구 페리 창구 옆으로 옮기면서 섬의 모든 난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어. 모든 시스템이 마비되어 등록 절차를 중단하기에 이르렀어. 언제 다시 재개할지 잘 모르겠어.”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항구로부터 4km 떨어진 카파 테페에는 주로 시리아인들과 이라크인들이, 9km 거리의 모리아 캠프에는 아프가니스탄인들과 기타 국적자들이 머물고 있었다. 먼 거리를 오가며 등록하려고 애쓰느니 많은 난민들이 항구 근처에서 노숙하기를 선택해, 항구와 그 일대는 극도로 혼잡해진 것이다.
인구 3만 명이 채 안 되는 미틸리니는 원래 이맘때쯤이면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과 호화 요트들로 북적이는 전형적인 여름 휴양지라고 들었다. 하지만 시내로 들어오는 순간 마주한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거리마다 빈틈없이 난민들이 가득했다. 그들 뒤로 한적하게 늘어선 요트와 파란 바다의 대비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공원의 잔디밭 또는 도로의 빈 공간을 점유하고 어디선가 구한 텐트들이 시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화사한 옷차림의 관광객들과 이제 막 바다를 건너온 지친 표정의 난민들이 같은 거리를 걷는 모습은 일상적인 광경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식당과 카페, 호텔들은 난민을 상대로 장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는지, 유동인구에 비해 노천 테이블들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잠시 헤어졌던 바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시청 옆 카페에 있다는 말에 찾아가지, 그곳은 다른 카페들과 달리 거의 난민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 카페의 주인인 스트라티스는 다른 업주들과 달랐다. 그는 카페 내를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바젤이 이곳에만 난민이 가득한 이유를 알려줬다.
“난민들을 받아줄 뿐만이 아니라 난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가족들에게 무사하다고 연락하는 것임을 알고 느려진 인터넷 속도를 높이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어.”
그는 또한 모든 난민들이 전화기를 충전할 수 있도록 멀티 콘센트를 몇 개씩 사 가지고 와서 땀을 흘려가며 카페 곳곳에 직접 설치하고 있었다. 미소를 머금고 난민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묻고 다니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 종업원은 스트라티스가 손님의 신분이나 옷차림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예의를 갖추고 미소로 대하라고 단단히 당부했다고 말했다. 인류애 넘치는 그에 대한 존경을 표했지만, 그는 굳이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누구라도 같은 일을 했을 거야. 당신들 모두가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하기를 기도해 줄게.”
이스탄불에서 구명조끼가 필수품이었듯, 미틸리니에서는 텐트가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바젤과 무스타파도 헤어진 사이 어디선가 벌써 텐트를 구해 카페 옆 공원에 텐트를 설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오고 나서도 계속 도착하는 난민들로 미틸리니는 밤중에도 시끌벅적했지만, 하루 종일 걸어와 녹초가 되었던 우리는 다음 날 새벽 항구로 가기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바젤의 텐트 바로 밖에서 잠들기로 한 나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잠이 들지 않아 항구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공원 내 벤치에 앉아 잠든 중년 부부가 눈에 띄었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편히 잘 수 있도록 무릎을 내어준 채 자신도 그대로 잠든 남편의 모습에 마음이 짠해졌다.
미틸리니 항구
동틀 무렵 주변의 소음에 눈을 떴다. 새벽 5시간 반경, 무스타파는 이미 짐을 챙겨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카메라 장비를 꺼내기 위해 바젤의 텐트 안에 들어가니, 서로를 끌어안고 평온히 자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전날 밤 본 벤치 위 부부에 이어 또다시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래가 불확실한 채로 오직 서로에게 의지하며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이 커플. 가장 힘겨운 시기에 서로를 만나 불확실한 미래를 꿈꾸는 그들이 언젠가 생활의 여유를 찾고 과거를 돌아봤을 때, 텐트에서 서로를 이렇게 붙잡아주던 날을 기억하며 미소 짓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항구로 향하는 주변 난민들의 긴장한 표정을 보자 감상적인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카메라를 들고 그들을 따라 기 시작했다.
미틸리니는 여느 여름이라면 이 시간에 한적하고 평온했을 것이다. 하지만 밤새 더 많은 난민들이 도착했는지 항구 물가 주변에는 텐트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일찍 일어난 이들은 물병으로 세수를 하거나, 면도를 하거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거나, 또는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조용한 아침이었지만, 모두가 깨어나 일제히 항구로 향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혼잡해질지 조금 우려스러웠다.
그 우려는 금방 현실이 되었다. 미틸리니 시내에서 봤던 노숙 난민들은 사실 항구에 자리를 잡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었다. 항구 게이트를 넘어서자 커다란 주차장에는 전날부터 진을 치고 있던 수천 명이 이른 새벽부터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이 유독 복잡하고 시끄러워 가보니, 사람들이 고성을 지르며 분노한 모습이었다.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컨테이너를 가건물로 활용한 임시 사무소에서 그리스 본토로 가기 위해 얻어야 하는 일종의 단기 비자를 발급하고 있었는데, 이미 항구가 미어터질 정도로 수 천명 이상의 난민들이 몰렸지만, 직원은 고작 2~3명에 불과했다.
허가서 없이는 여정을 계속할 수 없는 난민들에게는 이 비효율적인 시스템조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미 전날 자정부터 사무소가 여는 오전 9시까지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기다림으로 지치고 예민해진 이들 사이에서 작은 시비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였다. 이런 갈등은 주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국적자들을 향하기 십상이었다. 특히 다수를 차지하던 시리아인과 아프간인 사이의 반목으로 주로 드러났다.
시리아인들은 자국의 내전으로 유럽이 문을 열어줬는데 아프간인들이 마치 무임승차하듯 몰려들어 자신들의 진행 속도를 늦춘다고 불만이었다. 반면 아프간인들은 자신들이 지난 십여 년간 탈레반과 테러를 피해 이용해 온 이 루트에 갑자기 나타난 시리아인들만 주목받고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방에 대한 누르고 있던 불만이, 9월 초 미틸리니에서의 항구에서 실제적인 충돌로 일어난 것이다.
한 순간 누군가 던진 돌이 군중 속으로 날아들었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갔다. 수십 명이 싸움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되었다. 커다란 돌들이 날아다녔고, 어디선가 파이프를 찾아든 이들이 상대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대부분은 서로에게 진정하라고 외쳤지만, 인내심이 바닥난 몇몇 혈기 넘치는 일부는 좌절감을 분출하듯 폭력적으로 반응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여성들은 울부짖으며 제발 그만두라고 애원했고, 일부는 “같은 고통을 겪는 형제들끼리 이러지 말자”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이런 소요를 통제할 안전요원은 전무했다.
오랜 소동 끝에 상황이 진정되자 뒤늦게 나타난 경찰들은 항구를 폐쇄하고 모든 난민들을 항구에서 나가게 했다. 미틸리니 시내는 다시 항구에서 쏟아져 나온 난민들로 북적거렸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몇 시간 후, 몇몇 경찰이 돌아다니며 난민들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도 위에서 지시를 받아 어쩔 수가 없어요. 도시공원에 텐트를 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가득 찬 텐트로 일반 시민들이 이용하기 힘들다고.”
“저희도 이해합니다. 미틸리니의 주민들에게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만, 보시다시피 도시가 꽉 찼고 갈 데가 없어요. 돈을 지불하더라도 호텔을 알아봤지만 전부 예약이 찼다는 답변만 돌아오고요. 하지만 당신들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 철수하도록 할게요.” 바젤의 차분한 어조에 경찰은 다시 한번 미안함을 표했다. 한편으로는 강압적으로 난민들을 쫓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나름 정중하게 부탁하듯 이야기하는 경찰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텐트를 철수하고 난민들을 유일하게 받아주던 스트라티스의 레스토랑으로 돌아가 다음 행선지를 모색했다. 다행히 우리 사정을 들은 스트라티스가 몇 군데 전화한 후 접근했다.
“위치가 시내에서 그리 가까운 건 아닌데, 공항 쪽으로 5km 정도 가면 레스보스에서 오래 산 미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방금 통화했는데, 난민도 자기는 상관없이 받아준대.”
돌로레스는 60대 인디언 출신으로 30여 년 전 레스보스로 이주했다고 했다. 도착해 보니 손님 절반 이상이 난민들이었다.
“ 난 상관 안 해. 저들이 어디 출신인지. 난민이라고 손님 대접 안 하는 그리스인들은 다 머저리들이야.”
굉장히 진보적인 사고를 지녔던 그녀는 앞으로도 레스보스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녀의 인맥을 동원해 도와주겠다고 했다. 이스탄불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그날 밤 맥주를 함께 마셨다.
“며칠 전에도 말했지만, 수많은 난민 중에서 하필이면 별로 종교적이지 않은 너희들을 만나 같이 여행하는 건 내겐 큰 행운이야. 이렇게 맥주도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으니. 나중에 너희 모두 정착하면 네덜란드로 초대해서 진짜 좋은 맥주가 어떤 건지 대접할게”
그때는 그날이 너무 멀게 느껴졌지만, 모두들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스칼라 시카미네아스(Skala Sikamineas)
새벽 두 시경 방에서 소리가 나 깨어보니 무스타파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늘 부지런한 그였다.
“어디가?”
“허가서 받을 수 있을지 항구에 또 가보려고. 다시 등록소 연다고 들어서”
“하지만 그 사무소는 9시나 10시쯤에나 열 텐데?”
“응, 그래도 지금부터 줄에 서면 좀 받을 확률이 더 높을까 해서.”
그들이 떠난 후 다시 잠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나니 바젤과 루나도 사라져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밖 해변가로 가보니 동틀 무렵 둘이 서로에게 기대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셔터를 몇 번 누르자 그들이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밤중에 무스타파는 항구로 갔어. 너희도 가서 허가서를 받으려 시도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해리, 어제 항구에서 무슨 일 일어났는지 봤잖아. 우리는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그리고 어떤 보장도 없는 줄에서 마냥 기다리고 싶지 않아. 너 없는 동안 마리아라는 그리스 저널리스트를 만났는데, 그녀가 자신의 인맥을 통해 우리가 쉽게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 알아봐 준다고 했어.”
정오쯤 돌아온 무스타파는 밤새 기다린 보람 없이 그날도 허가서를 받지 못했고, 또 다른 충돌 후 항구를 다시 폐쇄되어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그렇게 우리는 며칠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날의 반복이었다. 새벽부터, 또는 전날 자정부터 항구에 나와 줄을 서서 허가를 기다리고, 극소수만 원하는 것을 얻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면 그날의 업무가 중단되는 악순환. 그러는 동안에도 섬에 도착하는 난민은 하루 천 명 내외였으니, 이 작은 미틸리니가 언제까지 이를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바젤과 루나에게 말한 후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북쪽 해안가에서 홀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매그넘이라는 에이전시의 이탈리아 사진가 파올로 펠레그린이 그의 어시스턴트와 해안가로 향하는 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우리는 스칼라 시카미네아스라는 작은 해변 마을에 도착했다. 며칠 전 우리가 도착했던 절벽과 바위 투성이 등대 근처가 아닌, 잔잔한 해안가였다. 그제야 이곳이 원래 우리가 도착했어야 할 곳이었음을 깨달았다.
며칠간 혼란의 미틸리니에서 잠시 가라앉았던 감정이 해안가에 돌아와 바다를 바라보자 다시 솟구쳤다. 도착 직후의 흥분과 전율이 마치 내 몸에 영원히 각인된 듯, 지금 이 순간 바다를 건너고 있을 누군가의 심정에 강하게 이입되었다.
우리가 도착했던 해안가에는 보트의 엔진을 노리던 지역 어부 몇 명 외에는 아무도 우리를 기다려주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며칠 후 돌아간 북부 해안가에는 많은 자원봉사자들과 저널리스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쿠르디의 사진이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후 불과 며칠 만에 곳곳에서 난민들을 돕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온 이들이었다.
석양이 질 무렵 도착한 난민들은 도착과 동시에 해안가에서 기다리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둘러 쌓였다. 먼저 아기와 아이들, 여성들이 내리고,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지르거나 “알라 악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고,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 흘리거나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들은 이제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여전히 모든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자원봉사자들은 담요를 나눠주거나 차를 제공하며 도착한 이들이 환영받는다고 느끼도록 최선을 다했다.
늦은 오후에 도착했을 때 마을의 작은 절벽 위 교회에서 한창 결혼식 준비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날이 저문 후 마을로 돌아오니 식이 끝나고 만찬 중이었다. 테이블 중앙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는 신부와 신랑 그리고 그들을 축하하는 하객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바로 옆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피로연을 구경하는데, 이미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해안가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해가 지고 난 후 도착한 난민들이 온몸이 젖은 채로 삼삼오오 마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말없이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만찬장을 우회했지만, 몇몇은 옆 식당에서 음식을 시켜도 되는지 물었다. 지난 며칠간 현지인들의 대응을 떠올리며 웨이트리스의 반응을 지켜봤다. 다행히 그녀는 정중하게 레스토랑에서 식사는 안 되지만 포장은 가능하다고 미안해하며 말했다. 만찬 참석자 중에는 난민들이 가까이 오면 멀리 돌아가라는 손짓을 하는 이들도 있어 속으로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젊은 두 난민이 만찬장 뒤 어둠 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랑과 신부를 위해 흘러나오던 음악이 마치 자신들을 위한 것인 양 흥에 겨워서 살풀이하듯 조용하고 천천히 몸을 흔들어댔다.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그들의 움직임을 보며 나는 속으로 응원의 미소를 보냈다.
그런데 신부 옆에서 춤추던 노년의 여성이 뒤쪽에서 최대한 안 보이게 춤을 추고 있던 그 난민들에게 슬그머니 다가가더니, 한 난민의 손을 잡고 조금씩 그들을 빛으로 이끌었다. 뒤이어 또 다른 남성이 활짝 웃으며 멀찌감치 뒤에서 구경하던 다른 난민들에게도 함께 춤추자는 손짓을 보냈다. 그제야 난민들의 출현에 예민하게 굴던 하객들도 못 본 척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으로 무언의 동의를 표시했다.
한동안 춤을 춘 두 청년은 하객들에게 팔을 휘둘러 크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선 계속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극적인 전환이 이후로도 가끔 머릿속에 맴돌았다.
낯선 현실에 경계심과 벽을 쌓는 것은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노년 여성처럼 작은 제스처 하나로도 불신과 두려움을 의외로 쉽게 무너뜨릴수 있는 것. 손을 조금만 내밀어도 그런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 수 있는데, 불신의 벽을 더 높이 쌓기보다 그 마법을 보려는 용기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가끔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