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 너른 바다, 두 마리의 돌고래
바다의 태몽은 돌고래가 등장하는 꿈이었다. 푸르고 너른 바다였다. 열대지역에 있을법한, 짚으로 만들어진 작고 시원한 집이 하나 있었고 길게 뻗은 대나무가 그걸 지탱해주었다. 물 위로 제법 높게 솟은 집에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바다수영을 위한 휴식과 다이빙을 위한 공간 같았다. 하늘색 하늘엔 뽀얀 구름이 예쁘게 떠 있고 해가 뜨거울만치 밝게 타는 날이었다. 나는 바다 위의 작은 집에서 다리를 동동 내어두고 앉아 다리 밑 맑은 군청색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나는 자신감이 충만했고 그 높은 곳에서 맨 몸으로 바다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뛰어들었다. 제대로 된 다이빙을 해 본 적도, 맨 몸으로는 깊은 바닷속을 헤엄쳐 본 적도 없는 나였지만, 꿈속에서 내 몸은 너무나 부드러웠고 자유로웠다.
나는 나의 양 옆에서 아주 커다란 돌고래 두 마리를 발견했다. 내가 바다로 뛰어들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 크기가 거의 10m는 되지 않았을까. 까만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아주 매끈한 몸을 곧게 세워 바다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놀고 있었다. 바다로 뛰어든 나를 환영하는 듯, 나를 호위하는 듯 두 마리가 같은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그렇게 거대한 돌고래는 처음 본 거였는데도 놀라지 않았다. 원래 늘 함께 수영하는 사이였던 것처럼, 자연스레 같이 바다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때, 바닷속에서 유영하던 나의 몸짓, 평온했던 물아래 풍경, 곁에 있던 돌고래들에게서 느꼈던 애정 어린 감정들(우린 교감하고 있었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행복감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어서, 깨자마자 이 꿈이 태몽이구나 했다. 그리고 그 행복감을 그대로 담아 둘째의 태명도 바다라고 지었다. 피곤해서 배가 뭉친다거나 통증 비슷한 게 느껴지면 누워서 눈을 감고 이 꿈을 떠올리며 호흡한다. 그럼 금세 몸이 편안해질 정도로, 내겐 달콤하고 기분 좋은 꿈이 되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난 후의 꿈이라 조금 의아한 점들은 있었다. ‘보통 태몽에는 특별한 생명체들이 한 마리 아니면 아예 여러 마리가 동시에 나오지 않나? 쌍둥이도 아닌데 왜 돌고래 딱 두 마리 나왔지?’, ‘돌고래가 매끈매끈 예쁘고 씩씩해 보이는 게 보기만 해도 기분 좋던데. 이게 딸아이 꿈일 수도 있을까?’
뭐 아무래도 좋았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꿈이니까.
알쏭달쏭하던 꿈의 비밀이 오늘 갑자기 풀려버렸다. 산부인과 정기검진엘 가서 바다 잘 있나, 하고 초음파를 보는데 선생님이 “애기가.. 아빠를... 닮았네요?” 하고 천천히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함께 있던 사랑이가 남자아이라 그랬는지 더 조심스러우셨던 것 같다. 어쩐지 내 눈에도 그런 게 보이더라니. 나중에 정원장님이 초음파 사진 보실 때도 ‘다시 볼 것도 없이 아들’이라며 재차 확인을 시켜주셨다. (아...)
둘째가 아들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꿈 생각이 났다. 아. 이 녀석들이 씩씩한 아들이라 둘이 똑같은 생김을 하고 내 곁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던 거였구나. 다시 생각해보니 생김새에서 풍기는 느낌도 수컷에 가까웠다. 연 하늘색이나 분홍색의 돌고래도 있는데 게 중에서도 검정과 흰색의 돌고래였으니까. (범고래의 또렷한 색감을 닮았지만 동그라면서도 매끈한 몸 라인이 돌고래라 돌고래라고 기억한다)
아들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꿈의 그 장면, 다음은 ‘아, 정말로 아무것도 안 사도 되겠네’ 하는 현실적인 생각. 그리고는 ‘그냥 해 본 대로 하면 되니까 오히려 편하겠다’ 하는 빠른 포기.
솔직히 입덧의 증후를 보며 ‘딸 아니야?!’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었기에 아쉬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결과를 듣고서는 내 생각보다도 빠르게 수긍이 되었다. 사랑이 때도 그랬듯,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사랑이에게는 같은 성별의 형제가 생기는 것이라 좋을 거고. 딸들은 감정 소모가 엄청나다던데 내 성격이 그걸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 그리 하신 걸수도 있겠고. 어쨌든 우리 집엔 아들이 오는 것이 맞으니 그리 하셨겠지. 그렇게 쉽게 마음 정리가 되었다.
무언가 오래 기대한다는 건, 그 시간 동안 참 여럿의 생각들을 품어보는 것이다. 이러면 이러지 않을까, 진짜 이렇게 되려나, 그럼 이런 건 어떨까, 하고. 사실 결과를 듣고 나면 ‘에이 싱겁네’ 해 버릴 때가 많다. 이러니 저러니 나름의 셈을 열심히 해보지만 결과는 별거 아닐 때가 많으니까. 그 시간 동안 내가 마음을 너무 부풀려왔기에 더 그럴 것이다. 이렇게 내 마음과 다르게 펼쳐지는 삶을 보며 알 수 없는 인생을 더 실감한다.
어찌 되었건 오늘은 마음이 참 후련하다. 속이 시원하다고 해도 되겠다. 둘째 소식을 듣는 모든 지인들이 성별을 물을 때마다 나 또한 궁금증을 이길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아들 둘을 둔 엄마가 되는구나. 각오와 함께 또 다른 기대감을 가져본다. 아들 둘이면 엄마가 힘들다고들 하던데,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사랑이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또 한 명 우리에게 와서, 우리 네 식구만 누릴 수 있는 진한 행복을 느끼게 해 줄거라 믿는다. (물론 힘듦도 주겠지만...) 꿈속의 돌고래들과 함께 내가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을 누렸던 것처럼, 아이들과 늘 부드럽게 바다를 헤엄쳐가듯 사는, 그런 엄마가, 내가, 되고 싶다.
2019. 9. 26
사랑이는 태어난 지 22개월 27일,
바다는 뱃속에서 18주 4일 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