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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Oct 18. 2019

오늘, 너와 나 둘 만의 여행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길 걸어 보기


사랑이랑 버스 타고 걸어서 도서관 가기, 첫 도전의 날. 실은 몇 주 전부터 한번 해 봐야지 했는데 엄두가 안 나서 못했던 일이다. 집 앞 버스 정류장은 가깝지만 버스에서 내려 거진 900m를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세 살 아이와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건 예상 시간의 2-3배는 걸리는 일. 얼마나 먼길이 되려나 조금 두렵긴 했지만 낮잠도 충분히 잤겠다, 열심히 걷기 운동하고 저녁을 먹일 요량으로 출발했다.

“오늘은 버스 타고 도서관에 가 볼 거야. 사랑이가 엄마 말 잘 들어줘야 해?” 미리 이야기 한 뒤에 집을 나섰다. 우다다 놀이터 쪽으로 뛰어갈 줄 알았는데 사랑이가 버스 정류장에서 얌전히 버스를 기다린다. 작은 초록색 마을버스에 올라 버스카드를 찍고 빈자리에 앉아 사랑이를 무릎에 앉혔다. 예전에도 아기띠를 하고 몇 번 버스를 타 보긴 했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 나에게 안긴 아이에게서 약간의 긴장 섞인 호기심이 전해졌다. 창 밖 풍경과 버스 손잡이, 벽에 붙어 빨갛게 빛 나는 벨, 반복해서 열리고 닫히는 문, 내리고 타는 사람들. 그 모든 걸 흥미롭게 바라보는 아이의 옆모습이 ‘오늘 버스 타 보길 잘했네’ 그런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예상대로 버스에서 내려 걷는 길은 천리길 같았지만 중간에 만난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와 큰 도로를 달리는 중장비, 커다란 경찰버스들 덕에 그럭저럭 재밌게 걸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 “우리 도서관 가서 책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자?” 했더니 사랑이가 “녜~” 대답과 함께 연이어 “죠.치~” 하고 말했다. 요즘 부쩍 ‘녜~’ 아니면 ‘우응!’ 하고 대답하길 즐기더니 오늘 처음으로 대답 뒤에 자기 의견을 덧 붙인 것이다. 신기하고 또 귀여워 마구 힘이 솟았다.

오후 간식을 건너뛴 외출이라 도서관에 도착해서 우선 저녁을 먹었다. 둘 만의 외식은 오늘이 세 번째. 메뉴는 두 번째 외식 때와 같이 돌솥비빔밥. 어째선지 임신하고 돌솥비빔밥이 자꾸 땡겨서 종종 먹는다. 아이와 둘이 온 걸 본 종업원 분이 먼저 매운 건 따로 빼 주시겠다 했다. 그런 사소한 배려가 엄마에겐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른다. 음식이 나오고 사랑이 몫을 작은 접시에 덜어두고 나머지에 고추장을 뿌려서 삭삭 맛있게 비벼 먹었다. 사랑이는 조금 먹다가 식당 여기 저기를 열심히 돌아다니긴 했지만, 사람이 적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생각보다 자기 몫도 다 잘 먹고 우리 둘 다 만족스러웠던 저녁.

저녁을 먹고는 어른 책이 있는 곳으로 가 두 권의 에세이와 예약해두었던 경제 관련 책을 빌리고 한 층 아래의 어린이도서관으로 갔다. 입구를 향해 달리던 사랑이가 순간 반대편의 폴리 음수대로 빨려 들어간다. 음수대가 경찰차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 저렇게나 삐뽀삐뽀가 좋을까. 몇 번 만지작 거리다 조작이 마음처럼 안되자 도서관 문으로 다시 뛰어갔다. 오랜만에 거기서 새로운 그림책들도 보고 우다다도 좀 하고 그랬다. 아기띠 하고 다니던 시절에만 해도 아이가 책을 잘 본다는 느낌은 크지 않았는데, 확실히 좀 더 크고 오니 내용에 더 흥미를 보이고 조금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도 했다. 나중엔 또 조금 더 오래 있을 수도 있겠지.

놀다 보니 어느새 여덟 시가 다 되어서 정리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앞 뜰 놀이터에서 흔들이도 좀 타고 미끄럼도 타고 또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자꾸 옆길로 새길래 “우리 버스 타러 가면서 빵집 들러서 빵 먹을까?” 했더니 또 “죠.치~” 그런다. 목이 마를 것 같아 가다가 빵집 대신 편의점에 들러 두유를 골랐다. 빨대를 꽂아주고 두유 맛있냐고 물으니 나에게도 먹여준다. 사랑이가 피곤해 보여서 안고 좀 걸었다. 손에 꼭 쥔 두유를 자기 한 입 마시고 나에게도 또 마시라고 입에 넣어주고 그랬다. 정류장에서는 과자도 하나 먹으며 버스를 기다렸는데 버스가 계속 오지 않아 결국 다른 정류장으로 가서 다른 걸 탔다.

결국 조금 돌아서 합정역에 도착. 사랑이는 익숙한 풍경을 보더니 또 에너지가 솟았는지 자꾸만 집 반대 방향으로만 달렸다. 긴 계단을 세 번은 넘게 왕복하고 열린 식당 창문으로 술 한 잔 하는 이모 삼촌들 구경하고 울타리를 올라타고... 동네에 와서 거진 한 시간을 뛰고 거의 다 와서는 등에 업혀 집에 들어갔다. 중간에 하도 갈 생각이 없어 보여서 집 가면 아이스 젤리 준다고 했었는데 그 생각이 났는지 들어오자마자 사랑이는 냉동실로 향했다. 저녁 간식에 단 걸 많이 먹은 것 같아서 얼른 옷을 벗기고 화장실로 직행해 씻기고 바로 재우러 들어갔다.

사랑이랑 불 꺼진 방에서 하루를 되돌아본다. 다리가 좀 아팠을 것 같아 팔다리를 열심히 주물러준다. “사랑아 오늘 우리 버스 타고 걸어서 도서관 가 보니까 재밌었다. 그치?”, “우응!” 사랑이가 기분 좋게 대답한다. 몸은 좀 피곤했지만 사랑이랑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해 냈다는 게 뿌듯하고 기쁘다. 그러고 보니 네 시간 반이 넘었던 오늘의 여정. 정말 많이 걷고 뛰고 놀았다. 동네에서 움직인 건데도 마치 여행 다녀온 기분이 든다. 사실 다른 게 여행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길을 걸으면 그게 여행이니까. 날이 너무 추워지기 전에 사랑이랑 소중한 시간들을 더 보내봐야지, 마음먹게 되는 하루였다.



2019. 9. 20
사랑이는 태어난 지 22개월 21일, 
바다는 뱃속에서 17주 5일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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