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커플 사이에 껴서 떠난 비냘레스
도피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때는 2015년 1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떠났던 파견학생의 처음은 생각보다 외로웠고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3시간 반 달려야 나오는 그 지역은 스페인 내에서도 춥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몸도 마음도 어는 것 같았다.
도착하고 이틀을 이불속에서 꽁꽁 숨어있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 삼일째 새벽 2시에 배낭 하나 덜렁 매고 떠났던 근교 여행. 그때 나는 야간 버스를 타고 무턱대고 포르투로 갔다. 당장은 춥고 차가운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무 데로나 떠났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련해질 만큼 유럽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가 될 줄이야. 도망으로 시작된 여행이었지만 그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그 시절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었다. 유럽에서 살아갈 용기.
쿠바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번에는 도피여행은 아니다. 하지만 목적은 비슷하다. 쿠바에서 살아갈 용기를 조금 더 얻는 것. 아 하나 더 추가, 푸른색 많이 보고 오기. 쿠바에서 다른 곳보다도 비냘레스가 기대되었던 이유는 자연 때문이었다. 여행 가기 전에 일부로라도 블로그 글을 잘 찾아보지 않는 나지만 비냘레스는 유난히 사진을 많이 찾아보았다. 직접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도피여행을 포르투로 떠났다고 했는데 거기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 내가 용기를 얻었던 걸까? 도시 자체에? 글쎄, 나는 꼭 포르투가 아니었어도 됐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에게 용기를 준건 결국 사람이었으니까. 도착한 순간부터 만났던 좋은 동행부터 조금은 불편했던 사람까지, 모습은 달라도 쓰는 말이 달라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이런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저런 삶을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서서히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었다.
물론 포르투 자체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도시다. 아기자기한 골목들과 언덕들 그리고 특히 해 질 녘에 혼자 강가에 앉아 있던 그때- 반짝반짝거리던 물결과 새들과 나무와 하늘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마음에 걸려있는 중.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냘레스 여행도 결국에는 사람이었다.
독일 커플과 스페인 커플과 함께(사이에 껴서) 합승택시를 타고 갔는데 어쩌다 보니 이 독일 커플과 숙소도 함께 잡고 말도 같이 타고 식사도 함께 해결하게 되었다. 둘 사이에 껴서 민폐가 아닌지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그들은 아바나부터 비냘레스까지 나와 동행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좋아해 줬다. 또 내 앞에서 둘이 이야기할 때는 꼭 영어를 써줬는데, 나도 나중에 남편이랑 여행할 때 외국인 동행이 생기면 꼭 그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은 다음날 9시에 택시를 타고 해변으로 떠났고 나는 캐노피를 하러 갔는데 극적으로 도로 한복판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들이 이번 여행에서의 나의 용기였다. 길에서 친절하게 은행 위치를 알려주신 할아버지, 장사 속이 보이지만 미워할 수는 없었던 택시 기사 아저씨, 흥이 많던 집주인 청년까지 다 그랬다. 집 앞에 앉아 있다 만난 mauricito라는 아이가 그랬고 환영한다며 구아바 주스를 내미시던 까사 주인아주머니도, 말 타다가 갑자기 왔던 소나기에 다 같이 아무 마구간이나 가서 피해있었던 그때도. 당신들과 함께 있었기에 특별해진 순간.
여러 지역 중에도 특히 비냘레스에 가고 싶었던 이유 첫 번째가 아름다운 자연이라면, 두 번째는 캐노피다. 사실 같은 맥락이다. 캐노피를 하고 싶은 이유는 자연 속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니까.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무와 산은 평소에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던 그것과는 또 다르다.
숙소에서 캐노피 하러 가는 곳까지 왕복 택시 비용을 왕창 바가지 쓴 탓에 속상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한없이 슬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막상 도착하니 하러 온 사람이 나밖에 없다. 장비를 차고 우람한 아저씨 두 명과 산으로 떠나니 개인 보디가드를 둔 것 같이 든든해진다.
코스는 총 4개. 약 20분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룹이 아니라 나 혼자이기도 했고 내가 타기 전에 딱히 망설이지도 않아서 한 10분에서 15분밖에 안 걸렸다. 아주 제대로 된 캐노피는 아니었지만 아저씨들도 친절하시고 경치도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뷰가 끝내준다던 어떤 호텔 테라스를 포기하고 이곳에 온 건데 후회가 없다. 그리고 원래 아쉬움을 조금 남겨놔야지 다음에 또 올 수 있다.
비냘레스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실망스럽지만 마냥 실망만 할 수는 없는 곳이랄까.
그 이름이 주는 분위기만큼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단지... 각종 투어 프로그램들, 반강제 음료 권유 등 너무 상업화되어버린 모습은 안타까웠다. 그게 싫어서 일부러 투어 신청 안 하고 개인적으로 온 것이었는데 막상 오니 무엇 하나 하려고 해도 이 투어 네트워크에 자꾸 발목이 잡혔다. 나의 상상과 가장 달랐던 부분이기도 하고. 그래도 관광수입이 (매우) 중요한 이 곳에서 누구를 탓할 수는 없고 딱히 비난할 생각도 없다. 유럽에서 포르투가 첫 여행지였던만큼 기억에 많이 남는데 비냘레스도 그럴 것 같다. 산이랑 풀이 그리웠던 내게 좋은 쉼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비냘레스를 떠나며 썼던 일기의 마지막.
그나저나 지금 나는 고등학교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가장 큰 계기는 전공 선택과 작년의 스페인 생활이었던 것 같다. 물론 파라과이도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긴장을 좀 벗어던지고 진짜 즐기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였다. 어제 합승 택시 타고 오면서 스페인 커플, 독일 커플과 유럽 곳곳의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과 주제가 있다는 자체가 새삼스레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그랬다. 우리 이전에 서로 알지도 못했고 사실 만날 일도 딱히 없는 사람들인데 이 먼 땅 쿠바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너무 신기하다고. 나도 딱 그랬다. 아무거나 잘 먹고 어디서든 잘 잔다는 것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앞으로도 여러 경험하면서 열린마음으로 살 수 있었으면.
세세한 일정과 여행기록은 일기장 속에.
이곳에는 한 순간 한 순간 떠올랐던 느낌이나 생각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