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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 Jan 12. 2017

그들이 새벽에 캐리어를 끌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이유

12월의 마지막 밤 그리고 쿠바에서 맞는 새해

 인턴 임기가 1월 말 까지니 쿠바에서 새해를 보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나지만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괜한 외로움이 틈탈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사람과 함께 2016년의 마지막과 2017년의 시작을 함께 할 줄이야.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물론 혼자 보냈어도 또 그런대로의 의미가 있었겠지만 이렇게 바글바글 함께 보낼 수 있어서 문자 그대로 '참 좋았던' 날.



 

 먼저 30일 저녁에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후배의 집에 가서 떡국을 먹었다. 고맙게도 독일에서 유학한다는 후배의 친구가 친히 공수해온 떡국 떡으로 만든 것이었다.


 쿠바에서 떡은 어마어마하게 귀하신 몸이다. 나도 비자 때문에 멕시코에 갔을 때 떡볶이 떡 한 판을 가져와서 세 번에 나눠 친구들과 아껴먹었다.


 후배와 친구는 떡국 외에도 양념치킨, 된장국, 묵 등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았다. 특히 묵을 봤을 때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묵이라니... 쿠바에서 묵이라니..! 요리 솜씨 좋은 후배가 묵 가루로 만들었다고 한다. 체구는 작지만 얼마나 부지런하고 야무진지 배울게 많은 친구다. 그나저나 이 나라는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놀랄 수 있어서 재밌는 것 같다.



 쿠바의 12월 31일은 내가 겪었던 지금까지의 12월 31일과는 다르다.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날씨가 아닐까. 이렇게 따뜻한(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12월이라니. 전혀 연말 느낌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거의 매년의 마지막 날은 가족들과, 혹은 교회에서 보냈는데 쿠바의 31일에 나는 아주 아주 늦잠을 잤다. 오랜만의 꿀잠이었다.

 

 오후 7시경에는 초대를 받아 친구 집에 갔다. 처음으로 쿠바 친구 집에 초대를 받은 거라 설레면서도 평소 스페인어 공부 많이 좀 해놓을 걸, 하며 늦은 후회를 해본다. 친구의 집은 우리 집에서 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네 블록 올라가 작은 슈퍼 옆 골목 철문 앞에서 친구를 부른다. 곧 웃는 얼굴로 반겨주는 친구 품에서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조금 어색하게 기웃거리며 집에 들어가니 친구의 아내, 친구, 조부모님, 부모님, 이모에 삼촌에 사촌들에 조카에 누나의 남자 친구까지 집이 아주 생기가 넘친다. 보기 좋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떠오른다.


 아주 예전 이야기지만 어릴 적 나에게 12월 31일은 '외갓집 가서 자는 날'이었다. 31일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함께 1일을 맞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갑자기 쓰러지신 외할머니께서는 계속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2016년이 끝나기 3주 전 눈을 감으셨다. 그때 가족과 함께 할머니 곁에, 그리고 엄마 옆에 있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그래도 마지막 순간 주무시듯 편안하게 가셨다는 말씀에 겨우 마음을 추스렸었다. 갑자기 아빠 엄마가 보고 싶다. 사랑하는 아빠 엄마 2017년에도 건강하시길. 내일 군대 가는 동생도 몸과 마음 건강히 잘 다녀오길.



 저녁식사를 위해 식탁과 간이 테이블 몇 개를 붙였는데 위에 식탁보를 깔아도 울룩불룩해서 재밌다. 저녁 식사는 유까, 샐러드, 쿠바 주식인 콩 밥 그리고 메인 메뉴인 훈제 돼지고기였다.


 어쩌다 보니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큰 친척 앞에 메인 요리가 가게 되었다. 다른 식구들이 아이고 저게 왜 저기로 갔냐며 저 친구가 다 먹어버릴 거라고 하며 놀리니 그 친척이 껄껄 웃으며 다 꿀꺽하는 시늉을 해 보인다. 어느 모임에 가나 이렇게 유머 있고 분위기 띄우는 사람 한 명씩 있던데 여기도 한 분 계시네. 그리고 이 아저씨, 하루 종일 나를 엄청 놀려먹었다.


 음식은 간도 적당하고 다 맛있었다. 특히 유까가 인기가 많았는데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유까가 있는 접시를 그 친척분이 가져가셨다. 막 접시에 덜으려고 하시는데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쳤다. 흠칫하시더니 조금 줄까? 하신다. 괜찮아요, 하려고 했는데 혹시 내가 안 먹으면 음식이 입에 안 맞는가 보다고 생각하실까 봐 네, 했다. 그 친척분은 흐뭇한 표정으로 얘 봐라, 동양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부끄러움이 많아서 더 달라고 못하던데(이런 이미지인가?) 초고속으로 대답하는 거 봤어? 너 생각하는 거 나밖에 없지? 윙크하시며 유까를 나눠주신다. 아 이 아저씨 매력적이시다.


 딱히 그럴 일이 아닐 때에도 금방 물들곤 하는 내 얼굴은 또 빨개졌다. 친구의 친구가 옆에서 아유, 이 친구는 무슨 말만 하면 빨개지네, 한다.



 저녁 식사 후 후식을 먹고 보드 게임을 했다. 식구는 많은데 게임은 하나라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한다. 사실 12시가 될 때까지 있을 줄은 몰랐는 데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해까지 함께 맞이하게 되었다. 보드 게임하다가 12시 5분 전에 갑자기 분주해진다. 샴페인을 어디선가 꺼내오고 안 방 티비를 켰다. 3, 2, 1 빵! 다 같이 건배를 하고 볼 뽀뽀를 하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는데 행복하다.


 새해 인사를 마치고 또래 친구들 세 명과 함께 초콜릿 바를 먹으면서 마저 게임을 했다. 그런데 친구들이 갑자기 주섬주섬 여행 가방을 꺼낸다. 그러더니 밖에 나가서 한 바퀴 돌아야 한단다. 왜? 하고 물으니 1월 1일 새벽에 여행 가방 들고 다니면 올해 안에 해외여행 갈 수 있거든, 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여행 가방을 풀썩 내려놓으며 덧붙인다. 해외여행은 솔직히 너무 먼 이야기고 나는 올해 국내 여행 가고 싶어서 하는 거야. 미신인걸 알지만 재밌잖아.


 그렇게 해서 우리는 새벽에 여행가방을 끌고 동네를 한 바퀴 돈 것이다. 친척 두 명도 합류했다. 쿠바의 길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줏빛 꽃이 잔잔한 바람에 살랑거리는 아주 예쁜 밤이었다.

 

 평균 월급 약 25불인 이 나라에서(다들 부업을 하긴 하지만...) 한 밤 중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건 별똥별이 떨어질 때 이루어질지 아닐지 모르지만 빌게 되는 소원 같은 걸까.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 가방 끌고 다니는 사람 많았는데 오늘은 우리밖에 없는 것 같네. 우리 빼고 다들 소원 성취해서 여행 갔나 봐, 하며 웃는 너.  내가 미안할 건 아닌 걸 알지만 외국 어디 어디 가봤냐는 물음에 응? 그냥 몇 군데... 하며 말 끝을 흐리고 말았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별들이 반짝반짝하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내가 아바나에서 새해를 맞을 거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는데. 아니, 쿠바에 있는 모습을 상상조차 한적도 없었지. 그러다 문득 어제 잘못 뜯은 레모나가 생각난다. 가루가 은하수처럼 눈 앞에서 일렁거렸다. 분명 잘못 뜯어서 그런 건데 그 모습이 꼭 별무리 같아서 아름다웠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일로 그것에 반하게 되는 순간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나는 우연함을, 예상치 못한 것들을, 즉흥적인 것들을

어느 정도 사랑하는 편이다.

신의 존재를 믿는 나는

그건 사실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내 작은 머리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비록 가끔은 그 때문에

긴장하게 되고 골치 아파지고 깜짝 놀라게 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재밌는 것 같다.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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