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보리 Jan 11. 2017

첫 번째 비자 연장의 기억

그러나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되긴 된다

 8월 22일은 처음으로 비자 연장을 하러 간 날이자 날씨가 아주 마음 놓고 푹푹 찌던 날이었다. 아무리 복장이 자유로운 쿠바라지만 그래도 이민국에 가는 거니까, 하며 긴바지에 소매가 꽤나 내려오는 반팔을 입었던 나는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다음에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다.




 비자 연장을 위해서는 은행에서 20 쿡짜리 한 장, 5 쿡짜리 한 장, 총 25 쿡 어치의 우표를 사서 가야 했다. 글로 쓰니 정말 간단하게 보이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그리고 실제로 간단한 것이 맞다) 우표를 사러 가서 나오는 순간까지 총... 세 시간이 걸렸다. '비자 연장하러 갈 때 각오하고 가'라는 선배의 뼈 있는 한 마디가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쿠바에서는 동네슈퍼(작은 슈퍼)에 가든 환전소에 가든 '울띠모' 시스템이 도입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수가 제한되어 있는 곳의 경우 밖에서 줄을 서게 되는데, 물론 마지막 사람을 알아보기 쉽게 예쁘게 줄을 서 있을 수도 있지만 만약 여기저기 듬성듬성 서 있을 경우,


1. 울띠모(마지막)?이라고 외친다.

2. 누군가가 손을 들어 표시한다.

3. 그럼 내가 그다음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와서 울띠모?라고 외치면 내가 손을 들어 표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 앞사람까지 가리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 이 방법이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울띠모를 외쳐야 할 때마다 두근두근했다.


 한 달 차, 울띠모 시스템에 더더욱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은행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사이 다른 아저씨께 울띠모를 내주고 나서야 용기를 냈다. 밖에서 줄을 한참 서다가 드디어 은행 안으로 들어간 순간 너무 기뻤지만 예상치 못하게도 안에도 또 줄이 있었다. 꽤 여러 개의 창구 중 열려있는 것은 1,2,3,6,7,8번 총 6개. 거기서 또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7번 창구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겨우 돌아온 내 차례에 7번 창구 아저씨의 청천벽력 같은 소식...!


 -우표 사려면 1,2,3번 창구 중 하나로 가세요.

-네...


 어쩔 수 없이 옆으로 가서 또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은행에 계시던 경찰 아저씨가 여기는 한참 걸리니 옆에 6,7,8번 창구 중 하나로 가라고 하셨다.


-네? 아저씨 저 방금 거기서 왔는데요, 우표 사려면 여기서 줄 서라고 하시던데요?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자신 있게 앞장서시는 경찰 아저씨. 따라갔는데 만약 아니라면 다시 줄을 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망설여졌다. 결국 아저씨가 데려다 주신 곳은 6번 창구였다. 6,7,8번에서는 우표를 안 판다는 7번 아저씨의 말씀과는 달리 친절한 6번 창구 아가씨는 허무할 만큼 쉽게 우표를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7번 아저씨는 왜 1,2,3으로 가라고 하셨던 걸까? 이때까지만 해도 '왜?'인지 궁금했던 것이 참 많았는데 어느샌가 나는 쿠바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게 되었다.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할 뿐. 나중에 시간이 더 흘러 은행이 닫을 시간쯤에 가면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아침 일찍 가면 오히려 줄을 안 설 줄 알았는데 여긴 반대다.



 은행에서 오른쪽으로 3블록 가서 쭉 올라가면 이민국이다. 아직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길에서부터 북적북적함이 느껴진다. 오늘 안에 연장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안은 더 가관이다. 은행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수와는 비교가 안된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는데 직원한테 물어보니 비자 연장은 2층이란다. 야호-하며 올라가니 다행히도 내 앞에 한 8명 밖에(?) 없다. 대기실에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가끔 한줄기 바람이 들어온다. 덥긴 하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중국 사람, 스페인 사람, 독일 사람 등 국적이 다양하다.


 내 차례가 되어 우표, 여권, 보험 등을 꺼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험이 말썽이다. 내 영문 보험에 쿠바가 CU라고 표기되어있었는데 CU가 어떻게 쿠바냐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급기야 옆 직원한테 이 치나(치나는 중국 여자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동양인을 총칭함)가 CU라고 적어와서는 이게 쿠바랜다, 하면서 웃는다. 다급해진 나는 옆 직원과 또 나처럼 비자 연장하러 온 스페인 아저씨께 도움을 구했다.


-스페인은 ES, 이탈리아는 IT라고도 하잖아요, 그것처럼 쿠바는 CU라고 표기하지요?


 다행스럽게도 모두들 내 말에 맞장구쳐준다. 직원 언니는 약간 뻘쭘했는지 괜히 다른 말을 하다가 연장 처리를 해준다. 우표도 풀로 손수 붙이고 사인도 여러 번- 드디어 끝났나 싶었는데 이제는 밑에 가서 기다리란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도 내성이 생기나 보다. 너무 더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 이냥 저냥 기다릴만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앞으로의 쿠바 생활에 좋은 경험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것은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되긴 된다는 것. 그런데 1층에 하도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서 내 이름을 부를 때 내가 잘 들을 수 있을까, 했는데 그때 동양인이 나밖에 없었어서 그런지 비자가 나왔을 때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나에게 전달해주었다. 긴긴 기다림 끝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비자와 여권을 챙겨 넣고 이민국을 나서려는데,


이 싸한 느낌은 뭐지?

주섬주섬 비자를 다시 꺼냈다.


세상에 -


 오늘은 8월 23일. 8월 26일인 비자 만료일 전에 연장하러 조금 일찍 온 것이었다.

그런데 왜 다음 비자 만료일 칸에 다시 8월 26일이 적혀있는 걸까?


나오던 발걸음을 되돌려 직원에게 보여주니 잘못 적었다며 다시 기다리라고 한다.

역시 쿠바는 기다림의 연속인가.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더 멀리 가기 전에 확인해서 다행이다. 만약 이대로 갔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겼거나 다음날 다시 와야 했을 텐데 지금 발견한 게 감사하지.


기다린 만큼 다시 기다려야 하나 했는데 생각보다 비자는 빨리 나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날짜로.

그리고 나는 고생한 나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나의 철칙: 고생했을때는 잘 먹어야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기도 쉽지 않은 너란 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