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놓치다니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
"경유 시간이 짧아서 토론토 공항에서 아마 비행기를 놓치실 가능성이 큽니다(나중에는 놓치실 거예요-라고 말씀하셨다). 꼭 새 탑승권과 숙소를 요청하셔야 돼요. 영어 할 줄 아시죠? 해외여행 처음 아니시죠? 꼭 항공사 부스 찾아가서 말씀하셔야 해요."
인천공항에서부터 항공사 직원 아저씨께서 몇 번이고 당부하신다. Priority 글씨가 큼지막하게 적인 택도 가방에 붙여주신다. 왜 나보다 더 불안해하시는 것 같을까. 나는 오히려 마음의 준비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안 그래도 토론토 공항 약 한 시간 경유가 불안했는데 연착이, 그것도 30분 이상 되었다. 정말 경유지에서 다시 표를 끊고 하루 밤을 지내야 하는 걸까? 사실 짐이 별로 없었으면 상관없는데, 아니 오히려 좋았을 수도(?) 있겠는데 23kg 가방 두 개와 노트북 2대를 들고 호텔을 다녀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나저나 공항 픽업 나와준다던 선임 인턴 선배한테 연락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새벽 1시 17분. 피곤한데 잠이 안 온다. 허리가 아프다. 창 밖은 온통 자줏빛이다. 말 그대로 자줏빛. 꼭 누군가 빛을 쏘고 있는 것 같다. 무용지물일 것을 알면서도 카메라로 찍어보지만 역시나 담아지지가 않는구나. 그 하늘 아래로는 폭신한 구름이 펼쳐져 있는데 꼭 자줏빛 카펫 같다.
결국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 그래도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마음은 그럭저럭 평온하다.
착륙 전 승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내리면 직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 서있던 아무 직원이나 붙들고 물어보니 무전을 쳐준다. 역시나 비행기는 나를 이미 off승객으로 지정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가보지만 이미 보드에는 departure 글씨가 깜빡이고 있었다.
인포메이션에 가서 새 표를 받고 입국심사를 받으니 이제 호텔 안내를 받으러 가라고 한다. 일단 짐을 가지러 갔다. 다시 한번 23kg 가방 두 개에 노트북 가방 두 개를 들고 숙소와 공항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 한숨이 난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짐이 안 나온다. 물어 물어 baggage claim 부스에 가서 또 한참 기다리니 짐은 내일 바로 아바나로 보내준단다. 입국 심사할 때는 밑에서 짐 찾아가라고 했는데 누구 말을 들어야 하나. 일단 알았다고 하고 마지막으로 다시 가서 살펴봤지만 내 짐은 없다. 그냥 baggage claim 부스의 선한 인상의 직원을 믿기로 했다.
숙소 바우처를 받아 또 30분을 기다려 셔틀을 타고 숙소에 가니 오늘 연착이 많았는지 체크인 줄이 참 길다.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방을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긴긴 기다림의 피로를 한 방에 날려버릴 만큼 방이 깔끔하고 좋다. 저녁을 먹으러 갈까 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씻고 푹신한 침대로 쏙 들어간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생각 말고 잘 쉬기로 마음을 먹는다.
중간중간 자주 깼다. 오래 자지는 못했어도 이불의 포근함과 따뜻함이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몸이 이상하게 힘들더라니 눈치 없게 터진 생리는...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저녁을 안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파서 바우처에 포함되어 있던 점심 쿠폰을 바꿔 아침 뷔페를 먹으러 갔다. 하루에 한 편 있다는 아바나행 비행기는 오후 6시 55분 출발. 점심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확실치 않기에 열심히 먹어뒀다. 빵을 토스트 기계에 넣었는데 왜인지 걸려서 작은 불이 났다(원치 않은 시선집중...!) 직원 아저씨가 와서 빵을 빼주셨는데 탄내가 많이 났다. 안 그래도 잘 빨개지는 내 얼굴은 아니나 다를까 홍당무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아바나의 밤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깜깜하고 불 빛은 거의 없는 것이 인상적이다. 오후 6시 55분 아바나행 비행기는 오후 7시 40분 출발로 지연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도착시간도 오후 10시 20분에서 오후 11시 5분으로 변경되었다. 기다리고 있을 선배에게 미안해진다. 그리고... 내가 정말 피곤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옆, 뒤 자리의 프랑스 가족 때문에 너무 힘들었겠다. 거의 기절하듯이 자다가도 나한테 귀에다 대고 말하는 줄 알고 몇 번을 깼다. 프랑스어도 계속 들으니까 듣기 싫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멜리아를 보며 싹텄던 프랑스어 로망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여행이 얼마나 기대되길래 그랬나 싶어 내리기 전 쿠바 여행 즐겁게 하시라고 인사를 했다. 그렇게나 재잘대던 뒷자리 다섯 살 꼬마가 수줍게 웃어 보인다.
무사히 도착한 수하물을 찾아 픽업 나온 선배와 만나 일단 일주일 동안 묵을 집으로 출발했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힌다. 최대한 빨리 짐 찾고 나온다고 나온 건데도 숙소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선배한테도 그렇고 집주인 아주머니께도 그렇고 이래저래 죄송한 마음이 크다. 그리고 그만큼 감사하다.
밤에 정신없이 도착해서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쿠바 분위기는 어떤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러다가 다음 날 아침에 테라스에서 본 풍경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