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닮은 20세기 클래식 음악 4선
어떤 음악을 들으면 이상하게도 그 음악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 저절로 떠오를 때가 있지 않나요?
최근 음악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마치 꽃잎이 천천히 떨어지는 듯한 순간을 마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문득 꽃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음악을 추려 봐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중 네 곡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1. 모리스 라벨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우아하고 애잔한 선율로 유명한 이 곡은 원래 피아노 독주곡으로 발표되었고, 1910년에는 라벨 자신이 관현악으로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곡의 제목만 보면 실제로 어떤 왕녀를 기리는 듯하지만, 라벨은 특정 인물을 추모하는 의도가 아니라, 스페인 궁정에서 어린 공주가 추었을 법한 파반느 춤을 상상하며 작곡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그가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에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인지 이 곡은 고요하고도 섬세한 분위기 속에 과거 어느 시대의 우아한 궁정 풍경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곡의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멜로디를 듣다 보면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안개꽃이 떠오릅니다. 안개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은은하게 밝혀주는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곡은 과도한 감정 표현 없이도 깊은 감동을 전하며 듣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집니다.
2. 장 시벨리우스 - 봄의 노래
1894년에 작곡된 시벨리우스의 <봄의 노래>(Vårsång)는 원래 '즉흥곡'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겨울의 긴 침묵을 깨고 찾아오는 봄의 생동감과 생명의 강렬함이 고스란히 느껴지지요. 이 곡을 들으면 마치 눈 녹은 들판에 노란 수선화가 가득 피어나는 광경이 떠오르면서 마음속에 따스한 온기가 번지는 게 느껴집니다. 눈 덮인 들판과 봄꽃이 동시에 생각나는 묘한 작품이에요.
3.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본디 영화음악을 주로 썼던 작곡가 코른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화 음악 작곡을 관두고 다시 본격적으로 순수 음악에 집중하기로 다짐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런 결심 이후에 처음으로 쓴 작품이었지요. 코른골트는 성공한 영화 음악가를 '할리우드에 영혼을 판 사람' 취급하는 세간의 편견에 상처를 받았고, 그보다 어린 시절에는 비평가들이 "쟤 음악은 쟤가 비평가 율리우스 코른골트의 아들이라서 연주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에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정말 뛰어난 생동감과 장인정신이 담긴 작품을 만들어, 스스로를 제대로 증명해보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렇게 나온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의 말대로 아주 강렬한 작품입니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에게 헌정된 이 협주곡은 이전에 그가 영화 음악에서 썼던 멜로디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 곡의 화려하고 열정적인 바이올린 선율은 마치 탐스러운 장미꽃을 떠올리게 합니다. 장미가 사랑과 열정을 상징하는 꽃이라는 건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코른골트의 협주곡 역시 그런 장미처럼 강렬한 색채와 낭만성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4. 사무엘 바버 - 녹턴 Op. 33
밤에 듣는 걸 추천하는 곡입니다!
1959년에 작곡되었고, '존 필드에게 바치는 오마주'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녹턴 형식을 창시한 아일랜드의 작곡가 존 필드에게 경의를 표하며 만든 곡이지요. 이 곡의 은은하고 몽환적인 선율은 백합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귀함과 순결함, 우아함의 상징인 백합은 그 고요한 아름다움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바버의 녹턴 또한 그 같은 이미지로 조용하지만 깊은 감동과 함께, 마치 밤공기 중 스며든 은은한 향기를 맡는 듯한 평온함을 선사합니다.
다음번에 음악을 들을 때는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 곡이 꽃이라면 과연 어떤 향기를 지니고 있을까?
음악이 피어내는 선율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에도 한 송이 꽃이 피어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