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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20. 2018

[몽상] 슈퍼소닉, 오아시스의 화양연화


그 누구보다 진하게 앓은 화양연화.
기어코 폭발하는 샴페인처럼!


이 두 문장은 내가 영화 <슈퍼소닉>에 대하여 왓챠에 남긴 감상평이다. 내게 <슈퍼소닉>은 두 개의 단어로 집약된다. 화양연화, 그리고 샴페인. 두 단어가 지닌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유한성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라는 의미의 화양연화를 형상화한다면, 샴페인의 마개를 따는 순간 벌어지는 작은 폭발이 아닐까. 유한하며 유일하기에 더욱 찬란하게 반짝이는 순간. <슈퍼소닉>은 90년대 그 자체였던 영국의 락밴드 오아시스의 화양연화를 담고 있다.


영화 <슈퍼소닉>은 1996년까지 오아시스의 일대기를 다룬다. 노엘과 리암 갤러거 형제를 주축으로 1994년 데뷔한 오아시스는 전세계적 음악 신드롬을 일으키고, 1996년에는 넵워스 공연을 통해 이틀간 25만 명의 관중을 운집한다. 당시 영국 인구 20분의 1이 예매를 시도한 이 공연은 오아시스라는 밴드의 한 정점으로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영화는 공영주택 단지의 꼬마들이 90년대 세계 최고의 밴드로 성장하는 과정을 최고의 음악과 함께 보여준다. <Definitely Maybe>와 <Morning Glory>의 아름다운 곡들이 만들어지고 불리우는 동안, 그들은 어떤 삶을 거쳐왔는가. 그 짧지만 화려하게 타올랐던 시간들을 아는 것은 왜 중요한가. 왜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는 가슴이 벅차오를 수밖에 없는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지금부터 해보려 한다. 물론, 오아시스 최고의 노래들과 함께.
 

Supersonic, 오아시스의 정체성


매일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어요? 아니잖아요. 다 한때예요. 최선을 다해 즐겨야 해요, 우리가 그런 것처럼. / 21살에게 프로답길 바라면 안 돼. 대체 무슨 소릴 떠드는 거야? 초음속으로 나는 기분인데 9시 반에 자라고? 진토닉을 달라는데 10시 반에 자라고? 꺼지라 그래.


영화의 제목 'Supersonic'은 동명의 곡 'Supersonic'으로부터 이름을 따왔다. 오아시스의 데뷔곡이기도 한 이 곡의 제목의 의미는 '초음속'. 가사는 다음과 같다.


I need to be myself
난 내가 돼야 해
I can't be no-one else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어
I'm feeling supersonic
초음속으로 나는 기분이야
Give me gin and tonic
진과 토닉을 줘
You can have it all
다 가질 순 있지만
But how much do you want it?
얼마나 원해?
(...)
You need to find a way for what you want to say
하고 싶은 말을 할 방법을 찾아야 해
But before tomorrow
내일이 오기 전에

데뷔곡이자 첫 히트곡으로서 'Supersonic'은 오아시스라는 한 밴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무표정한 젊음의 반항과 직설이 그것이다. 리암이 말한 것처럼, 90년대의 오아시스는 "빌어먹을 페라리" 같아서 "보기도 좋고 성능도 좋고 너무 빨리 몰면 멋대로 튀어나갔다." 투어를 다닐 동안 호텔 방을 부수고 다녀서 네덜란드에서 입국 금지령을 받을 정도로 악동이었고, "마약은 차 한 잔과 같아서 모두가 한다"고 말해서 정치판의 뭇매를 맞기도 했지만, "팬들이 주는 상은 모두 소중해"라며 팬들을 누구보다 아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록앤롤 스타지만 우리 곁에 있던 모두가 이뤄낸 일이라며 팬들을 아끼던 두 형제. 그것이 오아시스의 정체성이었다.

여섯 명이 중국음식을 먹는 동안 노엘 갤러거가 완성했다는 'Supersonic'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초음속으로 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MTV 세대의 모든 청춘들이 이 노래에 열광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오아시스는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에 솔직한 젊음의 감정을 얹어 꾸밈없이 노래했고, "공영주택 단지 출신의 정신나간 두 형제"는 그렇게 세계 최고의 밴드가 되었다.

Live Forever, 순간의 영원성
그 앨범의 곡들은 정말 특별해. 내 곡들이라서 그렇다는 게 아니야. 난 쓴 것 뿐이고 우린 연주한 것 뿐인데, 그 후로 수백만 명이 지금까지 그 노래들을 부르고 있어. 그래서 그 곡들이 특별한 거지.


Lately did you ever feel the pain
요새 아픔을 느껴본 적 있어?
In the morning rain
아침 빗속에서
As it soaks you to the bon
뼛속까지 흠뻑 젖으며
Maybe I just want to fly
어쩌면 그냥 날고 싶나봐
I want to live I don't want to die
살고 싶어서 죽기 싫은가봐
Maybe I just want to breath
어쩌면 그냥 숨쉬고 싶나봐
Maybe I just don't believe
어쩌면 그냥 믿기 싫은가봐
Maybe you're the same as me
어쩌면 너도 나와 같을지 몰라
We see things they'll never see
우리가 보는 걸 아무도 못 보잖아
You and I are gonna live forever
너와 나는 영원히 살거야

"오아시스는 반 년에서 일 년만 할 생각이었어. 곡은 나 좋으라고 그냥 썼던 거고. 그러던 어느날 밤 어떤 곡을 쓰면서 모든 게 변했지. 명곡인 걸 알 정도의 음악적 지식은 있었지. 얼마 안 가 한 곡이 또 나왔어 터지기 시작한거야. 눈치챈 사람이 없었을 지 몰라도 그때 시작됐어." 노엘 갤러거는 'Live Forever'을 완성한 어느 날을 이렇게 회고한다. 실제로 이 곡은, 오아시스의 명반으로 꼽히는 1집 <Definitely Maybe>에서도 가장 많은 찬사를 받는 곡 중 하나다. 멜로디도, 가사도,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내가 오아시스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결코 비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래는 직설적이고 때로 반항적일지언정 희망과 낙관을 결코 놓지 않는다. 'Live Forever'는 그 대표적인 곡이다. 이 곡을 설명하면서, 노엘 갤러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참 그런지가 대세였을 때 쓰였죠. 그리고 전 기억해요. 너바나 노래 중에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라는 제목의 곡이 있던 것을요… '흠, 나 그딴 지랄 같은 건 안 할래'라고 생각했죠…아이들이 그런 헛소리를 듣고 앉아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오아시스는 인생의 고통을 이해할지언정, 그것을 우울 혹은 비관과 직결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살아가야 한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록스타는 흔치 않았고, 나는 오아시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Live Forever'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 곡이 '순간의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엘 갤러거는 이 곡이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내게 이 곡의 후렴구인 'You and I are gonna live forever'은, 오아시스가 스스로에게 바치는 헌정사처럼 들린다. 긴 인생의 한 점에 불과한 어느 영감의 순간에 만들어진 곡이,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리운다는 사실이 너무나 뭉클하기 때문이다. 그건 오아시스에게도, 오아시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축복같은 일일 테니까.


Champagne Supernova, 빛나던 시간들
날 포함해 오아시스 멤버 누구든 세계 최고였다고 할 순 없어. 하지만 모두 함께라면 말로 못 할 어떤 감정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지. 여전히 보드워크에서 연주하던 그 밴드였고 옷도 똑같은 걸 입고 있었어. 불붙듯이 뜨거운 날들이었어. 그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했었지. 사람들은 그때 느낀 감정들을 잊지 않아. 밴드와 관객 사이엔 화학작용이 있지. 서로에게 끌리는 자석 같은 거야. 사랑, 분위기, 열정, 격정, 관객에게서 오는 즐거움들. 어쩌면 그게 오아시스였는지 몰라.


How many special people change?
특별한 사람들은 얼마나 변할까?
How many lives are living strange?
희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Where were you while we were getting high?
우리가 취해 갈 때 넌 어디 있었어?
Slowly walking down the hall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어가
Faster than a cannonball
포탄보다 빠르게
Where were you while we were getting high?
우리가 취해 갈 때 넌 어디 있었어?
Someday you will find me
언젠가 날 찾아내겠지
Caught beneath the landslide
무너진 흙더미 아래
In a champagne supernova in the sky
하늘에 뜬 샴페인 초신성 속에서
Someday you will find me
언젠가 날 찾아내겠지
Caught beneath the landslide
무너진 흙더미 아래
In a champagne supernova
샴페인 초신성 속에서
A champagne supernova in the sky
하늘에 뜬 샴페인 초신성 속에서

찬란했던 그들의 전성기는 1996년 8월, 넵워스 공연으로 정점에 이른다. 그때까지 늘 자신만만하던 노엘 갤러거는 넵워스에서 공연하던 순간 처음으로 "겁이 났다"고 말한다. 양일간 30만 명이 자신들을 보러 오는, 2년 반 된 밴드에게는 너무나 큰 규모의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오아시스가 넵워스에서 'Champagne Supernova'를 공연하던 순간을 낱낱이 보여준다. 폭발하는 기타 소리, 리암 갤러거의 눈빛, 끝이 보이지 않는 관중들, 터지는 폭죽들, 그리고 인사하는 오아시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오아시스 밴드 인생의 한 정점이었다.

1994년 데뷔해 2009년 해체하기까지, 오아시스가 거쳐온 긴 역사 중에서 영화는 그들의 가장 젊은 시절에 주목한다. 그리고 밴드의 정점이었던 넵워스 공연과 함께 막을 내린다. 오아시스의 전기영화로서 <슈퍼소닉>이 1, 2집이 나왔던 90년대 중반에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은 영화의 지향점 혹은 가치관을 드러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밴드의 가장 찬란했던 한때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영구히 박제해 놓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도달하고자 했던 지점은 아니었을까. 그때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 는 사실을 잊는 것만큼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제 명확하게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90년대의 오아시스, 넵워스에서의 오아시스는 왜 나를 언제나 가슴 벅차게 할까. 그것은 그 당시의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인생의 반짝이는 한 순간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8월 10일, 넵워스에 있었던 수십만 명의 관중은, 무대 위에서 Champagne Supernova를 공연하던 오아시스는, 인생의 유한하며 유일한 화양연화를 살고 있었다. 그건 오아시스라는 한 밴드 인생의 화양연화였을 뿐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한 시대의 화양연화일 수도 있었다. 번역가 황석희가 말한 것처럼, 넵워스 공연은 "인터넷 시절 이전 대중문화 최후의 대집결"과도 같았으니까. 넵워스 공연은 그야말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MTV 세대의 장대한 피날레는 아니었을까. 샴페인이 폭발하는 순간처럼, 굉음과 함께 타오르던 불꽃처럼.
 

가끔 생각해, 왜 겁이 났을까? 넵워스에 선다고 해도 록스타가 되는 것뿐인데. 이건 우리 모두가 이룬 일이야. 그런데 뭔가의 시작이라기보단 끝이라는 기분이 들었어. 넵워스에 가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은. 우린 최후의 밴드이자 가장 위대한 밴드였어. 오아시스 같은 대형 밴드는 다신 불가능해. 디지털 이전 시대였고 오디션 리얼리티 쇼도 없던 시절이었어. 의미있던 것들이 더 많았고 살기 좋은 시대였어. 오아시스에 있기에도 좋은 시대였지. 넵워스 공연은 인터넷 탄생 이전 마지막 대결집이 아니었나 싶어. 더는 그런 일이 없는 게 우연이 아니야.우리가 살던 시절은 되풀이되지 않을 거야. 우린 그 점을 걱정해야 돼. 지금부터 20년 후엔 어떻게 되겠어?


오아시스는 한 세기가 끝을 향해 가던 90년대의 유일무이한 록스타였고, 그들의 해체는 우리 모두가 거쳐온 어떤 시간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아시스가 넵워스 공연을 통해 음악 인생의 최정점을 찍으면서도 무언가의 끝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헤드의 말이 더욱 뭉클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땐 더 큰 환호를 받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인사는 우리가 해야 했어요. "고마워요 와줘서 모두 고마워요." "우린 오아시스였어요 좋은 밤 되세요.""

이제 90년대는 흘러간 시대가 되었다. 오아시스는 해체했고, 21살의 객기를 부리던 악동 리암 갤러거는 목소리가 조금 날긋하게 닳았으며, 그들 각자가 운영하는 밴드가 넵워스 규모의 관중을 동원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10대 초반부터 오아시스를 듣던 나는 20대가 되었고, 그동안 오아시스를 모르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때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던 수십만 명의 관중이, 그때 거기에 있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오아시스의 1, 2집을 듣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흘러간 시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2018년의 어느 여름,
몽상 담.

가사와 대사 출처_<슈퍼소닉> (황석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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