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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26. 2018

[서룩]취향의 쉼표를 찍을 때 취향의 여행, 강릉 바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할 곳이 있고,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담쟁이를 하면서, 쓸 주제를 고민하고, 좋아하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글로 정리해보고, 어떤 부분이 나의 ‘취향저격’을 했는지 깨닫는 과정은 늘 즐겁다.
   하지만 크게 몇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지는, ‘나의 취향인 것’을 들여다보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바라보며 곱씹어야 하는 과정이 지칠 때가 있다. 머릿속에 ‘취향저격’을 담당하는 부분을 활성화시키려면 계속해서 무언가를 보고, 읽고, 경험하고, 그 무언가에 자극당하는 나까지 보아야 하는데, 그런 것 다 모르겠고 마냥 놓아버리고 침전하고 싶을 때가 가끔 찾아온다. 다행히 담쟁이는 5명이 함께 하고 각자 한 달에 한 번 글을 쓰기 때문에 그런 순간이 와도 재빨리 수면 밖으로 튀어나오면 그만이지만,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나의 글이 올라가야 하는 주와 겹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 주 취향 백지 상태를 모면하기 위해, 오히려 백지 상태였기 때문에 가장 나의 취향다웠다는 변명을 좀 해 보면서, 최근에 한 여행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놀랍게도 아무 내용 없고 아무런 말이니 여러분도 아무 생각 없이 읽어주시길. 이번 주는 다 같이 백지 상태가 되어 보는 거다.

쉼표 1, 바다

  2년 만에 강릉을 찾았다. 2년 전에도 이번에도 폭염이었다. 경포호수 둘레를 택시를 타고 돌아보면서 아아 저기 무작정 걸었지, 무슨 생각이었나 몰라, 같은 말이나 하면서 경포대 앞 호텔로 들어섰고, 2박 3일 동안 경포대 앞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식사도 두 끼만 빼고 전부 경포대 부근에서 해결했다. 코앞이 바다였지만 물놀이를 하지도 않았다. 호텔에 누웠다가 느지막이 밥을 먹고, 카페에 가서 몇 시간씩 앉았다가 또 밥을 먹고, 해가 뉘엿뉘엿해져서 더위가 한풀 꺾일 즈음에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또 하염없이 보다가 다시 호텔에 들어왔다. 몸도 마음도 혹사당할 데 없이 밥 먹고 쉬고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낸 2박 3일 동안 한 생각은 바다 하나는 질펀하게 보고 간다, 였다. 동행자는 딱히 그런 것 같지 않다고 말했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물 색깔을 보고, 바닷바람을 된통 맞으면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게 꽤 좋았다.

호수와 바다를 한눈에 담기

경포해변, 낮

경포해변, 밤

  고백하자면 눈앞의 풍경에 크게 감동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감탄하고 사진을 연발할 때면 내가 뭘 몰라서 그렇지 못한가 속으로는 괜히 불안해하면서 진짜 좋다, 하고 맞장구를 치기도 한다. 어느 바닷가에 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이 날의 경포해변은 2년 전의 강릉 바다보다 훨씬 파랬고 조용했고 다정했다. 동행자의 일관되고 익숙한 선곡을 들으면서 폭죽 터지는 경포해변에 앉아있던 순간이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

쉼표 2, 동틀 무렵

  이상하게 여행을 가면 무조건 일찍 일어나곤 한다. 비몽사몽 해가 뜨는 걸 보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그대로 아침을 맞기도, 다시 잠들기도 한다. 방은 아직 어둑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와중에 계란 노른자가 터지는 것마냥 빨갛고 노랗게 해가 퍼진다. 이번 여행 두 번의 아침을 모두 그렇게 맞았다.

아침보다는 저녁 어스름 같던 첫 날 아침 오전 4시 49분. 수평선이 벌겋게 타올라서 정말 바다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졸린 와중에 사진을 찍고, 새벽에 창문 너머로 찍는 사진은 저 장관을 다 담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면서 몇 분을 구경했다. 혼자 보는 게 미안해 동행자를 깨워봤지만 일어나지 않았고, 정신 차려 보니 나도 다시 자고 있던.

수평선 위로 해가 동그마니 떠 있던 두 번째 아침의 오전 5시 28분.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했는데 어떻게 깼는지 모르겠다. 바다 위에 해가 낮게 떠 있는 풍경은 난생 처음이었고 새해 첫날마냥 힘찼다. 어떻게 담아보려고 초점을 계속 태양에 맞췄는데 빛이 강해서 자꾸 흐려졌다.


  여행지에서 혼자 일찍 일어난 아침은 아무래도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던 다른 순간들과는 결이 다르게 다가온다. 뜻밖의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 묘한 충족감을 주기도 하고, 시간이 완전히 멈춘 중에 홀로 남겨져 지독히 외롭고 무서운 감각을 깨우기도 한다. 나에게만 떠넘겨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까무룩 잠이 들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서, 불과 몇 시간 전이 꿈결처럼 낯설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로부터 훨씬 떨어져서 되돌아볼 때, 내게 주어져서 감사한 순간들이라는 감상이 짙게 핀다.

쉼표 3, 정말 쉼표의 시간들

  이번 여행의 동행자와는 늘 '힐링', '휴식'을 내세우며 여행을 계획한다. 특히나 이번에는 계획을 짜면서 생기는 아주 미미한 스트레스조차 용납할 수 없다고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자'를 유일한 계획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호텔에서 뒹굴며 영화를 한 편 봤고, 늑장을 부릴 수 있는 대로 부렸고, 정말 아무렇게나 시간을 죽였다. 굳이 강릉으로 여행을 가서 굳이 굳이 바다 앞의 유명한 카페에 들어가서, 네 시간을 앉아 오목을 두고 야구 게임을 했다.

  그게 조금 우습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한 야구 게임이 충격적으로 재미있었다. 평소처럼 떠들지도 않고, 열중해서 게임을 하다가 또 휙하니 호텔로 돌아갔다.
  폭염 경보가 매일 울릴 정도로 더웠지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더우면 나가기 싫으니까. 같은 횟집을 이틀 연속으로 갔다. 굳이 다른 곳을 가거나 알아보기 싫으니까. 여행의 모토를 이렇게나 철저하게 지킨 것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그만큼의 시간을 채워 넣는다는 느낌보다는 돌아왔을 때 그만큼의 시간이 사라져 있어서인 것 같다.' 돌아와서 일기에 쓴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오니 3일이 사라져있었고 어쩐지 기억은 여행 동안의 시간이 아닌 3일 전 캐리어를 끌고 집 밖을 나설 때에서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여행은 쉼표 하나로 일축되어서 3일 전의 어제 옆에 소심하게 찍힌 거다. 하루와 하루를 이어주는 척 하면서, 여행에서 완전 쉬어버린 나처럼 시간도 쉬어버렸다. 그렇게 쉼표를 찍어버렸으니 그 이후는 백지일 수밖에.
  급하게 변명하자면 '아무것도 안 한' 만큼, 지금의 내게 필요했던 나의 '취향'인 여행이었다. 변명에 좀 더 정성을 기울이자면, 쉼표를 찍을 때는 다른 글자를 쓸 때보다 훨씬 당찬 힘이 필요한 걸 아시는지. 연필을 좀 더 꽉 쥐어야 하고 손목의 스냅도 아주 야무지게 이용해야 한다. 취향을 말할 힘이 완전히 연소되어 갈팡질팡했지만, 어쩌다 보니 또다시 취향처럼 흘러간 여행을 힘찬 쉼표 삼아 새로운 백지를 내건다. 그러니까 여러분, 쉼표 이후를 지켜봐 주시길. 제대로 써 보일 테니까.






여름
사진을 쓰는 걸 허락해준,
편안한 동행자 소정에게 감사를 전하며
서룩 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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