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쟁이 Aug 18. 2018

[서룩] 내가 곱씹는 '플로렌스 앤 더 머신'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겨울, 학교와 집을 오가면서 듣던 노래가 있다. 영국 인디록밴드 '플로렌스 앤 더 머신(Florence+The Machine)'의 'Cosmic Love'이다.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앨범 커버가 신선해서 들어본 노래는 웅장한 사운드를 좋아하는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 버렸고, 수험 생활 내내 PMP 한 구석에서 재생되곤 했다.

플로렌스 앤 더 머신은 밴드 이름처럼 그야말로 보컬 플로렌스와 기타, 드럼, 하프 등의 세션들이 모인 밴드이다. 대학 시절 플로렌스 웰치가 이사벨라 서머스(키보드)와 '플로렌스 로봇 앤 이사 머신'이라는 농담같은 이름을 시작으로 결성되어, 2009년 정식 데뷔 이후 뛰어난 음악성과 감각적인 뮤직비디오 등으로 수많은 호평을 받으며 활동 중이다.

  데뷔한 지 10년 즈음이 되어가는 밴드지만 지금껏 세 장의 정규앨범이 발매되었고, 가장 최근 것은 2015년에 나왔다.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면 마지막 앨범 연도를 따지면서 새 앨범을 기다리는 편이지만, 이 밴드는 '때 되면 알아서 나오겠지' 라는 마음으로 몇 년 전의 노래들을 닳도록 듣는다. 그도 그럴게, 꾸준히 반복재생을 해도 늘상 벅찬 노래들 뿐이니까! 그래서 이 글을 기회로, 내가 '닳도록 들어대는' 플로렌스 앤 더 머신의 노래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1. Cosmic Love [1집 'Lungs']

이 앨범 커버가 아니었다면 플로렌스 앤 더 머신을 지금 알고나 있었을까?


  1집 'Lungs' 의 수록곡 'Cosmic Love'는 묘한 앨범 커버와 어울리는, 뚜렷한 색깔이 돋보여 귀를 사로잡는 곡이다. 내게 이 노래의 첫인상은 '꿈꾸는 것 같다'였다. 커튼에 기대어 잠자듯 눈을 감고 있는 플로렌스 웰치의 사진 때문일까? 후렴마다 터지는 드럼과 잔잔하게 깔리는 하프 선율을 들으면 우주를 여행하는 꿈을 꾸는 기분이다. 노래의 시작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하프는 별이 내는 소리,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드럼은 폭죽처럼 터지는 밤하늘의 불빛 쯤. 추상적인 가사도 이러한 감상에 한 몫 한다.

별똥별 하나가 당신의 심장에서 떨어져 나와 내 두 눈에 들어왔네요
나는 크게 소리쳤죠, 그게 두 눈을 뚫고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건 내 눈을 멀게 했죠

별들과 달, 그것들은 모두 빛이 나가 버렸어요
당신은 날 어둠 속에 남겨뒀어요
새벽도 없고, 낮도 없고, 난 항상 이 황혼 속에 있네요
당신의 심장 그림자 속에서

  달도 별도 없는 '당신'이라는 어둠 속에서 나 혼자. 또 결국은 나도 어둠이 되어 당신과 둘이서 어둠 속에 남는다.  꿈결 같은 이 노래의 가사는 실제로 플로렌스 웰치가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로 썼고, 제목에도 큰 의미가 없다고 한다. 꿈꾸는 듯한 상태로 쓴 가사가 맞긴 맞다!
  몽롱한 사운드, 가사와 달리 보컬의 목소리는 무척 단단하다. 단단하면서도 섬세하다. 플로렌스 웰치는 그 목소리를 듣다 보면 현혹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팬들 사이에서  '마녀'라고 불리기까지 하는데, 실제로 달콤하게 속삭이다가도 백밴드보다 더 웅장하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듣다 보면 어딘가 설득당하는 기분이다.
   특히 이 노래에서는 환상과 불빛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중에 혼자 꼿꼿이 서서 눈 똑바로 뜨고 노래하는 느낌을 준다. 실제 뮤직비디오에서 눈을 감은 채 미친 것처럼 춤을 추는 플로렌스는 총천연색의 빛에 휩싸여 있는데, 중간중간 치켜뜨는 눈은 정확하게 앞을 주시한다. 단풍에 가려진 어둠, 즉 당신의 심장 그림자 속에서 나의 심장을 꺼내고, 당신의 존재가 만들어 낸 소우주를 바라보면서 끝나는 영상은 당신으로 이어지는 현실과 환상의 교차점을 짚는다.


2. What the Water Gave Me [2집 'Ceremonials']

   1집의 Cosmic Love 등이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었다면, 2집은 전체적으로 고딕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2집은 플로렌스 웰치가 대학 교수였던 어머니의 강의를 듣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활동 당시 플로렌스 웰치의 의상 또한 고딕풍의 무겁고 진지한 드레스였다.
  '물'은 플로렌스 앤 더 머신의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데, 이는 거의 모든 곡의 가사를 전담하는 플로렌스 웰치가 어렸을 적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건의 영향이라고 한다. 물에 압도되었던 기억, 깊은 저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깨달은 경험이 강렬하고 어두운 음악 세계를 만들어냈다.
  '물'과 관련된 노래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What the Water Gave Me'는, 위의 설명을 가장 잘 대변하는 곡이다, 이 곡은 돌이 든 주머니를 옷에 매달고 강에 빠져 자살한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것으로, 죽음이 턱끝까지 치달은 사람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오, 불쌍한 아틀라스여
세상은 짐을 힘겹게 이고 가는 짐승과 같아요
당신은 오랜 세월을 버텨 왔죠
이 모든 갈망,
그리고 배들은 녹슬 때까지 버려졌어요
그것이 물이 우리에게 준 것이죠

그러니 나를 눕히세요
오직 소리만이 존재하도록 해 주세요
흘러 넘치는 물이 되세요
돌을 가득히 채워넣은 주머니

  물에 뛰어들기 전의 유언 같은 가사는 반복적인 사운드, 몇 겹의 코러스와 함께 폭포처럼 쏟아진다. 후렴이 귀에 한 번에 꽂히지는 않지만, 가만히, 또 거칠게 대사를 읊는 듯한 목소리는 묘한 집중력을 일으킨다. 괘종시계라도 울리는 듯한 장엄한 사운드는 어딘가 장송곡 같기도 하고, 강에 빠질 것을 선언하다 못해 설득하는 듯한 목소리를 듣다보면 살아있는 자를 꾀는 세이렌 같기도 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뛰어들 것 같은 충동이 든다는 이과수 폭포가 눈앞에서 쏟아진다.

3. No Light, No Light [2집 'Ceremonials']

  2집의 음울하고 장엄한 분위기는 다른 곡에서도 이어진다. 'No Light, No Light'은 나지막한 드럼 사운드로 귀를 사로잡고, 반전처럼 터지는 후렴으로 비장하고 영적인 느낌을 준다.


당신은 내 머리 속 구멍, 당신은 내 침대의 공허함
당신은 우리 사이의 침묵, 내가 생각했던 것, 말했던 것들
당신은 밤의 공포, 당신은 깨끗한 아침
모든 게 끝났을 때 당신은 시작 그 자체
당신은 나의 머리, 나의 마음

당신의 반짝이는 푸른 눈 속 빛은 사라져, 사라져
일광이 이토록 잔혹할 수 있는지 나는 몰랐어
하루의 빛 속 찬란한 계시
무엇을 남기고 스러지게 할 지 당신은 선택할 수 없어

  '당신'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곧 '나'이다. 당신, 즉 나는 어떤 희망도 없이 스러져 가며, 스스로에게 해결책을 촉구한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나를 떠나고 싶니?' '뭘 원하는 지 말해봐' 라고 묻는 것, 눈 속의 빛이 사라진다고 반복하는 것,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주어진 선택지는 죽음 뿐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계시, (...) 그러나 오늘 밤에는 가질 수 없어' 의 구절은 죽음이라는 유일한 선택지 앞에서 망설이고 갈등하는, 누군가 방아쇠를 당겨 주기를 바라며 어둔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절망자를 그린다.
  이를 오히려 경건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은 묘한 느낌을 준다. 마치 죽음만이 유일한 구원이듯, 숭고한 결정, 정해진 운명이듯, 가만히 꾀는 듯한 목소리로 죄스러움과 절망은 모두 사라지고 어둠 속에 안식이 찾아옴을 예고한다.


4. How Big, How Blue, How Beautiful [3집 'How Big, How Blue, How Beautiful']

3집 'How Big How Blue How Beautiful'은 1,2집과 달리, 트레이드 마크 격이었던 하프와 드럼 사운드를 줄이고 브라스 소리를 강조했다. 이 때문인지 물론 기존의 느낌을 좋아하던 일부 팬들이 돌아서기도 했지만 무겁고 웅장하던 분위기는 줄어들고, '소화하는 데 부담이 덜해지게' 되었다. 더불어 1,2집이 모호한 꿈 속에 머물렀다면, 3집은 꿈을 꺠고 현실에 닥쳐 살아숨쉬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앨범 타이틀과 제목이 같은 곡인 'How Big How Blue How Beautiful'은 LA의 넓은 하늘과 바다, 지평선을 토대로 만들어진 곡이다.

모든 도시들은 선물이었고
모든 지평선은 입술 위의 키스 같았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소원을 빌었어요
그 모든 지평선에서

우린 이제 뭘 해야 할까요?
우리는 문을 열었고, 이제 모두 들어오게 될 거예요
당신도 보인다고 말해 주세요
우리는 눈을 열어 바뀌는 세상을 봐요
우린 이제 뭘 해야 할까요?
우리는 문을 열었고, 이제 모두 들어오게 될 거예요

넓고, 파랗고, 아름다운...
넓고, 파랗고, 아름다운...
넓고, 파랗고...

  클라이막스의 웅장하게 이어지는 트럼펫은 판타지 영화 속 승리를 거머쥔 군대라도 등장할 것처럼 힘차고 희망적인데, 플로렌스는 이 부분이 '사랑에서 느끼는 기분과 가장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 부분까지 이르면 바다 위의 벼랑 끝에 꼿꼿이 서서 알 길 없는 승리감에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파랗게 펼쳐지는 풍경에서 웅장함, 우울함,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며 당신과 나는 세상 앞에 선다. 여러 감정이 일렁이고, 푸른 미지는 작은 몸을 압도하고, 불투명한 것 투성이지만, 트럼펫 소리는 끊기지 않고 올라간다. 마치 사랑이 모든 것들의 답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서룩 담

작가의 이전글 [유월] 세상에 없던 이야기, 김동식 소설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