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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Sep 28. 2018

[재인] 어떤 무드, 김사월의 숨

비가 왔다. 한 시간을 내리 걷는 동안, 나는 이따금 멈춰서야 했다. 휴대폰 창에 적힌 몇 줄의 가사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의 신보를 다 듣고, 몇 곡은 다시 듣고, 한 시간을 나는 걸었다. 


홍대 망원 합정 상수 홍대
서로는 멀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예정 없던 산책에도 한 지하철 역에 도착하면, 도로의 녹색 표지판을 보고 다른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식으로 다음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지도 앱 한번 켜지 않고 건물과 표지판을 보면서 대충 넘겨짚고 걸어가도,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무난하게 닿을 수 있었다. 거긴 그렇게 좁은 곳인데, 참 얄궂게도 내가 지나는 길마다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었다. 여기는 타코를 먹고 좋아하던 가수의 전시회를 보러 갔던 걔, 우리는 이 사거리에서 병원 이름을 보고 웃었어. 여기는 행인이 부탁한 설문을 하고 있던 내 앞에 나타난 걔, 밥은 어떻게 무엇을 먹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서점에 들렀다 헤어졌어. 여기는 한 명 빼곤 기억도 나지 않는 걔네랑 술을 먹던 가게 즈음이고, 여기는 걔네와 합류하려 이미 취한 걸음을 종종대던 길목이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여기 참 가깝다, 라는 문장을 떠올리자 나는 눈물이 왈칵 터졌다. 당황스러웠다.   



처음, 숨                                                                        

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노래하는 김사월의 숨은, 이상하다. 처연하면서도 경쾌하고, 흐릿하면서도 농밀하고, 순진하면서도 신비롭고, 투박하면서도 세련됐다. 나는 늘 김사월의 목소리에 대해 보물이다, 아님 보석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사월은 자신의 기묘한 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숨이라는 자신의 악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방법도. 반주들이 알맞은 타이밍을 얌전히 기다리면, 그가 입을 연다. 그러면 온갖 감정을 소환하는 목소리가 꽃봉우리처럼 툭, 터진다. 그래서 나는 김사월의 도입부를 좋아한다.      


링크: https://youtu.be/fQ4fCF6VCxo

                                      

위 영상을 재생하고 10초 안에, 사월의 숨이 뱉어지는 순간 당신의 숨이 멎었다면, 당신은 완벽하게 아래의 글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이다. 그녀의 숨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어떤 모양과 어떤 질감을 하고 있는지. 자, 알고 싶지 않은가?     


                                             

설원의 입김, [7102]

"집으로 가면 너와 헤어질 테니 집에는 안 갈래"

                                                                                                        

[7102]는 내가 김사월을 접하게 된 앨범이다. 전 곡이 공연 현장에서 녹음된 라이브 앨범이자, 1집과 2집 사이에 있는 1.5집 격의 앨범이기도 하다. 2017을 거울로 비추는 존재로서 [7102]는, 김사월의 2017년을 있는 그대로, 그러나 뒤집어서 성실하게 기록했다. 라이브 앨범임에도 2017의 김사월을 담아내기 위해 12곡 중 10곡을 신곡으로 구성했고, 1집과 2집의 징검다리로서 12개의 트랙리스트를 역순으로 독해하도록 제목은 만들어졌다. 

[7102]에서 김사월의 숨은 설원의 입김을 닮았다. 너무나도 춥고 시린 공기 속에서, 애써 입김을 뱉어 보지만, 이내 공중으로 흩어지는 냉혹한 설원. [7102]의 곡들은 하나같이 절망하고, 냉소하고, 비관한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동시에 여전히 부질없다. 숨이 붙어 있는 설원의 생명이 필연적으로 온난한 입김을 낳아내는 것처럼. 그리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입김은 이내 증발해 설원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처럼. 처음에 나는 [7102]가 설원의 입김 같다고,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희망 다음은 언제나 절망이라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달아>에서는 '스스로를 미워하며/살아가는 것은 너무 달아/그걸 끊을 수 없다면/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라며 스스로를 미워하면서도 살아갈 방법을 묻기도 하고, <아주 추운 곳에 가서야만 쉴 수 있는 사람>에서는 '왜 태어났을까/나는 어디까지 살면 될까/나는 가치를 어디에도 두지 않는 것이 좋았다'며 살기 위해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을 방법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 대한 답을 주기는커녕, 여전히 끝없는 설원일 뿐임을 우리로 하여금 자각시킨다. 우리는 <짐>과 같이 '이제는 어떤 말도/모든 걸 나쁘게 만들어' 따위의 체념 섞인 원망에 빠진다. 최악의 상황에서 때로 기댈 곳이 없음은 물론이다. '도움 받으라는 도움이라도 좋아/나는 전화를 걸어/불쌍히 여길 사람이야/나뿐이겠지만' <전화>의 고독은 '너는 통화 중이겠지/내가 죽는 방법을 물어도/언제나 어디서나/통화 중이겠지' <어떤 호텔>에서 한층 심화된다. <마이 러브>에서는 '매일 생각해 난/내가 얼마나 망칠지'라고 불길한 예감을 드러내지만, '죽음을 함께한다는 게/샘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아'라는 <그녀의 품>에서는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죽는 것도 쉽지 않고,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설원이다. 급기야 <너무 많은 연애>에서는 '그저 잠들다가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것/말고는 바라는 것 없어'라고 토로하기에 이른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설원>의 '시간이 없다고 했죠/그래 시간이 없어서/마음껏 울 수 있을 것만 같아요'에서 드러나듯, 마음껏 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원에서, 눈물과 함께 새어나온 입김은 처절하고 축축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고 <8월 밤의 고백>은 밝힌다. '저는 그날 다 헤어졌기에/더 슬프진 않았어요/이미 그날 모든 눈물은/흘렸거든요'라며. 

달뜬 입김을 뿜으며 미리 흘려둔 눈물은, 우리가 어느 시절과 헤어지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 앨범이 발매된, 2017년의 가을이 그랬다. 희망 다음은 절망, 그러니까 우리는 무한한 절망의 설원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가을이었고, 그래서 하늘이나 낙엽보다는 [7102]에 심취해 있던 가을이었다. 그리고 [7102]를 백 번 정도 들었을 때, 어느새 나의 설원에는 하늘도 개고 낙엽도 굴렀다. 아시는지, 라이브 앨범의 재생 시간이 끝나듯, 죽지도 살지도 못했던 설원도 언젠가 대충은 갈무리된다는 것을.


먼지 혹은 연기, [수잔]

"여기까지 온 우리의 처지와 지금을 비관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장하고 멋졌는지"

                                                                                                            

[수잔]은 김사월의 정규 1집이다. 한 여성의 이름일 [수잔]은 김사월의 페르소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첫 곡이자 앨범의 제목인 <수잔>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나에게 이 앨범은 마치 하나의 인물, 예컨대 담배 가게 아가씨 같았다.

앨범은 '수잔, 소녀 같은 건/소년스러운 건/어울리지 않아/그저 네가 원하는/사람이 되기 위해서/넌 혼자 남는 걸'이라는 <수잔>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름다워>, <콧노래>에서는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태도를 가늘게 비꼰다. 아무도 수잔에 대해,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 섣불리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반의어에 해당하는 제목의 <악취>와 <향기>라는 곡이 같은 앨범에 공존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도망치는 건 이미 수준급/너와 함께 할 아침이 싫지만/오늘도 널 따돌리는 데 실패하고/네 품에 안겨 잠들겠지'라는 <새>의 가사처럼, 수잔은 알쏭달쏭한 사람이다. 수잔은 <존>에게 '지금의 내 감정을 이해할 이가/너뿐이라는데 유감이야'라고 말하고, <머리맡>에서는 '셀 수 없는 사람들이/진심이라 오해를 하며/갈망해왔던 너의 마음'이라고 말하며 이와 같은 인식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수잔 역시 <꿈꿀 수 있다면 어디라도>에서는 비장하게, <접속>에서는 '내 못난 마음/꿈에서는 다 용서해 주세요/너와 함께라면 내 인생도/빠르게 지나갈 거야'라고 애처롭게 기도하는 한 인간일 뿐이다. 그렇게 수잔이라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완벽히 이해될 수도, 해석될 수도 없는 대상으로 남는다. 

[수잔]을 부르는 김사월의 숨은 먼지 바람 같기도 하고 담배 연기 같기도 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먼지와 연기 따위의 것이 온통 희뿌옇고 매캐하기 때문이다. 찬장에 앉은 먼지는 고요하지만, 그것만큼 대상을 적당히 가리고 적당히 드러내며 우리를 잘 착각하게 하는 것도 없다. 붙잡히지도 쥐어지지도 않는 담배 연기는 불가해한 것,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매혹적이고 중독적인 것이다. 

[수잔] 역시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잔]은 담배 가게 아가씨를 떠올리게도 했다. 어딘가 오래된, 그러나 허무한 먼지나 연기로만 접할 수 있어 매력적인 사람. 앞서 말했듯, 어떤 언어로도 수식 불가능한 김사월의 숨 자체도 하나의 [수잔]이었기에 나는 [수잔]을 계속해서 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들을수록 뭐가 수잔이고 수잔이 무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이 앨범의 자욱한 무드에 둘러싸여 갈 뿐.

[수잔] 중, <콧바람>에서는 ‘처음 너는 한 여름의 새벽/오래된 음반 향기와/희뿌연 담배 연기’, <향기>에서는 ‘향수 비누 담배 땀내음/그 어떤 것도 아닌 너의 공기’라는 가사가 등장하는 것은 우연일까.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수잔]으로 인해 어느 담배 가게 아가씨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 텁텁한 공기를 맞는 기분이 묘하고도 참 좋았노라고,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감기 걸린, [로맨스]

"사랑보다 먼저 넌 나를 사랑하라 했잖아 너도 그거 못하잖아"

                                                                                                         

정규 2집 [로맨스]는 말 그대로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작이 [수잔]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꾸려졌다면, 이번 이야기의 축은 [로맨스]라는 테마다. 그리고 발매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뜨듯한, 그런 주제에 나를 [로맨스]하도록 만든 김사월의 신보이기도 하다.

[로맨스]에서 로맨스는 감기에 걸렸다. 이놈의 로맨스는 늘 투병 중이다. <로맨스>는 ‘내 마음 받으러 올래’라며 떼를 쓰지 않나, <그리워해봐>는 ‘우리만큼 우릴 잘 아는 그런 사람이 어딨어’라는 당치 않은 말로 구걸한다. <누군가에게>의 화자는 사랑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있다. <옆>이나 <엉엉>을 들으면 상처받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연인 혹은 각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결국 <오렌지>, <죽어>, <우리>, <키스>에서 사랑은 한없이 어두운 냉소와 자조,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달콤한 제목의 <연인이여>는 ‘어둠으로 우리 달려가봐요’라는 섬뜩한 제안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연인에게>는 새파란 글이 아니라 따스한 말을 믿겠다고 말한다. ‘세상에게 난 견뎌내거나/파멸하거나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또한 마찬가지다. 여전히 우리의 기억을 회상하며 다른 것도 아닌, ‘네가 건네준 1달러가 그저 돈이 돼버리는 게’, 네가 아니라, 로맨스도 아니라 바로 그게 너무 싫다고 고백한다. 감기 걸린 로맨스도 내칠 수 없어서 우리는 믿지 않는다면서 믿고, 주지 않겠다면서 주고, <프라하>처럼 다시 사랑한다.

그렇게 김사월의 숨은 이번에는 감기에 걸려서 돌아왔다. 떨어지지 않는 감기처럼, [로맨스]를 싫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차라리 감기약을 달고 살더라도, 짜릿한 감정의 일교차는 포기할 수 없기에. 환절기에 가디건을 챙겨도, 이 세상에 감기 바이러스가 없는 곳은 없기에. 과연 감기에 걸려 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로맨스]는 한편으로는 사랑을 증오하고 환멸하는 앨범이지만, 한편으로는 너와 나, 우리의 사랑이 없이는 절대 쓰일 수 없는 서사이기도 하다. 

[로맨스]가 더욱 와닿는 것은, 그것이 고작 감기 걸린 숨이기 때문이다. 적나라한 단어 선택은 있어도, 언제나 감정은 절제된 채로 남으며, 격정적인 서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로맨스]는 다만 이미 끝나버린 무언가를 느릿하게 더듬고 곱씹을 뿐이다. 왜, 슬픈 연기를 잘 하려면 울지 않아야 한다는 한 배우의 말도 있지 않은가. 걸핏하면 피를 토하는 아침드라마의 시한부 주인공이 아니라, 감기에 걸려 죽이나 사먹는 보통 인간의 미온적인 반추다.

죽을 것 같다가도 잘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감기에 걸릴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로맨스]한다. <엉엉>처럼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나와 함께 있어줄 순 없어?/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밖은 너무 추워 엉엉엉 울면서도 감기 같은 [로맨스]는 계속. 감기를 두고 완전 정복이 불가능한 병이라고 그랬던가. 아무쪼록 족쇄 같기도 굴레 같기도 하고 축복 같기도 한 [로맨스]를 반복재생하며, 나와 당신이 너무 많이 다치지만 않기를 바란다.


                                                                                                            

비 오던 날
나는 그렇게, 울 일 없는 평화로운 산책 도중에 울어버렸다. 그리고 그건 내가 그때 김사월의 노래를 듣고 있었던 탓이라고, 나는 결론내렸다. 기억이 과해서도, 사람이 넘쳐서도, 감정이 지나쳐서도 아니다. 다만 노래를 들었기 때문에. 입김 같고 먼지 연기 같고 감기 걸린 목 같은 노래는, 비와는 정반대의 것이니까. 아니면, 그것들은 비를 머금으면 너무 버거워지니까- 언제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는 뭐라도 이유를 대는 것이, 없으면 지어내서라도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편했다. 그래서 나는 늘 토를 달며 살았고, 이 글 역시 하나의 핑계다. 저번주 일요일의 당황스러웠던 빗줄기에 관한 아주 장황한 각주. 나에 대해 핑계대기 위해 좋아하는 음악을 불러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특권이 아닐까. 내가 그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멋진 특권. 그러니까 살아갈 이유를 좋아하는 어떤 가사, 혹은 김사월의 숨에서 찾는 것도 비겁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말로 글을 마친다.

좋아하는 것으로 나를 이유하기 위해 급히 적는 저녁,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유를 대야 하는 어느 과잉의 주소에서. 그것이 과다호흡 속이래도, 나와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며.



                                                                                                        

18.09.
在人, 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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