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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09. 2018

[유월] 비하인드 더 씬, 감독 이래경이 만드는 세계

이래경 감독, <Palette>, 아이유, 2017

감독 이래경. 그녀의 약력은 이러하다. 홍익대학교에서 영상영화를 전공하고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도날드시럽의 연출부 조감독으로 근무했다. 2014년 현재 그녀의 무대인 독립 프로덕션 '비하인드더씬'(BTS FILM)을 차리고, 짙은의 해바라기 뮤직비디오 제작을 시작으로 데뷔하여 그 뒤로 옥상달빛, 10cm, 치즈, 아이유, 볼빨간 사춘기 등 수많은 뮤지션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래경 감독님은 위와 같은 간단한 약력으로는 소개할 수 없는, 조금은 특별하고 매력적인 예술가이다. 알프레도 히치콕이 좋아 모든 자신의 이름을 이치콕(@itchcock)으로 대신하는 사람, 때로는 화려한 서사보다 먹먹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믿는 사람. 세련되고 강렬한 CG보다 굴림체의 촌스러움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잘 빠진 디지털카메라보다 빛바랜 필름 카메라의 색감과 닮은 사람. 비유하자면 색색깔의 케이크보다 담백한 우유 한 잔과도 닮은 사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사람. 이것이 내가 아는 '이래경'의 전부다.

사실, 나는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다. 친구들이 "너는 걔 어디가 좋아?"라고 묻는다면, 잠시 머뭇거리며 이내 "그냥 다 좋아"라고 답해버리는 그런 일방적인 짝사랑. 나의 마음을 다 담아낼 단어를 차마 고르지 못하고 "그냥"이라고 말해버리는 그런 사랑말이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가 그녀에 빠져버린 이유와 그녀의 매력을 모두 전달할 수 있을지 너무나도 떨리고 어렵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난 뒤 당신은 분명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란걸.



CHEEZE X 이래경, < 좋아해 (BYE) >


<좋아해(bye)> 뮤직비디오 영상: https://youtu.be/O136JYv3weQ

이래경감독, <좋아해(BYE)>, CHEEZE, 2017
이래경감독, <좋아해(BYE)>, CHEEZE, 2017
널 보고 싶단 말이 나와,
널 사랑하고 있진 않을까
눈을 마주치면 터질듯한 마음
네겐 들키고 싶진 않은데

그녀가 담백한 색들로 담아낸 이야기는 우리들의 간질거리던 어느 한때를 생각나게 한다. 선생님 몰래 손 인사를 하고, 턱을 괴고 서로의 모습을 훔쳐보기도 한다. "집에 같이 갈래?"라는 문자를 보내기 위해 수십 번을 지우고 다시 쓰기도 하고 방과 후 교실에서, 해질 무렵의 체육관에서 서로의 얼굴을 그리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을 훔쳐보며 어찌도 마음이 두근거리던지, 나 또한 그 시절의 흐릿한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시간표를 외워서 그가 우리 반 앞을 지나갈 그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고 만약 야외수업이 있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나를 바라봐 주길 기다리던, 나를 알아보고 손 인사를 건네는 날에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던 그 기억들. 어쩌면 이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보는 내내 간지러웠으면 좋겠다-", "그 시절 잊고 지내던 누군가 떠오르면 더욱 좋겠다"라던 그녀의 작품 의도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녀는 동화책에 나올 법한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의 이야기, 혹은 사랑을 위해 목숨 바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보다 우리 모두 겪었을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썸'이라는 가볍고 간단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터질듯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던 그 시절의 우리를.


이래경감독, <좋아해(BYE)>, CHEEZE, 2017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음이 터져버려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그 순간은 영화 속 한 장면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사소한 기교가 이래경 감독만의 매력이다. 'BEHIND THE SCENE'을 담아내는 그녀는 끊임없이 'SCENE'과 'BEHIND THE SCENE'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밀당'이다. 그녀의 이러한 묘기 속에서 우리는 'BEHIND'의 일상을 살아가기도,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시절 그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씬 넘버를 가지고 있던 SCENE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10CM X 이래경, < HELP >


<help> 뮤직비디오 영상: https://youtu.be/LnT9LmmlLXw

출처: 네이버 뮤직
이래경 감독, <help>, 10cm
갇혀 있는 나를 누가
대신 꺼낼 수 없을까
오늘 밤이 가기 전에
Help, somebody help

짊어진 주위의 시선이 무거운 게이 커플, 매일 밤 '죽고 싶다'라는 일기를 쓰는 히키코모리, 옆에 앉은 꼬마에게조차 웃음을 건네지 못하는 염세주의자. 꿈을 좇는 가난한 버스커, 아이를 둔 이혼한 두 남녀. 완벽한 'BEHIND'의 이야기. 그녀는 이 노래를 듣자마자 인간 군상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이를 옴니버스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이도 성별도, 가지고 있는 이야기도 모두 다른 그들이 파란 버스에 몸을 싣고 한강 다리 위를 건너는 이 이야기가 나에게 그토록 선명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이 작품이 나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치는 거울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상 밑에 꽉꽉 눌러쓴 "help"의 외침이 마치 내가 외치는 이야기인 양 이 영상은 완벽히도 나의 일상이었다.


이래경 감독, <help>, 10cm

그녀가 말한 이 이야기는 "평범한 다수의 삶 뒤에 가려지거나 지워진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소수들의 이야기. 어쩌면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노래 가사 중 하나인 "나는 결말을 알고 있지"와 대비되는 "해소되지 않는 결말"이라고 전했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네 삶도 해소되는 것보다 해소되지 않은 결말들"이 더 많기 때문에 "뾰족한 결말이 없는 허무한 엔딩"이 어쩌면 우리의 이야기와 더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일상은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백설공주가 왕자님의 키스를 받아 깨어나는 그 장면에서 결코 끝나지 않는다.

노래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롭게 마음에 꽂힌다. 이 이야기가 너무도 '나'와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BEHIND THE SCENE'에는 어떠한 결말도 없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SCENE'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응원하며 알량한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외친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간다고, 이렇게 살아가자고. 꽉꽉 눌러 담은 'HELP'의 외침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SCENE'의 주인공이 아닌 'BEHIND THE SCENE'의 우리여도 괜찮다는 진심 어린 말들을 가지고.


아이유 X 이래경, <PALETTE>


<palette> 뮤직비디오 영상: https://youtu.be/d9IxdwEFk1c

이래경감독, <Palette>, 아이유 MV 캡처
이래경감독, <Palette>, 아이유 MV 캡처
I like it. I'm twenty five
날 좋아하는 거 알아
I got this. I'm truly fine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날


다른 색깔의 필름이다. 그녀는 팔레트에 미리 짜둔 여러 색채의 물감들 중 오랫동안, 혹은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아 딱딱히 말라가는 그 덩어리에 물을 묻혔다. 세상의 빛을 본 색깔들은 기다렸다는 듯 눈부시게 빛났다. 화려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높은 분홍 신에 올라탄 채 난 수수께끼라고 외치던 '23'의 소녀는 완벽히도 'SCENE'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이래경의 붓 끝에 탄생한 세계에서 그 소녀는 반듯이 자른 단발과 보라색을 좋아하는, 이제야 나를 조금 알 것 같다고 외치는 '사람'이었다. 흰 티에 청바지, 정리되지 않은 머릿결, 꾸밈없는 눈빛으로 카메라 앞에 마주 앉은 그녀는 'SCENE'에 가려진 'BEHIND THE SCENE'의 자신을 열렬히도 피력하고 있었다. '날 좋아하는 거 알아'라고 말하며 떨리는 몸짓으로, 단단한 민낯으로 춤을 추는 그녀는 '22'의 나였고, 우리였다.

"서른을 넘긴 지금까지도 난 나를 도통 모르겠는데, 자신을 이제야 좀 알겠다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너무 멋있더라."라는 이래경 감독의 말은, 결국 그녀가 어째서 쓰지 않던, 딱딱히 굳어 차마 쓰기 힘든 화려한 'SCENE'의 물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유명한 아티스트와 화려한 색채, 화보 같은 장면들은 'BEHIND THE SCENE'을 노래하는 그녀에겐 어쩌면 독이 든 사과였다. 하지만 자신의 'BEHIND'를 거리낌 없이 내비치는 당당한 소녀의 모습에서 그녀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며 내밀어진 손을 꼭 붙잡았던 것이다.


이래경 감독, <밤편지>, 아이유 MV 캡처

페르소나[persona], 영화에서 종종 감독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하기도 하며 감독이 만드는 세계를 대변할 수 있는 감독의 자화상이자, 영화의 자화상이다.

아이유와 이래경은 <palette>이후에도 수많은 작업을 함께 하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다. 아이유는 어느새 이래경 감독의 '페르소나'적 존재가 된 듯하다. 여자가 카메라 잡는 것을 싫어했던 교수들 때문에 남학생들의 발치에서 누운 채로 카메라 뷰파인더를 봐야만 했다는 그녀에게 자신의 세계를 당당히 열어나가는 아티스트 '아이유'는 자신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 있는 '페르소나'였다. 실제로 그녀는 "여성 아티스트이기에 갇힐 수밖에 없는 프레임들을 이제 막 뚫고 나온 그녀의 멋짐을 세상도 좀 알아야 돼"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하인드 더 씬, 감독 이래경이 만드는 세계


<밤편지> 뮤직비디오 영상: https://youtu.be/BzYnNdJhZQw

이래경 감독 <밤편지>, 아이유 MV 캡처
구름 위에 앉아 나팔 부는 이야기 말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뿜고 튀는 핏방울 말고, 나지막이 내뱉는 대사와 배우들의 먹먹한 눈빛을 빌려. 그것이 뮤직비디오든, 영화든지 간에.


이것이 이래경이 만들어 나가는 세계다.

신경 쓰지 않은 듯한 굴림체와 정면을 먹먹히 응시하는 배우들의 눈빛, 퍼지는 빛망울, 어딘가 따뜻한 색감과 균열, 아날로그적 소품들, 디지털 그래픽과 의도된 촌스러움. 누가 뭐래도 그녀는 자신만의 언어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발치에서  'BEHIND THE SCENE'의 세계를 천천히 쌓아올리는 예술가이다.

SCENE 뒤편 언저리의 BEHIND THE SCENE에 관한 이야기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진짜 우리의 이야기. 그래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우리의 이야기. 현실적이어서 더 환상적인, BEHIND THE SCENE의 세계에서는 우리들도 우리만의 손짓 발짓으로 연기하는, 사랑스러운 주인공이 아닐까.



나의 세계를 만들어준, 나의 뮤즈
이래경에게 談음.




사진 출처:  vimeo.com/btsfilm (비하인드 더 씬 공식사이트) 영상 캡처
인용 출처: 이래경 감독 인스타그램(@itchc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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