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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l 03. 2018

[몽상] 내가 사랑한 정갈함, 서울의 일식당들

흘리지 않는 일인분의 삶.

손에 꼽게 좋아하는 이 문장은, 언젠가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내게 사인을 해주며 곁들인 것이다. 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게 할당된 1인분의 삶을 흘리지 않고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숭고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폐 끼치지 않고, 누군가를 지치게 하지 않고, 스스로 나의 몫을 해내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고 있다.

스물을 넘기고부터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은 좀더 확고해졌다. 그전까지는 내 돈을 주고 직접 메뉴를 선택해, 한 끼 식사를 오롯이 나의 것으로 즐기는 날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해준 음식, 사준 음식, 친구들과 다같이 고른 음식이 내 식생활의 주를 이루었던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스스로의 음식 취향에 좀더 예민한 촉수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알게 된 나의 취향 중 하나는, 내가 일식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하면 늘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초밥부터 우동, 덮밥, 카레까지. 일식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담백하면서도 달거나 깊은 맛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일식 특유의 정갈함 때문이다. 한 그릇에 담겨 나오는 한 끼의 식사. 여러 사람의 숟가락이 오가지 않는, 오롯이 나 한 명을 위한 음식. 이러한 음식의 양식(form)은 때때로 내게 어떤 삶의 양식을 일깨웠다. "흘리지 않는 1인분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일식 특유의 분위기를 사랑하는 나는, 식사 시간의 한 시간짜리 행복을 사기 위해 서울의 곳곳을 찾아다니곤 한다. 서울에는 나를 행복한 미식가로 만들어주는 좋은 일식당들이 꽤 있다. 그중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한 식당 몇 곳을 소개한다. 그 폭은 별로 넓지 않으며, 사적인 추억에 상당수 기대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당신에게도 근사한 추억을 선물해줄 장소일지도 모르니, 따뜻한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주시길.


신촌 기꾸스시



기꾸스시는 베트남 쌀국수집(미분당)과 일본 라멘집(부탄츄) 옆에 서 있는, 신촌의 작은 초밥집이다. 오후 열두 시나 여섯 시 즈음이면 늘 길게 줄을 서 있어서, 식사 시간을 조금 피해서 가는 것이 좋다. 이곳에 처음 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초밥 두 열이 들어서면 꽉 차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친구와 마주보고 맛에 감탄하던 순간을. 지친 하루의 끝에서 이 작고 아늑한 초밥집에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날의 메뉴
첫 모듬 초밥: 달콤하고 폭신한 계란 초밥과, 두툼한 연어의 질감. 내가 계란 초밥을 좋아하게 된 계기. 서비스로 주신 연어구이도 최고였다.



연희 코미치



코미치는 서울의 꽤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식당이다. 하지만 연대 서문 근처에 위치한 연희동의 코미치가 갖는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바로 낮의 평화를 담은 공간이라는 것. 어느 삼월의 화요일, 두 시간의 공강 덕분에 방문한 이곳은 테이블도, 메뉴도 몇 되지 않았지만 덕분에 더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노란색의 건물은 햇살을 받아 더 화사했던 기억. 내 몫으로 받은 1인분의 카레 맛이 유독 진하고 깊어, 이어서 살아갈 힘을 가득 받아갔다.

그날의 메뉴
가정식카레와 미니리코타치즈샐러드: 내가 생각보다 카레를 좋아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해준 맛. 힘을 내고 싶은 날에는 야채를 듬뿍 넣은 카레를, 반숙 계란을 얹은 흑미밥에 곁들여 먹고 싶다! 과일의 상큼함이 기분 좋았던 리코타치즈샐러드와 일본어가 겉면에 적힌 귀여운 수박 주스 음료수는 덤.



연남 하스



'심야식당'이라고 불리는 연남동의 하스는, 내가 하이볼을 사랑하게 해준 곳이다. 흰 쌀밥에 조금씩 얹어 먹는 라후테부터 소고기 타다끼, 간식처럼 집어먹는 우엉튀김까지, 하이볼과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 없기 때문. 밤이 내려앉을 수록 어울리는 이곳에서 나는 하이볼을 마시며, 조금씩 취해가며 끝없이 이야기했다. 내가 연남동에 거주한다면 달이 뜬지 한참 지나도 고민 없이 계속 하이볼을 마시며 떠들 수 있겠지. 아무리 이야기해도 지치지 않을 사람과 오고 싶은 곳.

그날의 메뉴
첫 라후테와 몇 잔의 하이볼: 달고 느끼하고 맛있는 음식과 기분 좋은 취기. 라후테 한 조각에 수많은 이야기 나눔.



잠실 만푸쿠



어쩌면 가장 특별한 공간. 거의 두 시간을 추위에 떨며 기다려 들어간 일식당의 사장님은 내내 신나는 노래를 틀었고,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말을 걸며 "사랑해요"를 남발했다. 식당의 주인으로서 손님들과 교감하며 중간중간 퀴즈까지 내던 사장님은 정말 놀라운 캐릭터였고 때문에 다소 정신은 없었지만, 그만큼 맛 또한 놀라워서 여러모로 정도가 '지나쳤던' 공간. 그래도 덕분에 정과 행복을 가득 사서 먹고 돌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훈훈했던 기억. 어떤 방식으로든, 여러분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식사 경험.

그날의 메뉴
연어장어덮밥과 사케동: 제대로 숙성된 연어가 한가득 쌓여 나왔던 한 그릇의 덮밥. 지금껏 먹은 사케동 중 가장 맛있었고, 가장 연어의 양이 많았다. 나는 연어와 장어가 반씩 얹어 나온 덮밥을 먹었지만, 다음번에는 사케동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 만약 또다시 그 기다림을 감수할 수 있다면-(기다림은 아깝지 않은 맛이었다.)



서울대입구 텐동요츠야



때로 힘이 들 때 무지막지한 게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날 아마 나는 조금 지쳐 있었고 감기를 낫게 함과 동시에 나를 힘이 나게 해줄, 고칼로리의 무언가를 먹고 싶었다. 기름진 튀김과 밥에 뿌린 간장 덕분에 입천장은 모두 까졌고 속은 더부룩했지만, 내내 너무 맛있어서 힘을 낼 수밖에 없었던 곳. 자주 먹을 순 없겠지만 지친 나를 조건 없이 행복하게 해주고 싶을 때, 여지없이 이곳에서 먹었던 한 그릇의 텐동이 떠오르진 않을까.

그날의 메뉴
토쿠죠텐동: 아나고 절반에 새우 두 마리, 오징어, 단호박, 연근, 버섯, 꽈리고추, 노리까지 모두 튀겨 얹은 덮밥. 작은 튀김들을 몇 점 먹다 온천계란을 풀어넣어 간장 밥과 잘 섞어 먹으면, 정말 정말 행복할 거야. 특히 장어 튀김은 그 크기도 거대하고 너무 고소해서, 먹다 보면 가격이 절대 아깝지 않을걸.






한 그릇의 음식에 나를 지나치게 행복하게 해주었던 서울의 일식당들을 소개했다. 글을 쓰는 내내 그곳에서 보냈던 몇 시간 남짓의 시간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문득 깨닫는 건, 매일마다 세 번씩 갖는 식사 시간이라는 것은  내 삶을 충만하게 하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오롯한 나의 것으로 간직하려 노력해야 하는.
이 외에도 내가 가보고 싶은 일식당들은 꽤나 많다: 연남의 배키우동, 와세사카바 옥타, 합정의 카덴... 나는 앞으로도 한 그릇의 충만한 행복을 누리러 서울의 곳곳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혹시 함께 서울의 작은 일식당들에서 지나친 행복을 누리고 싶진 않으신지?


2018년의 6월,
몽상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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