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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n 04. 2019

[두부] 코 끝에 가을, <비긴 어게인>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지다 못해 어떤 외투를 걸쳐야 할지 한참을 옷장 앞에서 서성이게 되는 계절이 왔다. 하늘은 높아지고 하루하루 맑은 빛이 더해지는데, 웃음이 나기보다는 냉기어린 구름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하늘 한 장을 담아보려 카메라를 들면 나뭇잎들이 떨어지기 전에 존재감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하나하나 이상하리만치 날카로운 가장자리로 화면에 같이 걸린다. 우린 이 계절을 가을이라고 한다. 추워질 일만이 남은, 기모 후드집업이 포근하게 느껴지고 스타킹을 주섬주섬 꺼내 신는. 지난 구개월여의 시간을 새삼스레 복기하는. 그런 계절이다.


난 저 “나와 함께 노래할래요?”가 싫다.


이 시간이 되면 새삼스레 다시 보게 되는 몇 개의 영화들과 찾게 되는 음악들이 있다. 그 중 벌써 사년째 새로운 감상을 더해주는, 아니 어쩌면 매년 똑같이 열아홉살 그날의 두부로 속절없이 돌아가게 해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존 카니 감독의 두 번째 음악 영화, <비긴 어게인>이다. 


※주의: 이 글은 영화 후기가 아닙니다. 그저 두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 영화와 관련된 기억 이야기들. 

열아홉의 가을: A Step You Can't Take Back과 Lost Stars


수능을 오십여일 앞두고 있던 가을,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무늬만 수험생이었던 고3 두부는 슬 피부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더해지는 학교와 단골 떡볶이집 사이의 길에서 친구에게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고, U는 다 똑같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수능이 딱 오십일 남아있던 날, 나에게 다짜고짜 미리 받아둔 <비긴 어게인> 예매 확정 문자를 띡 하고 날렸다. 아니 사실 문자를 날렸는지, 나를 끌고 노원역 롯데시네마로 직행했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어쨌든 내가 U에게 받은 수많은 따스한 위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다. 

남기고 온 수학 문제와 한석원 인강,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는 엄마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도 못 이기는 척 영화관에 들어가 의자에 몸을 담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메마른 그레타의 노래가 나왔고, 어딘가 감당 안 되는 눈물이 차올랐고, 댄에게 들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선율들은 그 눈물을 흐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U 몰래 조금 울었다. 코가 꽉 막혔지만 비염 탓을 하며 영화관을 빠져 나오기엔 충분했다. 흔한 러브라인 따위 없이 깔끔하게 끝나는 이야기가 좋았고, 나는 아직 사랑 같은 건 몰랐기 때문에 수험생의 헛헛함을 달래줄 정도의 적당한 노래들이 좋았다. 나에게 많은 노래들을 들려준 L과 함께 전자사전에 꼽던 분배기를 영화에서 다시 봐서 즐거웠고, 뉴욕을 돌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이 마냥 낭만적이어보여서 대학에 가고(!) 애인이 생긴다면 꼭 분배기로 서로의 음악보관함에서 노래를 엄선해 들으며 서울 곳곳을 쏘다니며 걷겠노라 다짐했다.



도시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노래입니다, 라고 담담하게 소개하며 노래하는그레타의 어깨와 헐렁한 셔츠 핏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비긴 어게인의 첫인상은 내게 a step you can't(영국식 발음으로 해야됨) take back이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그렇게 예쁜 줄 이때 처음 알았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아보는 the last act를 준비하던, 그냥 비장하기만 하던 열아홉의 가을은 그렇게 지났다. 오십일 후 나는 처음으로 실패를 했고, 정말로 길 잃은 별이 되었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했다. 


here comes the train
upon the track
there goes the pain 
it cuts to black
are you ready for the last act?
to take a step
you can't take back


일년 후 가을, 정말로 소속 없이 홀로 남겨져있던 스무살의 두부는, 스무살이라는 나이의 의미 따위는 깨닫지도 못하며 열아홉의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인강용으로 쓰던 태블릿에 몰래 담아두었던 몇 개의 노래가 있었다. 랜덤재생으로 나온 이 노래는 U의 옆에서 몰래 울던 두부로 돌아가게 하기에 충분했고, 나는 열아홉을 두 번 겪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학원에서 외출증을 끊고 나와 병원을 가는 길에 들려오던 Lost stars도 가을을 절감하기에 충분했다.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It's hunting season and the lambs are on the run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청춘이라고 정의할 수조차 없는 시간들이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재수를 하고, 나만큼이나 별 유별을 다 떨면서 하지도 않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감정적으로 가장 궁색하고 외로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의미를 고민할 수도 없었고, 대학에 가거나 사회에 먼저 나간 친구들이 빛을 내기 시작하는 모습을 외면하며 어떤 또다른 고민들이 내재해 있을지 감히 짐작조차 못하던 시기였다. 그래도 나는 내가 빛을 내기 위한 준비를 한다고 믿었다. 모든 것들을 터부시하고 살얼음을 걷는 듯 조심스러웠지만 어쩌면 가장 빛나던 때였다. 나의 두 번째 열아홉, 이천십오년의 가을은 그랬다. 물론 그땐 몰랐다.

스물하나의 가을: Like A Fool


길은 잃었지만 나는 내가 별이라고 믿었다. 어쨌든 내겐 빛이 있고 가능성이 있었다. 내 손으로 마시는 알코올로 그 가능성들을 지워내던 시기에 다시 나는 코 끝에 찬바람을 맞았고, 기숙사 침대에서 조금 울다가 처음엔 유투브 클립으로, 그러다 갈증이 느껴져 다시 전체 영상을 틀고 말았다. 열아홉의 두부는 첫장면을 가장 강하게 기억했다. 스물하나가 되고 나는 다음 장면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레타와 댄이 처음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게 되던 날, 앞서 말했던 분배기로 뉴욕의 밤거리를 이리저리 쏘다니며 자신들만의 '바이브'로 어깨를 들썩이던 밤, 묘한 기류와 함께 들어선 그레타의 숙소엔 변함없이 다정한 스티브가 그 기류를 깨며 등장한다. 


제임스코든 최고


이만 집에 가버린 댄, 그리고 점차 취해가는 그레타와 스티브의 모습은 어딘가 친숙하다. 취한 상태로 뚝딱 노래를 써내는 것은 정말 멀게 느껴지지만 취해서 가끔 인스타그램 비밀계정이나 개인 블로그에 글을 싸지르는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또다시 가깝게 느껴진다. 건반을 말 그대로 '똥땅'거리며 방금 완성한 노래를 들려주는 곳은 데이브의 음성사서함이다. 바람난 전애인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노래까지 불러주나 하고 열아홉의 두부가 그저 넘겼던 장면은, 스물하나의 두부에겐 참 새삼스런 장면이었다. 이즈음의 두부는 기승전'헤어져'라는 연애상담의 무게감을 점점 느껴가고 있었으며 명확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스물둘이 되고, 스물셋이 되고, 점차 그게 남의 얘기가 절대 아니라는 것도 점차 체감하고 있었다.


We finally find this
then you're gone
Been chasin' rainbows all along
And you have cursed me
When there's no one 
left to blame
And I have loved you
Just the same
And you have broken 
every single 
fucking rule
And I have loved you
like a fool


그레타가 and you have broken, every single, fucking rule, 하고 울먹이며 음을 맺을 때, 그게 그렇게 슬픈 건지 스물하나가 되어서야 알았다. 그 다음은 스물셋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쨌든 더 '바보처럼 사랑한' 사람이 아쉽지 않다는 것, 더 훌훌 잘 털 수 있다는 것. '슬픔의 예술적 승화'가 어떤 건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노래 가사들의 의미를 좀 더 절절히 알 수 있게 된다는 것. 상실에 대해서 예민해하던 사람은 아니었음에도,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다. 나는 분배기로 노래를 나눠 듣고 싶었지만 서로의 노래 리스트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송도로 가는 버스에서는 내 노래를 강요했지만 서로의 이어폰 크기마저 귀에 맞지 않았다. 어긋나는 것은 한 순간이 아니라 점진적인 것이다. 

스물셋의 가을: Tell Me If You Wanna Go Home


건반으로 진행되는 이 노래의 전주를 들으면, 그래도 괜찮으니 걷고 있는 길을 마저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제목처럼,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은 덤이다. 걸음에 힘이 실리고, 코 끝에 다시 다가온 가을 냄새를 더듬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카페를 들러 마카롱을 집어들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 왜냐하면 노래에서 그레타가, 내가 원할 때 집을 가버려도 된다고 말하며 부담을 조금 덜어주니까. 망각이나 회피라고 할 수도 있고 그정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치만 과부하가 걸린 상태라고 생각되면 주저없이 이어폰을 꼽고 이 노래를 재생시켜보길.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댄의 말처럼 눈 앞의 풍경에 음악을 덧씌우면 보이는 기적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Maybe
You don't have to smile so sad
Laugh when you're feeling bad
I promise I won't
Chase you
You don't have to dance so blue
You don't have to say I do
When baby you don't
Just tell me
The one thing you never told me
Then let go of me
Hell just throw me
Maybe if you wanna go home
Tell me if I'm back on my own
Giving back a heart that's on loan
Just tell me if you wanna go home


이 노래는 무조건 rooftop version으로 들어야한다. 검증되지 않은 실력이었지만 댄의 딸 바이올렛은 멋지게 일렉기타 솔로를 연주해낸다. 영화를 볼 때, 그가 첫 음을 칠 때까지만 해도 나도 덩달아서 댄의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잘 못하면 어떡하지, 이전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처럼 원곡에 반항을 해버리면 어떡하지. 그렇지만 바이올렛은 곡에 반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반항을 곡에 하나의 화음으로 얹는다. 그리고 같이 더해지는 댄의 베이스 소리. 곡이 끝나가는 무렵 뉴욕의 작은 소음들을 들어보려 애쓰면 댄의 연주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더해지는 걸 들을 수 있다. 둥둥거리며 끝까지 박자를 놓지 않는 그 소리는 여운을 남기며, 앞서 말한 마카롱 가게에서 결제하는 순간의 현타 또한 막아준다.


헤일리 스테인필드 입븜


영화의 마지막은 가족의 재결합이 예상되는 장면으로 끝난다. 모든 가족은 함께해야하고 결합해야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다. 가족의 힘이 절대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댄의 절규가 다시 미소로 번져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좋았고, 바이올렛의 결핍이 채워지고 예쁘게 웃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할 줄 아는 것을 당당하게 들고 '작곡가 언니'를 칭찬하는 것도 보기 좋았다. 마냥 긍정적인 것이 위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소외감을 느끼게 해줄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비긴어게인>은 기분 좋게 '아휴~~'하고 기지개를 켜고 상쾌하게 나갈 수 있는 정도로, 딱 그 정도로 산뜻하다. 그 정도의 긍정적 기운이 그리워질 때가 되면, 가을이 된 것을 절감하는 것이다. 


영화 리뷰가 아니라고 서두에 써놓기는 했지만 꽤 걱정이 앞선다. 예상보다 더 많이 쏟아졌을 내 개인적인 감상들의 나열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모르겠기 때문에. 그냥 가을을 다른 계절에 비해 조금 심하게 타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다. 아무튼 여러분도 코 끝에 다시 불어오는 찬바람을 핑계로, 중간고사나 과제, 알바와 걱정으로 점철된 일상에서 잠시 짬을 내어 두시간짜리의 이 음악을 한 번 들어보길. 일상에 입혀지는 음악의 힘과 함께 날씨에 덧씌워진 추억들을 세어보는 시간은 때론 무척 소중하다. 목도리를 하게는 계절이 다가오면 나는 또다른 영화를 꺼내들 것 같다. 여러분도, 추억을 깨우는 시간을 꼭 갖길.


코 끝에 가을,
두부 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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