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
딱히 극적인 계기가 없기 때문에 극적인 계기를 애써 만들어본다. 초등학교 6학년은 내 모든 ‘덕후짓’이 시작된 시기였고, 아마도 내가 처음으로 외로워본 시간들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온다 리쿠의 책을 건네 준 선생님은 무슨 생각이셨을까, 괜히 나를 어린아이가 아닌 한 사람으로 존중해줬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설레발을 쳐 본다. 이 작가에 대한 애착은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걸까?
처음 읽었던 <빛의 제국>은 열세 살의 나에게 강렬한 충격이었고, 나는 돌연변이 아이가 빨간 고깃덩이가 될 때까지 총알이 멈추지 않았다는 묘사를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기이한 능력을 가진 '도코노' 집단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아가고, 끄집어내지고, 무참하게 무너지는 무덤덤한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온다 리쿠는 내 독서세계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얇고 길게,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 권, 도서관에 갔다가 한 권, 중고서점에 갔다가 절판된 것 또 한 권. 그녀가 쓴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어린 포부부터, 되는대로 다 모아서 서재 한 쪽을 메우겠다는 지금의 소망까지, 온다 리쿠는 버릇처럼 남아있다.
국어국문이라는 학과가 무색하게 좋아하는 작가를 한 명 말해 봐라, 하면 일단 떠오르고 보는 이름, 제목 하나하나를 떠올릴 때마다 그 책을 읽던 온갖 시절의 내가 떠오르는, 성에 차지 않을 때도 애정으로 덮어내게 된, 미워할 수 없게 된 이 이름. 그녀를 내가 쓸 첫 번째 글에 두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침전물
온다 리쿠는 미스터리, 판타지, SF, 청춘소설, 스펙트럼에 국한되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늘어놓는다. (머릿속에서 환상특급열차라도 지나다니는지 온갖 얘기가 뿜겨져 나온다. 대범한 스케일을 감당 못 하고 흐지부지되는 글도 좀 있는 편이지만..) 하지만 장르가 어떻든 간에 그녀의 이야기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기억, 추억, 망각, 그리고 외로움 따위가 아닐까 한다. 딱히 감동적이지도 않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항상 먹먹해졌고, 안타까울 일 없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책을 쥐고 혼자 앉아있는 나를 멀찍이서 바라보게 되곤 했으니까.
<밤의 피크닉>은 ‘온다 리쿠 입문작’들 중 하나인, 일본에서는 영화로도 제작된 스테디셀러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난 이복 남매가 같은 반 학생으로 만나 껄끄럽게 지내다가, 고교 마지막 행사인 ‘야간 보행제’에서 줄창 걷고 반 친구들과 떠들다가 화해(?)한다. 전형적인 청춘소설이다.
전형적이고 진부한 이야기지만 24시간 동안 진행되는 보행제는 열아홉 살 니시카와 도오루, 고다 다카코의 분노와 당혹, 공허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버지가 바람난 여자의 딸과 한 반에서 1년을 살아야 했던 도오루와, 모녀가정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면서도 도오루에 대한 가책을 느끼고 있는 다카코. 그리고 도오루의 생일이 된 보행제 중턱의 새벽, 책의 중반이 한참 넘어서야 첫 대화를 하는 둘의 장면은 글쎄, 언제 읽든 마냥 애틋한 느낌이다.
"생일, 축하해."
어느 샌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
조용한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보이지는 않지만, 반사적으로 내민 손끝에서 캔이 쨍,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밤의 피크닉_204쪽 중>
<밤의 피크닉>을 서너 번은 더 읽은 후에도 담백하게 커피 캔을 마주 부딪치는 이 장면에서는 항상 괜히 울컥한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몇 번을 쓴 이 책의 독서감상문들과 수행평가 등등에는 이 부분을 항상 인용하기도 했다. 캔이 쨍, 하고 부딪치는 소리. 700원짜리 캔커피를 자판기에서 뽑아 먹을 때면 늘 이 장면과 함께 캔을 든 손이 웅웅거리는 감각이 살아난다.
니시카와 도오루와 고다 다카코는 항상 주변 사람에게 존재를 증명 받고자 했지만 누구에게도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담담하게 좋은 가정을 연기하며 살아야했던 도오루와, 어머니와 당당하게 살아가지만 니시카와 가의 원망을 받는 눈엣가시라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다카코.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이 장면은, 단순한 화해라기보다는, 서로의 적나라한 상처와 희미함을 바라보고, 그 앞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눈물지으면서 웃어주는 것. 희망찬 환영이 아닌 무력한 인정. 희끄무레한 너와 나를 애잔하게 지켜보는 그런 장면. 두 사람 사이의 냉기를 깨버린 것은 가족애도 따뜻한 화해도 아닌 상대에 대한 동정, 거기에서 이어지는 자기 연민이다.
자기 연민! 온다 리쿠의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자기 자신에 함몰되어 있다. 자신의 천재성, 자신의 불행, 자신의 예민함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부서트리는 자기 과잉에 누구도 ‘나’의 바운더리 안에 넣지 못하는 서투름과 좌절. 나만 있는 공간에서, 나의 존재 이유조차 희미해지는 온전한 외로움 같은 것들. 온갖 이야기보따리들을 하나로 꿰뚫어버리는 외로움이 있다.
지금은 일찍 겪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일들. 가벼운 따돌림 따위는 세상 멋모르고 철없게 살아오던 애 한 명을 쉽게도 꺾어냈고, 열세 살의 나는 1년 동안 외로움의 한가운데서 깊이 침전해있었다. ‘외로움’이라는 키워드는 그 때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지치지도 않고 내 생각 내 글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사실 그 날들을 원동력 삼아 지금껏 살아온 셈이다. 그 때 만난 온다 리쿠 소설의 인물들은 완전히 내 취향에 맞물려버렸고, 지금껏, 톱니바퀴 돌아가듯, 이를 맞추며 째깍거리고 있다.
기억
살인사건이나 누군가의 죽음이 서사의 중심일 때조차 온다 리쿠의 인물들은 본연의 외로움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건을 진행하면서 중요한 단서를 ‘잊고 있다가’ ‘사건이 표면화되면서 기억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굽이치는 강가에서>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유년기 실수가 불러일으킨 친구의 죽음을 파헤치고, <흑(黑)과 다(茶)의 환상>의 네 남녀는 대학 시절의 기억을 되짚으며 동창이 자살한 이유를 되짚는다. 동적인 사건은 없다. 오로지 기억을 되살리고, 죄책감에 지웠던 사실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짜맞춰갈 뿐이다.
<흑과 다의 환상>의 이야기는 주변에서 자주 일어날 법한 일은 아니지만, 또 누구에게 일어난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는, 어딘가 익숙하지만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주인공들이 몇 년, 몇 십 년 전의 기억을 더듬는 장면은 왠지 함께 추억여행이라도 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렇게 펼쳐지는 기억과 향수는 외로움과 맞물려 극대화되고, 읽는 이를 미묘한 그리움에 빠뜨린다.
유리가 목에 빨간 리본을 매고 천창 밑에 서 있다.
그녀의 갈색 머리털에 반사되는 라이트. 아니면 달빛이었을까.
모두가 그 애를 가엾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겁을 내면서도 역시 그 애를 사랑하니까.
(...)
그 애의 갸름한 손, 그 애의 마노처럼 검은 눈동자, 그 애의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해. 나는 그 애가 갈기갈기 찢는 살도, 그 애가 바라보는 달도, 그 애의 머리칼에 닿는 밤바람도 모두 사랑해.
무서운 것과 아름다운 것의 경계는 어디에 있어? 상냥함과 잔혹함은? 친절과 심술은? 미움은 어디에서 시작해? 그것이 사랑과 어디가 다르다는 거지? 웃는 얼굴로 때리면 미움이고, 울면서 때리면 사랑인 거야? <흑과 다의 환상_上_193쪽 중>
<흑과 다의 환상>의 이야기는 대학 동창인 리에코, 아키히코, 세쓰코가 졸업한 지 십수 년이 지나 Y섬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네 명의 마음 한 구석에 걸려 있던 유리의 죽음을 겉돌면서 시작된다. 유리는 주변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비로운 인물로, 네 명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유리를 바라보고 기억하면서 그녀를 아름답게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그러다가도 미지의 인물에 가까웠던 그녀를 신랄하고 냉정하게 평가하고 초라한 현실로 내려끌어 낱낱이 밝혀내기도 한다.
읽다 보면 어느 샌가 그들이 불러내는 기억에 같이 호흡하고 있고, 아련함과 그리움에 함께 마음이 부서져라 눈부시다. 비현실적인 인물인 유리를 둘러싼 인물들의 감정은 아플 정도로 현실적인데, 넷 사이를 오고 간 사랑, 질투 따위의 묘사가 저 바닥까지 드러나서 읽는 사람의 마음을 들킨 듯 뜨끔해지고 쓰라리다.
그리고 그 뜨끔함은 읽는 이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활자로 펼쳐지는 기묘한 분위기와 나의 기억의 편린들이 멋대로 엉겨붙는다.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 나에게 머물러 있는 사람들. 나에게 '유리'였던 사람은 나를 누구로 기억할는지. 이 작가가 ‘노스탤지어의 정령’이라는 거창한 별칭을 갖고 있는 이유를 문득 생각해본다. 글쎄 기분 탓일까, 정말로 아득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것 같기도.
그러니까, 침전물
즐겁게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줄 쓸 때마다 가슴을 숟가락으로 뜨는 듯 찝찝하고 불편하다. 어떻게 쓸 지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고인 말을 풀어내기가 어렵다. 그건 마냥 좋아한 '취향'이라기보다 온갖 시절을 보내온 애틋함이 있어서일 테다.
앞서 '버릇'이라고 이름 붙였던 이 작가는 내게 고여 있던 기억, 연연함 따위이다. 걸어온 모든 과거의 기억, 미련, 볼품없음이 '온다 리쿠'라는 담백한 단어 하나에 엉켜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하나씩 이 공간에 글을 올리고 나를 활짝 내벌리기 위해서는 먼저 어설프게나마 이를 짚어야만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글을 맺을 즈음에서야 황급히 떠오른 거다. 그게 굳이 온다 리쿠였던 이유는 아닐까 하고.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는 얼버무림이 아니라 이런 게 앞으로의 나입니다, 조심스레 열어보이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고!
첫 아무 談
서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