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소설을 가르는 점 중 하나는 주인공만의 일화를 언젠가 내게도 있었던 일로 착각하게 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작가의 기억 왜곡 실력은 공통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추억을 공유하게 한다. 부모님의 어릴 적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면 그 시절을 같이 살아낸듯한 착각이 들듯이. 헤르만 헤세는 서양 문화권에서 나고 자랐지만 인도 철학에 심취했다고 한다. 동서양이 혼재되어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그의 소설 <데미안>은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김 아무개 또는 마이클 썸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 <데미안>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다. '데미안'하면 떠오르는 아래의 구절에도 아브락사스라는 이름 내지는 개념이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
세계를 파괴하는 투쟁 끝에 날아가는 곳에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존재가 있다. 깨끗하고 안전하고 질서 있는 밝은 세계도, 방탕과 폭력이 난무하는 어둠의 세계도 아닌 그 사이 회색 공간을 향해 날아가라는 선언. 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싱클레어뿐 아니라 서양 종교에 문외한인 내게도 큰 충격이다.
소설이 쓰인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열강 사이의 갈등으로 근대 유럽을 지탱하던 합리성과 계몽주의가 흔들리며 젊은 세대들의 혼란과 의심이 이어졌다. 이는 곧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기대를 낳았다. 어지러운 세상을 정돈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불안은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느끼는 감정과 맞닿아있다. 군중들 사이에 우뚝하니 눈에 띄는, 또래보다 유난히 성숙한 친구를 볼 때 경외심을 느껴본 적 있는가? 그런 존재는 의도 없이 두렵게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불쑥 튀어나오는 열등감을 마주하는 것이 불쾌하고 낯설어 의식적으로 곁을 피하곤 했다. 그런데 그때쯤이면 벌써 온 신경이 상대를 향해있고, 행동 하나, 쓰이는 모든 어휘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 순간 느껴지는 무력감은 변질되어 상대를 향한 원망감이 되기도 하지만, 타고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열등함을 인정하고 무언가 배워보려 애쓴다. 그의 넓은 세계를 통해 제 의식을 확장시키려 한다. 알을 깨보려 머리를 처박는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비판이나 회의를 일깨우기 위해 내게 경고하는 데에는 그의 다른 시선 한 번, 아주 단호한 눈길 한 번이면 충분했다. - <데미안>
우리는 누구나 타인에게 의존하며 영향받고, 그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며 산다. 유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지만 누가 나타나 삶을 이끌고 정답을 읊어준다면 못 이기는 척 따르겠노라 소망하는 마음. 얼마만큼 독립적인지에 상관없이 불안에 휩싸일 때면 반드시 품게 된다.
싱클레어는 그런 의존적인 어린 마음을 용기 있게 마주하고 영상을 좇으며 성장한다.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그의 영상은 그가 사모하던 베아트리체라는 여인도, 경외의 대상이자 자신의 세계를 감히 무너트렸던 데미안도 아니었다. 그 영상은 싱클레어라는 사람, 그 자신이었다. 혼란을 겪던 청년세대가 찾던 '새로운 질서'는 '새로운 나'였으며 이는 결국 '완전한 나'를 뜻한다.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온전한 나다움의 결정체가, 따라야 하는 절대 질서인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날아가야 하는 아브락사스 또한 다름 아닌 나의 진정한 본질적 세계이다. 충실한 자아성찰과 탐색의 결과 발견한, 선과 악이 공존하는 다면적 인간으로서의 나.
나는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그것을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차츰차츰 그것이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니며 나라는 느낌이 왔다. - <데미안>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을 정의해 보려 애쓸 때면 목이 막힌다. 헤르만 헤세는 원점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기를 말한다. 자신에 대해 끝없이 의문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만이 적극적 의미의 운명을 책임지며 살아갈 수 있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이루는 매개들 사이에 자신도 있음을 알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공이고 그것은 누구보다 치열한 자아탐색의 결과이다. 나를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은 누구에게도 매끄럽지 않다. 분리와 전이, 재통합으로 이어지는 뼈아픈 통과의례의 전리품이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사람들은 결국 시인 혹은 광인이, 예언가 혹은 범죄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 <데미안>
극도로 아름다운 예술은 작가의 정신병이 발현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빈센트 반 고흐와 프란츠 카프카의 조현병이 귀 잘린 초상화를 그리고 <변신>을 써낸 것처럼. 데미안을 주인공의 상상 속 친구로 보며 정신질환의 병세 기록이라고 해석한 정신과 의사의 권위 있는 비평은 한순간 맥이 풀리면서도 수긍하게 한다. 어찌 됐든 읽는 내내 싱클레어가 영상이자 신인 자신과 나눈 내면의 대화는 모나고 예민하던 나의 청소년기를 자꾸만 끌어올려 직면하게 하고 어린 나를 안아주게 했다. 공동체 속에서 나 자신을 잃느니 기꺼이 겉도는 것이 가치 있다는 말도 몰래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