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 성해나

by 영주

I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성해나의 소설 <혼모노>의 네 번째 단편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한국 현대사의 그늘진 공간 중 하나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아 구조적 폭력을 짓는데 일조한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1970년대 독재 정권 하에 국책을 비판하던 선배가 추방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여재화는 정권에 순응하며 국가사업으로 주요 건축물을 설계한다. '경동 수련원'이라는 죄 없는 이름으로 지어지는 이 건물은 74년 긴급조치 이후 불온세력이라 불리는 이들을 고문하고 취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재화는 자신의 일을 도울, 포부가 크지 않고 뒷배 없이 고분고분하며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인물인 구보승을 조교로 삼는다.


여재화는 '건축 위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르친다. 공간에서 생활할 인간을 우선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인데, 국가권력에 편승하여 인권유린을 위한 공간을 지으면서 '인간을 위한 설계'를 강조하는 것에서 그의 위선이 드러난다.


여재화는 예상보다 흡족하게 일을 처리하는 구보승의 합리성을 칭찬하며 설계의 일부까지 위임한다. 스승의 기대에 보답하고자 구보승은 이상을 뺀 합리적인 설계와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며 실로 공간의 목적과 그곳에서 생활할 사람들에게 탁월히 적합한 설계를 해낸다. 일말의 연민이나 부채 없이.


'급수에 철저히 신경 쓸 것, 방음에 유용한 자재를 사용할 것, 창과 문은 되도록 적게 설계할 것'이라는 내무부 장관의 거친 요구는 구보승의 섬세한 상상력으로 살붙어 '층을 구분할 수 없고, 가파른 경사로 공포심을 극대화할 나선형 철제 계단'과 '취조실에서 새어 나온 비명이 복도를 울리게 해 다른 이들의 공포를 극대화할 높은 천장'이 되었다.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잔인함은 '빛'을 대하는 구의 태도에서 극대화된다. 한 줌도 안 될 인간다움이나마 지키기 위해 여재화는 취조실에 창을 낸다. '빛'이 사람의 마음을 두드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조사자가 아닌 여재화 본인의 일말의 죄책감을 지키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구보승은 스승의 설계에 '취조실에 희망은 불필요하다'는 말로 대담히 반항한다. 피 흘릴 사람들의 심정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시공자의 편에 서서, 당하는 사람들이 느낄 감정을 증폭시킬 방안을 궁리해낸 것이다.


제 생각에, 이 공간엔 창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 희망이 생기잖습니까. ... 죽고자 하는 사람도 빛 속에선 의지와 열망을 키웁니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을 수도 있고 흔들렸던 신념이 굳건해질 수도 있죠. -혼모노


여기까지도 구보승의 서늘한 합리성이 피부로 느껴져 치가 떨리는데, 이후 '빛'에 대한 그의 발전된 견해가 압권이다. 그는 빛이 희망을 유발한다는 것을 역으로 이용해,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잔혹한 생각을 꺼내 놓는다. 희망과 절망의 낙차를 이용하여 그야말로 희망고문을 하자는 것이다.


취조실마다 폭이 좁은 수직창이 배치되어 있었다.

선생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거라고.
-혼모노


'구의 집'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악함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 반추했다. 감성보다는 이성에 따르는 모습을 추앙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행위가 초래할 구조적 폭력이라는 다소 정서 편향적인 사고를 배제하고, 철저히 자신이 맡은 바에 죽을힘을 다한 구보승을 과연 악인이라고 평할 수 있을까? 그는 그가 가진 합리성과 상상력을 발휘해 설계를 맡긴 자가 원하는 목적에 충실한 '구의 집'을 낳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여재화의 위선은 없었다.


그렇다고 건물의 불건전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출세에 눈이 멀어 설계를 덥석 맡은, 끝에는 설계자 명단에 제 이름은 빼놓고 제자의 이름만 새겨지게 하는 것도 모자라 '구의 집'이라는 별칭까지 붙인 여재화가 악인인가? 적어도 그는 구보승이 잔인한 합리성으로 펜을 놀릴 때 인간성을 잃지 말라 단호히 충고했다.


이야기는 건축가의 꿈을 접고 공인중개사가 되어 노쇠한 행색으로 갈월동을 다시 찾은 구보승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설계 일을 그만둔 이유가 구의 집을 지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그저 수완이 좋고 치밀하며 합리를 중시하는 자신에게 적합한 업이 중개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구의 집에 '구'가 구원의 구(救)일지도 모른다 추측하는 것, 그리고 갈월동 건물을 마주하고 자신이 설계한 내부를 '효율적'이라 평하며, 정초석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매만지고 나서도 간밤에 좋은 꿈을 꾼 것을 떠올리며 즉석복권을 사야지 생각한다는 것. 이것들로부터 그의 인성적 결함이 엿보인다. 동정심의 부재는 악함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나로서 구는 상종하기 싫은 인간상임은 분명하다.


구의 집의 ‘구’가 두려워할 구(懼)인지, 구원의 구(救)인지, 혹은 그저 자신의 성을 딴 것인지 남자는 알지 못한다.

남자는 다시 갈월동을 천천히 누빈다. 간밤에 좋은 꿈을 꾸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즉석복권을 한 장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혼모노


II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살면 세상 모든 크고 작은 요소들이 심기를 쉽게 건드린다. 예민한 사람이라는 평이 반복될수록 스스로의 불편을 검열하게 되는데, 태생이 그렇다면 뭐든 신경 끄고 사는 게 쉽지가 않다.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으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나니 집단 속에서 엄격한 도덕적 가치관과 판단, '모럴'을 선뜻 드러내 함께 논해보자 권하는 것이 어렵다. 다수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혼자 불편함을 매만질수록 모서리는 더 세밀해지고 세상에 온통 모난 것들만 보인다.


다수에 속해있으면 어느새 기준이 흐려지기도 한다. 집단 속에서 사고하다 보면 비판적 판단이 슬 마비되고, 결정에 대한 책임이 분산되니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탈한다. 혼자라면 수십 번 재단해 볼 것도 '소속'이라는 다정함 속에서는 덥석거린다.


성해나의 소설 <혼모노>의 첫 번째 이야기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에서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보여준다. 김곤의 팬클럽에 속해 그에 대한 애정을 쏟아내던 화자는 오프라인 정모에서 만난 회원들과 어느 정도 겉돌며 소통한다. 김곤의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동을 꼬집는 회원에게서 날아온 폭탄을 온몸으로 막음으로써 김곤에 대한 '진짜' 사랑을 입증하고는 뿌듯해하기도 한다.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폭탄은 불발되었고 그 잔해나 연기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터였다. 내 사랑을 제대로 입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지 않고, 속이지 않고. -혼모노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평생 지켜온 자신의 도덕을 기꺼이 허물어 다시 짓게 한다. 열렬한 애정은 상대의 못난 모습이 감춰지게 베일을 내린다. 소설의 화자 또한 김곤을 향한 사랑, 그리고 총애 받는 감독을 추종함으로써 현학적인 말로 자신의 무지함을 조롱하던 전 애인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제 눈과 귀를 가리고 김곤을 변호하며 도덕적 기준을 새로 긋는다. 사랑은 이렇게 안 하던 짓을 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화자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자신의 엄격한 도덕성에 반하고 다수를 따름으로써 시네필 무리에 속했다는 소속감은 곧 더 크게 부풀어 덩치 큰 허망함과 죄의식으로 굴러온다. 필사적으로 감춰주려던 김곤의 죄를 그 스스로 인정해낸 시사회에서 화자는 살이 뜯기는 죄책감을 마주한다. 내가 사랑하던 이상향이 사실은 내가 그려낸 허상 속에서만 빛이 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허무감은 '헛헛하다'라는 말로는 불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왜 생각할수록 더 ...... 허무해질까. 모든 게 흠 없이 온전한데 왜 나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살점이 다 뜯겨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괴로운가. 왜 지독히도 헛헛한가. -혼모노


김곤을 향한 광적인 사랑이 식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치앙마이에서 호랑이 만지기 체험을 하던 화자는 기시감을 느낀다. 김곤을 사랑하는 마음과 호랑이 만지기를 함께 두는 것이 다소 기상처럼 느껴지지만 둘 사이에는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이라는 교점이 있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니까.
-혼모노


인간에게 만져지기 위해 이빨과 발톱이 모조리 뽑힌, 야생성을 잃고 넋이 나간 호랑이의 가죽뿐인 등을 더듬는 것. 순간 불쾌한 죄의식이 느껴지지만 금세 누린내는 익숙해지고 손끝에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쾌감이 느껴진다.


III

혼모노


책의 제목이자 세 번째 단편인 '혼모노'는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세상에서 진짜는 어떻게 증명되며 무엇이 진짜 '진짜의 기준'인지 자문하게 한다.


화자는 소위 신발로 먹고사는 30년 경력의 무당이다. 혼모노를 좋아하는 장수할멈을 위해 매일같이 신당에 지화가 아닌 생화를 올리는 그는 앞 집에 어린 여자애가 신당을 차리면서 스스로 진짜인가 의심하게 된다. 장수할멈이 그 애에게 옮겨 간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던 그는 번아웃이라는 세속적 처방으로 영험함의 상실을 설명하려 한다.


모르겠다. 지금 나를 향해 조소하는 것이 할멈인지 저 애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혼모노


정치인 황보의 시장 선거를 앞두고 잡혀 있던 액막이굿까지 신애기에게 뺏긴 화자는 굿판에 난입해 대결하듯 작두에 오른다. 발바닥에 진득한 피가 철철 흐르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고, 차고 저릿한 감촉을 온전히 감당하며 굿판을 벌인다.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혼모노


누구의 혼도 빌리지 않는다. 작두에 생살이 벌어지는 고통을 할멈의 도움 없이 스스로 느낀다. 이 대결 같은 굿판에서 진짜는 장수 할멈이 들어앉아 신발이 충만한 신애기인지, 진짜처럼 보이려 노력하지 않고 진짜 가짜임을 피로서 증명해 내는 화자인지 생각해 본다.


온갖 향료로 범벅됐으면서 진짜인 척하는 바나나우유가 진짜인가, '맛'이라는 글자로 진짜 가짜임을 말해주는 바나나맛 우유가 진짜인가. 진짜가 되려 노력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진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진짜란 없고 모두 진짜 비슷한 가짜만이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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