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만큼 크게 울리는 감동
포르투갈에는 유난히 오르막이 많다. 오르막이 많으면 내리막도 많을 텐데 기억에 남는 것은 애석하게도 오르막뿐이다. 가을이 시작된 9월이지만 한낮 햇빛은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맺힐 정도의 뜨거움을 품고 있었다. 평면적인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따라가다 눈 앞에 엄청난 높이의 계단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 걸음을 멈추었다. 오르다 오르다 너무 힘들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우리나라말로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무슨 지도가 오르막만 골라서 알려주느냐'로 시작해서 '이게 등산인지 관광인지 모르겠다'에 이르는 한탄까지 하고 나면 어느새 정상에 가까워져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경사에는 언제나 끝이 있었고 달아오른 뺨을 도닥여주는 시원한 바람과 가슴까지 뻥 뚫리는 풍경이 있었다. 불평을 하면서도 돌아내려 가지 않은 이유는 이 오르막에 분명 끝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멋진 경관을 보게 될지에 대한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현재의 고단함을 이겨내면 조만간 더 오를 곳 없는 높이에 도달할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정도는 내가 견딜 수 있다는 것도.
여행 내내 힘들고 피하고 싶은 존재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포르투갈의 오르막. 마음만 먹으면 익숙해질 수 있는 작은 불편함, 어쩌면 작은 디테일이다. 내 일상에도 분명 이런 불편함이 존재한다. 신체적 피로를 주는 오르막이 아니더라도 정신적 오르막은 매일같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 오르막에도 분명 끝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피로의 끝은 아니더라도 다음 오르막을 마주하기 전에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지점에 조만간 도달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알고 있기 때문에 내던지고 뛰쳐나오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겠지. 어렵게 오르는 길일수록 기억에 남는 장면을 선물하리라고 기대하는 내 일상과 포르투갈의 오르막이 닮아 있음을 어느덧 내 마음은 알고 있었다.
굳이 찾아 올라가서 보는 풍경도 좋았지만,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한 그림은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는 포르투 시내의 모습이었다. 줄지어 선 낮은 건물들 위로 내려앉은 빨간 지붕이 담요처럼 도시를 덮고 있는 모양. 숙소가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포르투 시내에서 돌아다니는 날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꼭대기층의 숙소로 돌아와 한숨을 돌리고 나가고는 했다. 숙소에 오면 제일 먼저 커다란 창을 열어놓고 아침과는 달라진 낮의 풍경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좋아했던 그 장면은 아침에 보는 것과 낮에 보는 것이 밤에 보는 것과 또 달랐고 그러면서도 매 순간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러고보니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늘 높은 곳에 살았다. 경관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어머니에게 조망권은 이사할 집을 고르는 일순위 기준이었다. 어머니는 요즘도 간간히 당신이 어렸을 때 살던 집에서 내려다 보이던 부산 시내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는 말씀을 하신다. (형편이 여유롭지 못해서 산 중턱에 살았기 때문에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지금껏 '내려다 보이는 풍경'의 사치를 한껏 누리고 살았다.
그래서일까, 포르투가 나에게 선사하는 풍경들을 내려다 볼때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마음은 더 없이 고요해졌다. 나에게도 훗날 아름답다 추억할만한 장면이 생긴것 같아서. 마음속에 새기고 또 새기는 동안 하염없는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