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랑 Dec 11. 2017

일기53_나와 닮은 그녀의 시간




어릴 때 아빠 판박이라고 불리던 나는 스무 살 중반을 넘자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마를 닮아 있었다. 엄마는 돌아가신 외증조할머니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으니 내가 60대로, 또 80대로 나이 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정도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 엄마도 젊었을 때, 트렌디한 스타일을 즐기던 그녀가 요즘은 마치 귀촌한 자연주의 여성처럼 그 흔한 미용시술 하나 받는 것을 거부하며 세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근래 들어 피부는 또래보다 더 쳐졌고 머리숱도 급격히 줄었다. 그녀가 추구하던 트렌디한 스타일을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빨리 나이 들어갔고 종전에는 두 살 많은 아빠보다 연상으로 오해받는 일도 많아졌다. 아빠가 워낙 동안이기는 하지만, 한번 웃자고 하는 가족 간의 농담이기는 하지만, 같은 여자인 나는 조금 불편하고 기분 상해서 그런 오해를 했다는 사람을 호되게 욕하곤 한다. (아마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발끈한 내가 싸움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몇 주 전에, 사촌동생의 결혼식에 간다며 옷을 사겠다는 엄마를 따라나선 적이 있다. 엄마는 생전 입은 적 없던 면 퀼트 스타일의 풍덩한 치마를 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분명 또래의 누군가가 입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평생 다이어트를 실천하는 마르고 왜소한 엄마에게 풍덩한 핏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득해보기도 하고 눈에 띄게 경직된 표정으로 옷가게 구석에서 무언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런 내 눈치를 봐가며 옷가게 아주머니와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자니 슬슬 짜증이 났다. 할머니도 아니면서 할머니가 된 친구들을 따라 하려 든다. 엄마가 할머니가 못 된 데는 내 책임이 더 큰데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속상함이 밀고 올라왔다.


내가 너무 학을 떼니 결국 그 옷을 사지 못하고 돌아와 다른 옷을 맞춰보는 엄마 뒤에 서서 어렸을 때 보았던 젊고 세련된 아줌마의 모습을 찾아본다. 여자는 걷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나에게 주차장 라인을 따라 똑바로 걷는 연습을 시키던 엄마는 이제 똑바로 섰을 때 배를 쭉 내미는 할머니 특유의 자세로 서곤 한다. 내가 구해다 준 파운데이션은 얼굴 여기저기 뭉쳐있고 급하게 그린 눈썹은 늘 비대칭이다. 제대로 하는 법을 알려줘도 원래 대충하는 게 자기 스타일이라는 말이 돌아오면 그렇게 속상할 수 없다. 엄마는 교사로 일하던 처녀시절 아침마다 미용실에 가서 드라이를 하던 사람이다. 대충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하는 게 엄마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변한 게 그녀의 잘못도 아닌데, 아니 나이 드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닌데도 나는 화가 난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니 눈 앞에 있는 엄마에게 짜증을 낸다.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주말 저녁 혼자 TV를 보다 탁자 유리 밑에 아빠가 꽂아놓은 엄마 사진으로 눈길이 갔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활짝 웃는 그녀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리고 지금의 나와 더 닮아있었다. 사진 속 나와 닮은 그녀가 엄마가 되고 중년으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엄마가 나이 드는 게 내 잘못 같아서 싫다. 내가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엄마는 적어도 그 또래보다 젊고 예뻤으면 좋겠다. 내 신발을 몰래 신고 나가고 새로 산 내 옷을 탐내더라도 차라리 그 편이 낫다. 그게 그녀의 시간을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야.







매거진의 이전글 일기52_창작의 할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