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이라고 쓰고 토론토라고 읽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후 네 편의 후기를 올리고 나서 내 멋대로 휴재한 지 세 달이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쓰는 것을 멈춘 것이 지난 몇 주간 마음에 불편함으로 남았다. 기억이 공기 중으로 완전히 산화되기 전에 부랴부랴 뒤져본 사진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 중 하나는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방문한 날, 그림 같았던 날씨와 더불어 갤러리 입구에 크고 길게 자리 한 분수와 그 테두리에 앉아 햇살을 즐기던 시민들의 모습이 아마도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그렇게나 모던하고 우아한 갤러리에 입장료 한 푼 없이 모든 방문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이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갤러리 입구에 선 순간,금전적 여유에서 벗어나 누구나 고차원적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멜버른이라는 도시의 자본력을 실감했던것이 떠올랐다.
무료 갤러리임에도 모던부터 클래식,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주제별로 나뉜 각 섹션을 풍성하게 채운 작품들이 나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했었다. 디자인을 해온 사람으로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모던 아트 분야 유명 일본 디자이너 및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디자인 에이전시 NENDO와 최근 핫한 미디어 디자인 그룹인 TEAMLAB, 도트로 유명한 Kusama Yayoi, 그리고 처음 접했지만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긴 Yamagami Yukihiro의 작품이 여기에 포함된다. 지금 돌아보니, 바로 옆 일본에서보다 더 알차게 볼 수 있게 꾸며진 일본 작가들이 받은 스포트라이트에 조금 질투가 난다. 이렇게나 멋진 갤러리에, 이렇게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세계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 그들의 입지에 말이다.
빅토리아 갤러리는 마치, 조금 쉬고 싶을 때 찾고 싶은 곳이었다. 한가롭고 화창한 오후를 느릿하게 보내고 싶은 날,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만 보아도 좋을 그런 날에. 마음먹고 문화생활을 하기 위해 찾고 싶은 곳이 아니라 지친 마음을 도시의 밝은 에너지로 채우고 싶을 때. 조금은 울고 싶기도 한 그런 기분으로 와도 위로받을 그런 곳이었다.
물을 끼고 있는 도시라 그런지 멜버른 아쿠아리움이 유명하다는 말에, 평소 서울에서는 관심도 없었던 아쿠아리움을 일정에 넣어보았다. 혹시라도 비가 오는 날이나 너무 더워 걷기 힘들 때 쉬어갈 만한 실내 시설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있는 동안 날씨를 피해 들어갈 곳이 필요한 상황은 오지 않았지만, 적당한 평일 오전 시간에 커다란 글씨로 Sealife라고 쓰여있는 아쿠아리움을 방문했다.
둘러보는 내내 내 주변으로 오가는 대화는 참 다양한 언어로 뒤섞여 있었다. 나 또한 캐나다라는 다민족 국가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누리지 못했던 여유, 당시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을 생전 처음 발 디뎌본 지구 남반구에서 다시 마주 할 줄이야.
멜버른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본의 아니게 여러 번 지나게 된 곳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왠지 모르게 Chaple Street이 좋았다. 쇼핑이라면 더 편리한 Mall들이 많고 구경거리라면 더 유명한 곳들이 많았지만 나는 Chaple Street이 주는 느낌이 막연하게 좋아 여러 번 오가며 이 길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곳은 내가 토론토에서 대학생이던 시절, 학교 근처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전차가 지나다니는 거리, 조그만 숍들이 줄지어 있는 모양, 그리고 낮은 건물들 사이로 간간히 올라오는 조금 높은 건물들과 그 둘의 높이 차이로 드러난 벽면을 채운 벽화들이 내 눈에는 토론토의 Queen Street과 많이 겹쳐 보였나 보다. 구석구석 누군가의 손길로 가득한 두 도시는 어딘지 모르게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올해로 10년이 지났다. (고작) 스물네 살이던 나에게, 4년이라는 시간을 꼬박 보낸 대학은 내가 소속된 집단 이상의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 그곳에서 나는 이십 대 초반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쉼 없이 지나 보냈다. 디자인에 갓 입문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우리의 능력을 믿었다. 지금쯤은 모두, 내 세상 하나도 바꾸기 어려운 현실 속에 살고 있을 테지만. 개성을 생명같이 생각했던 미대생들은 해괴한 헤어스타일에 얼굴 여기저기에는 피어싱을 하고 벽화로 가득한 그 거리에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끔, 정말 가끔 열어보는 구글 스트리트뷰로 보이는 대학 건물과 통학하며 지나다닌 길들은 지금도 여전히 내 코 끝을 찡하게 한다.
그리하여 멜버른의 최대 자랑인 빅토리아 뮤지엄이나 아쿠아리움에서 만난 것은 진귀한 미술품도 희귀한 바다 생명체들도 아닌, 기억 저편의 내 모습이었다. 그 도시의 구성원일 때는 느낄 수 없던, 여행객으로써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만났다. 한 때는 이 그림 속에서 숨쉬었을 과거의 나에게서 한 발짜국 떨어져 나와 들여다보는 기분이랄까. 약간의 향수와 나른함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 달큼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되짚어 본 내 추억이 씁쓸하지만은 않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멜버른에 다녀와 토론토를 쓰고 말았으니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몸이 남반구를 향하는 동안 마음은 북미를 바라보았나 보다. 아무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