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4_온전한 휴식

정지된 시간의 간격들

by 일랑




여러 번의 여행이 있었다. 도착한 곳은 모두 달랐지만 목적지는 늘 온전한 휴식. 그러나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나를 푹 쉬게 해 준 숙소가 몇이나 되었나 생각해보면 막상 많이는 떠오르지 않는다. 동행과 함께 일 때는 외롭지도 않고 나름의 재미가 있었지만 혼자만의 시간은 없었고 어떤 숙소는 운치 있지만 오래되어서 불편했으며 어떤 숙소는 작아서, 또 어떤 곳은 넓지만 방음이 안되어서 등등 수많은 이유들이 나의 완벽한 휴식을 방해했다. 물론 돈을 아주 많이 지불했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국빈급 대우를 받으며 쉴 수 있었겠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기준에서 고른 숙소들은 그러했다.


멜버른에서 나는 부티크 호텔과 에어비앤비를 선택했다.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할 때는 (혼자 여행하는 여자이니 안전상의 이유로) 집 전체를 빌린다. 두 숙박시설의 가격은 비슷했지만 위치가 달랐다. 호텔은 St. Kilda 쪽에 있어서 South Yarra도 가까워 동선이 쉽게 짜졌다. 시내에 비해 한적했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휴식을 취한다는 느낌이 물씬 났다. 너무나도 조용했고, 너무나도 포근했던 숙면의 기억.


부티크호텔 The Blackman
호텔 1층에는 두 개의 레스토랑이 있다





South Yarra의 Aesop 매장에 스킨케어 서비스를 예약해 두었었다. (나는 이를 위해 한 달 전 메일로 부킹을 해야 했는데 다행히도 친절하고 신속하게 대응해 주더라.) 한국에서도 종종 관리를 받으러 가는 나로서는 호주에서 태어난 Aesop이라는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단 두 곳의 스킨케어샵 중 하나인 멜버른 South Yarra지점을 지나칠 수 없었다. 또 다른 샵은 시드니에 있다. 한국처럼 여러 개의 베드가 오픈된 공간에 줄지어 있지 않고 단 하나의 베드로 운영된다. (나는 이런 모습을 처음 한국에서 겪었을 때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었다. 이제는 익숙해서 그러려니 하지만.) 이래서 예약이 중요했겠구나 하고 깨달았다. 시작하기 전 베드 반대쪽의 조그만 탁자 옆 의자에 앉아 따뜻한 티와 함께 평소 신경 쓰이거나 개선하고 싶은 피부 고민에 대해 이야기한다. 테라피스트가 조곤조곤한 톤으로 하는 질문들을 답하다 보니 시작도 하기 전에 근육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상담 내용을 토대로 테라피스트는 그 날의 프로그램을 구상한다. 그녀가 잠시 나가 있는 동안 한쪽에 있는 작은 화장실에서 탈의를 하고 나와 베드에 누워 그녀를 기다렸다. 바로 마주 보이는 천장에는 "Don't compromise yourself. You're all you've got. (스스로를 양보하지 마세요. 당신이 가진 전부니까요.)"라는 Janis Joplin의 명언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아, 디테일.


스킨케어는 가벼운 팔과 쇄골 마사지, 그리고 약간은 두피 마사지까지 곁들여진다. 나는 스스로 초민감성 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자극이 적은 Aesop 제품들로 케어를 받았다. 끝나고 나오면 그 날 사용된 제품들에 대해 테라피스트에서 설명들을 수 있고 당연히 구매도 가능하지만 케어만 받아도 이런저런 샘플을 챙겨준다. 조만간 한국에도 스킨케어 서비스를 시도할 예정이라는데 그 조만간이 언제 이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나는 Aesop 제품을 좋아한다기보다 Aesop의 브랜드 철학과 디자인을 좋아한다. 지역마다 특징을 살려 하나하나 특별한 매장들과 그들의 브랜드 메시지를 전달하는 톤이 인위적이거나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어맞는 느낌이랄까.


바라만 보아도 릴렉스되는 베드
Aesop의 디스플레이는 매장마다 다르다





에어비앤비에서 고른 숙소는 Flinders Street라는 거의 모든 문화시설에 가까웠다. 중심가이다 보니 쇼핑이 쉽고 활발한 도시의 에너지가 훨씬 더 지척에서 느껴졌다. 루프탑(옥상) 테라스에서는 야라강줄기가 보였는데, 예약할 때는 알지 못했던 디테일이다. 숙소에 도착한 점심때쯤 올라가 보고 반해 저녁에 석양을 보며 편안하게 책을 읽으려 했는데 막상 그때는 사람들로 붐벼서 (게다가 바비큐를 해대서 냄새가...) 그다지 즐기지는 못해 아쉬웠다.


도심에서 가까운 숙소의 최대 장점은 중간중간 들러 쉬었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 같이 빨리 지치는 사람에게는 큰 플러스 요인. 야무진 생김새에 비해 덜렁대는 나는 매번 숙소에 놓고 나오는 것들도 많이 필요시 중간에 들러 찾아갈 수 있었던 데다 하루를 마치고 지쳐있을 때 몇 걸음 가지 않아 숙소로 들어올 수 있으니 피로가 쌓일 새 없는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굉장히 모던하고 깔끔했던 이 숙소는 개인이 대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비슷한 숙소를 한 에이전시에서 운영하는 것이어서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이 훨씬 더 깔끔하다는 인상이 남았다.


혼자쓰기에는 여러모로 럭셔리했던 숙소
햇살을 가득받을 수 있는 루프탑 테라스
야라강은 사진에서보다 실제로는 더 잘 보였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호흡이 길어지는 느낌이다. 나는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낼 곳을 더 심혈을 기울여 찾게 되고 선택의 기준도 유명한 곳보다는 동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멜버른에 다녀오고 나서, 5박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것은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시간의 간격들과 새로움보다는 익숙함, 또는 편안함 속에서 정지되어있던 온전한 휴식으로 채워져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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