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약할지라도
회사일을 하다가 캘리그래피를 접할 일이 있었다. 주변에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지인들은 꽤 많았지만 지금까지 배울 마음을 먹을 계기도 없었거니와 워낙 악필이라 글씨에는 관심이 크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배워놓으면 직접 작업하지 않더라도 프로젝트를 꾸려가는데 도움될 거라는 생각에 클래스를 알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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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과 한글 캘리그래피가 있는데 영문은 정해진 규칙이 많아 초보자에게 더 어려운 반면 한글은 규칙에서 자유로운 편이라 짧은 기간에 배워도 성취감이 있다. (영문보다 한글 캘리그래피 수업이 더 일반적이며 난이도 때문에 영문은 심화반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수업은 펜/붓과 같이 도구로 나뉘기도 하고 상업성/취미 성과 같이 목적으로 나뉘기도 하니 수강 전 이런 부분도 미리 알아보는 게 좋다.
나는 순수하게 취미를 위한 수업을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캘리그래피 애호가들에게는 이미 유명한 '푸르윤' 선생님의 첫 서울 수업이었다. 어쩐지 20명 정원이 번개처럼 빨리 마감되더라니. 선생님은 대구에서 매주 이 수업을 위해서 올라와 주셨는데, 평소 SNS에 본인의 모습을 노출하지 않아 베일에 싸인 그녀를 실제로 만나는 것에 즐거워하는 수강생들이 많았다.
수업은 연남동(홍대입구역)에 강의실을 둔 노트폴리오 아카데미에서 진행되었다. 연필, 붓 같은 기본 도구들을 챙겨 오라고 하지만 첫 시간부터 준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선생님과 첫 대면을 한 후 수업에 필요한 도구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나서 구매하는 것이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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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윤 선생님은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으로 평면에서의 공간 활용에 능하고 수준급의 수채 일러스트같이 부가적인 스킬이 장점이다. 아름다운 밑 배경을 그리고 그 위에 캘리그래피를 올리니 세상 유일한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 분야의 강자가 되는 건 당연하겠다. 선생님의 시범을 대형 스크린으로 보노라면 수강생들은 연신 감탄밖에 하지 못한다.
쿠레타케 붓으로 연습하다 보면 나중에 다른 도구들에도 어렵지 않게 익숙해질 수 있다는 선생님 의견에 따라 수업은 쿠레타케 22호(중)로 진행된다. 초반에는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습득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잘 하고 싶은 부분에 강한 선생님한테 배우는 것이 당연하겠다. 5회~6회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각자 글씨의 특징을 개발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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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수업까지는 기본기를 다지는 시간이라 지루할 수 있다. 실제로 세 번째 시간인 단어 연습으로 넘어갈 때까지 내가 뭘 연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어 연습을 시작하면 비로소 '아 내가 이렇게 형편없이 글씨를 쓰는구나'하고 느끼게 되는데, 이때 열심히 하는 만큼 급격하게 실력이 늘어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시간에 얼마나 연습하느냐이다. 나는 세 번째 시간에 스스로의 비루한 역량에 심히 충격받았고 그다음 시간 선생님이 '지난주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평소 써보고 싶은 문구는 저장해 두자. 요즘은 캘리그래피로 쓰면 좋을법한 감성 도서들도 많이 있으니 가볍게 읽어보는 것도 좋다.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캘리그래피 작가들을 팔로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글 구조상 꾸밀 수 있는 자음은 거의 정해져 있다. 'ㅊ'과 'ㅎ'같이 획이 많은 자음이 바로 그것이다. 'ㄴ'이나 'ㄱ'같은 자음으로는 멋을 내기보다 잘 어우러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다. 푸르윤 선생님의 캘리그래피에는 띄어쓰기 대신 앞자를 크게 써서 음절을 구분해주는 특징이 있다. 이렇게 하면 긴 문장을 완성했을 때도 구도가 빈틈없이 탄탄하다. 이외에도 몇 가지 팁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기본으로 자신의 색깔을 덧입혀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