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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Jun 14. 2017

일기13_실체 없는 원망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아직 여물지 못함을
가장 절실하게 느낀다

속상하고
서운하고
질투 날 때
내 미성숙함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나는 해가 거듭날수록
무르고 둥글고 희미해져 가고
단념하고 양보하고 맞춰간다

그리고
조금 모났지만 단단했던
부족하지만 뜨거웠던
지나간 날의 나를 그리워한다


겨울은 시작되었는데
나는 벌써 봄을 그리나보다

3년 전 어느 날의 일기中




겨울로 막 접어들던 2015년 11월 썼던 일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또 현실의 장벽에 부딪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때의 나는 학교에서 한껏 벼른 칼날을 사회에서 돌을 자르는데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무뎌지고 뭉개져서 아무 쓸모없는 고물이 되어 언젠가 버려질 때까지 혹사당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던 내가 모든 것을 달리 보기 시작한 때가 있었다. 회사의 부당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나가라는 거네"라며 선배들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회사는 나가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가든지 말든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럴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우울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누군가의 음모일 거라며 무작정 키워온 미움의 씨앗이 사실은 실체 없는 존재였다니. 대상을 잃어버린 내 원망은 오롯이 나 스스로의 행복을 돌보는 시간으로 돌아섰다. 그때부터 내 안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고 회사라는 껍데기 속에 자리 잡고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이 보였다.


요즘 회사원들은 마치 일시적으로 회사에 소속된 프리랜서 같다. 단순히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이기적으로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소속되어 있는 동안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더라도 내가 부서질 정도로 충성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언제든지 내 행복과 만족을 위해 다른 조직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들. 이 조직이 아니라도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들의 일시적인 모임 말이다.


조직 안의 우리가 행복하길 바란다. 만약 마음속에 원망이 있다면, 대상의 실체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대단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비관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미움받고 있다는 생각에 미움을 키우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자는 말이다. 지금도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 않나, 3년 전 저 일기를 쓰고 있던 내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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