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을 대하는 자세
시작은 했지만 어디서부터
또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스럽다
대학 졸업 후, 한동안은 마치 알바를 구하듯 아무렇게나 검색엔진에 구인공고를 찾아다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기재된 메일로 이력서를 보내자 바로 전화가 오더니 면접을 보잔다. 연봉협상이고 뭐고 없이 당장 시작하되 주는 대로 받는 시스템이던 곳. 열명 남짓의 동료들을 좁고 어두침침한 사무실에서 처음 대면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본적인 판단력 조차 없었더랬다.
해외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첫날부터 번역을 했다. 엄지손가락 쭉 편 길이만큼 두꺼운 해외원서를 출근부터 퇴근까지 번역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사장님, 즉 W가 사무실에 있는 날이면 십여 명 정도 되는 직원들을 돌아가며 접견실로 불러들여서 밖에서도 다 들리는 소리로 한 시간씩 소리를 지르고는 했는데, 예를 들면 "네가 돈을 못 벌어오는데 내가 월급을 주는 게 맞냐"라던가 "너는 지금 여기서 배우고 있으니 되려 돈을 내야 한다"는 반복적인 레퍼토리였다. 신기하게도 W의 화난 목소리나 얼굴이 아니라 말하는 내내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두드리던 소리만 뇌리에 깊게 박혔다. 물론 이런 상사들은 꽤나 흔하다고 알고 있고 이후로도 만난 적 있다.
참고로 내 전공은 외국어가 아니다. 그리고 채용된 포지션도 영어 관련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출근과 함께 무의미해졌고 나는 몇 달 동안 번역을 했다. 이때 개발된 능력은 나중에 다른 회사에 가서도 요긴하게 쓰이기는 했다. 거진 한 권을 다 번역한 원서의 내용은 W가 나가는 대학 강의자료로 쓰였다.
나름의 윈윈이었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좀 편할 듯하다
어느 날 회사 선배가 나보고 '요 앞에 가서 네 막도장을 파오라'라고 했다.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나는 조금 신까지 났었다. 왜인지도 모르면서 '막'자가 들어있는 이 도구는 재미있는 물건일 것 같았나 보다. 이름 석자를 알려주고 판 막도장은 회사에서 서류를 위해 계속해서 쓰였는데, 나중에 서무담당 선배에 의해 이것의 쓰임새를 알 수 있었다. 당시 W의 회사는 국가기관이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선행(한다고 말만)하고 이에 따라 지원받는 보조금이 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했었는데, 내 학력으로는 일종의 연구원으로 인정받아 내 앞으로 추가 연구비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는 내 통장으로 이 연구비가 들어올 때마다 다시 회사 계좌로 송금해줘야 했다. 신나서 파온 막도장은, 내가 (듣도보도 못한) 이 연구에 동참했다는 서류를 만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내 손으로는 찍어볼 기회도 없었다. 이렇게 서류를 만들어 보내기 전 며칠 동안은 사무실에서 밤새우듯 야근을 하며 인터넷에서 자료를 긁어모아야 했다.
선배들은, W가 말만 그렇게 막 했지 나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간증이었고 별로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내 밑으로 신입 아이가 하나 들어오게 되었다. 채용 과정에서 있었던 W의 공격적인 언사 때문인지 그녀는 내내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출근한 지 며칠 만에 나에게 "저 잘릴 것 같아요"라고 했었다. 신입이 잘리다니 말도 안 된다, 사장님 원래 그런 소리 많이 하신다며 안심시켰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째 되던 날 "저 이제 그만 나오래요"라는 그 친구의 말에 말문이 막혀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뽑아놓고 일주일 만에 자르는 회사의 사장님이라니, W의 저의가 궁금했다. 나는 그곳에서 다섯 달을 일하고 그만두었고, 나오는 마지막 날까지 W가 지시했던 책 한 권을 성실하게 복사해내며 잔여 감정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일방적인 퇴사 선언이어서
출장으로 부재중인 W를
끝내 대면하지 않고
사무실을 떠났다
짐을 싸서 나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오는 길에 서무담당 선배에게 내 막도장을 퇴사 선물로 요구해 받아내기도 했다. 그날 저녁에 W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주 뒤 사무실 선배에게서 한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내 계좌로 들어간 '연구비'를 회사 계좌로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법적으로) 안 줘도 되는 돈이었겠지만 그런 일로 다시 연락받고 싶지 않아 바로 송금해버렸다. 나중에 수수료 500원이 내 돈에서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땅을 치면서 말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직접 겪은 W에 관한 이야기다.
이후로 나는 조금 더 멀쩡하고 큰 회사에 자리 잡았고 의외의 인터넷 기사에서 W를 다시 만난다. 그가 공공기관의 재단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구비를 빼먹던 기관의 재단장이 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정해진 3년의 재임기간이 끝날 즈음 그의 행보가 궁금해져 찾아본 기사는 W가 췌장암으로 별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의 나이 50대 초중반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W의 딸. 그는 늦게 결혼해서 나이에 비해 어린 딸이 있었다. 아마도 중학생, 많아봤자 고등학생일 금지옥엽을 두고 그는 어떻게 갔을까.
내가 겪은 일들도
그가 행했던 일들도
모두 부질없다 느껴졌다
W가 세상에 없다고 해서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미화되는 기적은 없었다. 기억은 기억대로, 연민은 연민대로 남았다. 하지만 그 소식으로 변한 건 내 기억 속에 독보적인 악역이었던 W가 이제는 선이나 악으로 치우치지 않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만 보인다는 것이다. 나도, 그리고 우리 누구라도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인생의 끝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면 나는 이 생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누군가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날까,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고통만 있을까.
어찌 되었던, 세상은 산 사람들의 것이다.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또 두려워하면서 남은 생을 살 수는 없다. 그가 끝까지 병마와 싸웠기를, 마지막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기를 바란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모두
부질없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결코 의미 없는 삶은
아니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