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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주Ivy Jun 03. 2022

척쟁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나는 000에 중독되었다

~하는 척을 해본 경험이 있는가?

범위를 좁혀보자면 하기 싫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마음을 무시한 채 웃으면서 좋아하는 척, 관심 있는 척, 또는 잘하지 못하면서 잘하는 척 잘 모르면서 아는 척 말이다.


이유는 사람의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괴롭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척쟁이로 매일을 견뎌내야 했다.


나를 싫어할까 봐, 상처받기 싫어서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척의 임무가 끝나는 순간,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는 두려운 시간이 온다.


비밀을 고백을 하자면, 나는 남들 앞에서는 잘 웃고 친절한 사람, 돌아서면 자기를 괴롭히고 우울함에 빠진 척쟁이 었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힘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가? 나의 일상 방해꾼은 디저트,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디저트는 애증의 관계였다.


미치도록 생각나고 맛을 보고 싶은 대상이자 먹은 후에는 죄책감을 들게 만들었고 후회와 분노의 감정을 자아내는 미운 존재였다. 


폭식증 자가진단을 해보니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하다고 나왔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호르몬 불균형 때문에 생겨 지나가는 증상이겠지, 오늘 살아가기도 바쁜데 나중에 하자, 라며 가볍게 넘겼다.


워킹 홀리데이로 토론토에 왔기 때문에 다음 달 렌트비를 내려면 하루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50개 넘는 이력서를 돌린 효과가 있었는지 몇 군데의 인터뷰를 한 후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영어 모의고사 듣기에만 익숙해져 있는 나의 귀는 온갖 악센트가 섞인 영어를 처음에는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심지어 캐네디언의 완벽한 영어도 너무 빨라서 알아듣기 힘들었다.


영문과 출신이어서 영어만큼은 자신 있었던 나는 형편없는 듣기 실력에 좌절을 했다. 잦은 실수가 계속되자 매니저에게 불려 가 몇 번이나 혼이 났었다. 


특히 돈 관련 실수를 했을 때는 백인 사장이 내가 돈을 쉽게 보는 것 같다는 뉘앙스로 자기 돈을 가지고 실수하는 것은 용납 못한다라는 말까지 들은 적도 있다. 


혼나는 모습을 많이 본 직장 동료들은 다가가지 않는 이상 내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 당시 말하기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궁금하지도 않은 어제의 하루를 물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을 상대하고 나니 서비스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내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못 알아 들었을 때마다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못했다.

Wow, Really?, Nice, That's good!라고 대답하면서 대충 상황을 넘기려고만 했다.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알아듣는 척하는 거짓 대답을 밥 먹듯 했다.


상처 투성인 내 마음은 위로가 피로했다. 나 자신에게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는 한마디가 절실히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숨기는데만 급급했다. 


쓰라림을 잊기 위한 따뜻한 존재가 필요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진열된 달콤한 도넛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너의 힘들었던 하루를 위로해줄 거야 모든 도넛들이 공짜야, 저녁 비용도 아낄 수 있어! 나를 데려가 줘'


마감 후 남은 도넛과 쿠키들은 모두 폐기 처분하기 때문에 원하면 집에 싸갈 수 있었다.


달달한 향의 유혹에 뇌는 정신이 없었다. 의지력을 발휘할 새도 없이 설득을 당했고 어느새 남은 디저트들을 양껏 두 손에 쥐고 집에 가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중요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책상에 앉을 새도 없이 도넛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초콜릿으로 코팅된 겉면이 나의 혀에 닿았을 때의 쾌감은 불꽃놀이를 보는 것만큼 짜릿했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촉감은 속상했던 나의 마음을 알아채고 포옹해주는 것 같았다.  


쿠키를 먹을 때 윗, 아래 어금니가 부딪히면서 나는 바삭바삭 소리는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부수는 것 같아서 속이 시원했다. 먹을 때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오감을 충족해주는 디저트를 멈출 수 없었다. 

그렇다. 치명적인 녀석과 무언의 노예 계약서를 맺었다.


몇 개를 허겁지겁 먹고 나니 배가 어느 정도 불렀다. 위와 뇌가 이제 당의 한도가 찼으니 그만 먹어라고 명령했지만 청개구리 심보로 보라는 듯이 남은 디저트들을 뱃속으로 넣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아무 생각 없이 먹는 순간이 좋아 하루, 일주일, 한 달 넘게 매일 그 시간을 찾았다. 


그 후에 밀려오는 후회, 의지력 없는 나에 대한 좌절, 자기 비난은 거대한 파도가 덮치는 재앙 같았다. 재앙은 분노를 낳아 충동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다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남산만 한 배를 부둥켜안고 지쳐 잠이 들었다. 

내일은 하염없이 찾아왔고 불평을 하는 손님들과 예민한 직장 동료들에게 웃어야 했다. 

이러한 생활이 두 달째 반복되던 중 이렇게 두다가는 큰일이 나겠다는 위험을 감지했다. 

맏딸을 믿고 있는 부모님에게 힘들다는 감정을 도무지 말할 수 없었다. 

토론토에 온 지 두 달이 되었지만 하루를 살아가는데 급급해서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힘든 마음을 그저 마음 한편에 버려놨다. 혈관에 노폐물이 쌓여 혈관을 막으면 뇌졸중을 일으키는 것처럼 감정 노폐물이 뇌에 쌓여 생각 회로가 막혔고 디저트에 대한 강한 집착을 만들어 냈다. 


위험함을 감지했던 감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져 익숙한 감정으로 변했다. 밑바닥인 모습을 남에게 들킬까 봐 더욱더 밝고 행복한 척을 했다. 이중적인 나의 모습에서 오는 공허함의 격차는 시냇물에서 건널 수 없는 바다까지 벌어졌다. 


체중이 증가한다는 두려움도 무섭게 따라왔다. 찢어질듯한 배를 갈라서 다 꺼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디저트를 폭식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살만큼은 찌지 말자라는 생각에 먹었던 디저트를 게워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몸에 이상이 왔다. 

열이 심하게 났고 바늘로 위를 찌르는 듯한 아픔이 찾아왔다. 일주일 정도 누워 지내면서 '제발 암이 아니게 해 주세요. 다시는 디저트 폭식 안 할게요.' 라며 알고 있는 모든 신들에게 수 천 번은 빌었다.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를 압도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눈을 떠보니 창 밖으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쨍한 햇살이 보였다. 나의 어두운 마음과 달리 토론토의 여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떤 이유였는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새들의 노래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자전거를 신나게 타는 커플이 눈에 들어왔고, 패티오에서 점심을 즐기는 노부부가 보였다.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학교를 마쳤는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하교하는 학생들도 눈에 보였다. 


멍하니 하염없이 걷던 중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브런치 집에 자석처럼 이끌리듯이 들어갔다. 

안 씻고 나와 꾀죄죄한 모습에 창피했지만 종업원 분이 웃으며 따스하게 맞아주셨다. 덕분에 얼었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풀렸다. 


포근하게 안아주는 햇살이 옅은 미소를 짓게 했다. 브런치를 함께할 상대는 없었지만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대화 소리에 꾹 다물고 있던 나의 입을 열게 했다.


"왜 그렇게 디저트를 먹는 거야?"- 내면의 친구


"..... 몰라 계속 생각이 나. 뇌가 고장 난 것 같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 나


"지금 마음이 어때?" - 내면의 친구


"힘들어..." - 나 


"그래 이것부터 물어볼게. 무엇이 너를 힘들게 하니?"- 내면의 친구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가슴이 답답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내일이 무서워. 디저트가 계속 먹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지내고 싶어. 소중한 사람들과 브런치 먹으면서 대화하고 웃고 싶어. 지금은 나 혼자가 된 기분이야." - 나


"속마음을 얘기해줘서 고마워. 너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다 얘기해도 괜찮아." - 내면의 친구


"행복하고 싶어. 삶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어, 길을 잃었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앞이 캄캄하고 무서워."  

- 나


"무서운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그럴 때는 어떻게 하고 있어?" - 내면의 친구


"디저트를 먹으면서 아무 생각 안 해. 먹을 때는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 나의 실망스러운 영어실력,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어서 좋아." - 나 


"그랬구나! 너는 무엇을 했을 때 기분이 좋아?" - 내면의 친구 


"옛날에는 새로운 경험이 좋아서 여행도 많이 했어.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아했어. 몸을 움직이는 활동적인 것은 다 좋아하는 편이야. 지금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그냥 무기력해." - 나 


"그럼 이것부터 묻자. 계획한 대로 토론토에서 지낼 거야 아님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내면의 친구


"음... 한국이 그리운 건 사실이야 내가 도움이 필요한 것도 인정해.

폭식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다 동원해서 스스로 극복하고 영어실력도 높여서 당당하게 한국에 가고 싶어.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면 분명히 후회할 거 같아" - 나


"방금 네가 내일부터 당장 해야 할 것을 말했어! 아주 잘했어! 그것부터 천천히 해볼래?" - 내면의 친구


순간 마음 저 깊은 속에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솟아올랐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생겼다.

깜깜무소식이었던 세로토닌이 오랜만에 찾아와 딱딱하게 굳어졌던 뇌를 조금은 말랑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자문자답이었지만 내 안의 또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한 듯했다. 내뱉었던 말들을 잊지 않기 위해 빠짐없이 휴대폰에 메모해놨다.


변화의 첫 발걸음을 축하해주는 듯이 때마침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나왔다. 어느 때보다 살 맛이 나게 만드는 식사였고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사는 맛이 난다 = 내일이 기대가 된다, 의미가 있는 삶을 산다라고 해석을 해본다.


캄캄한 내일이 두렵고 무기력해진 내 상황과 거리가 멀다고만 생각했다. 오늘 느꼈던 살 맛이 난다는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나 자신과 대화했던 메모를 꺼내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쉽게 고쳐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폭식증이 반복되더라도 절대 게워내지 않기로 약속했다. 대신 오늘 했던 것처럼 내 안의 친구와 대화하면서 걷기로 했다. 다짐이 무너지지 않게 수만 번 다짐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뭔가를 더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벅찬 일이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정하는 게 나 자신과 약속을 더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자신감이 조금 더 생겼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자기 비난과 자책 절대 하지 말기

통제할  없는 충동적인 마음이   방안에 혼자 있지 말기

부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단어, 말은 일절 사용하지 않기

혼자라는 생각하지 않기


아무렇게나 엉켜서 억눌렀던 감정들을 하나하나씩 걷어내니 꽉 막혀 탁했던 마음이 청소가 되는 기분이었다.

  

일주일은 폭식 안 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안 들겠지라는 마음은 3일 만에 처참하게 무너졌고, 그 자리에 자기 비난과 분노가 때를 기다린 것처럼 단숨에 들어섰다. 


내 기분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먹으라고만 명령하는 독재자 앞에서 내면의 친구에게 울분을 토했다.


"나는 구제불능 의지박약 한 사람이야, 디저트를 보면 뇌가 고장 나서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이걸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어."- 나


"속상하겠구나, 나에게 다시 솔직한 감정을 말해줘서 고마워, 힘든 건 당연한 거야, 너의 잘못이 아니야! 언제든지 어려우면 어렵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내게 얘기해줘, 폭식증은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고 감춰야 하는 모습이 아니야.  


음식으로부터 사랑을 채우기 전에 너는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존재야." - 내면의 친구


그렇다.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서 소통하는 대신 혼자서 방 안에서 먹는 행위로 위로와 사랑을 찾으려고 했다.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것이 진실한 마음의 소리였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서 처음부터 사람과 관계를 맺고 알아간다는 것이 무섭고 막막했지만 방안에서의 고립이 아닌 길거리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기로 했다.


"죽음의 공포보다 강한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

인생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해결할 길은 오직 사랑뿐이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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