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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주Ivy Aug 29. 2022

당신은 충분히 섹시하다

지금까지 춤을 못 춘 이유는?

오후 5시 48분, 수업 마치기 2분 전 긴장된 마음이 심장박동 수를 높였다. 교과서를 덮고 가방에 넣을 준비 했다. 잽싸게 뛰어나가려고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수업 마치는 Thank you 소리가 들리자마자 책을 가방에 욱여넣고 부리나케 학교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6시에 시작되는 줌바 수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였다. 줌바 수업실은 큰 거울이 사방면으로 도배되어 있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춤출 때의 표정, 움직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었다.


6시 1분 도착, 강사가 줌바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학생들과 서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담한 키를 가진 나는 20명 남짓된 인원을 비집고 앞자리로 갔다.

내가 제일 잘 나간다는 마음으로 건방진 모드 스위치를 켰다. 살사댄스의 섹시한 동작을 할 때면 내 표정은 섹시하게 변했고, 레게톤의 힘찬 몸짓을 할 때면 카리스마 있는 표정이 나왔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이런 느낌일까, 음악에 맞춰 표현하는 몸짓은 이때까지 겪어보지 않았던 희열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가지각색의 바디크림 향기가 코를 감싸며 줌바 수업이 시작됐다. 학생들의 춤이 열정적으로 치닫으면서 향긋함과 땀냄새와 뒤섞여 진한 인간적인 냄새를 풍겼다. 엉덩이, 골반, 가슴, 다리, 손과 발에 격렬함이 더 해지면서 스트레스도 같이 털어버렸는지 몸이 가벼워졌다.

귀에 걸린 입꼬리는 높은 함성을 자아냈고 짝을 지어 상대와 마주 보며 티키타카 하는 동작을 하면서 오랜만에 느껴본 단합력에 전율을 느꼈다.

음악에 심취해 열정 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과격하게 춤을 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발은 붕 떠 있는 듯 자유로워 신나는 리듬에 맞춰 발재간을 선보였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 없이 뛰어노는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Feel the music~~' 줌바 강사의 외침과 함께 힘차게 yeah~~ Hey~~ 외친다. 출생지역이 다른 사람들과 한마음으로 함성을 지를 때면 나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수업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오면서 뭉클해진다.


30 색이 넘는 크레파스 통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형형색색의 크레파스가 하얀 도화지에 어우러져 멋진 그림이 완성되는 것을 보면서 창조의 기쁨과 조화로움의 미()를 배웠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의 고유의 색이 하모니를 이루는 것은 마치 구름 속에서 무지개를 발견한 것 같은 가슴 벅참을 안겨줬다.


섹시함을 잊고 산지 오래, 잠자고 있던 섹시함을 끌어올리는 열정이 가상했는지 강사님이 나를 앞으로 불렀다. 'Me? Me?' 잘못 불렀겠지, 옆에 키 크고 날씬한 백인 학생이겠지라고 생각을 할 찰나에 'Yes, You! Don't be shy, Come here! show your energy!'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이 비웃지 않을까?' '나보다 잘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굳이 왜 나를 불렀을까' '뒤에서 나를 욕하지 않을까' 걱정과 두려움의 악마가 귓가에 끊임없이 나가지 말라고 속삭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강사님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파티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다가가 커플 댄스를 청하며 구애하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강사님의 탄탄한 엉덩이가 코앞에서 섹시하게 씰룩거렸다. 내가 남자였다면 두려움 따윈 떨쳐내고 그녀의 몸짓을 받아주었을까라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하얀 이가 활짝 드러난 강사의 미소와 쌍꺼풀진 큰 갈색 눈동자가 ‘걱정하지 마,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You can do it' 한마디에 이끌려 무대 앞으로 나갔다.

'이왕 나간 거 멋지게 추고 오자 어차피 다들 모르는 사람들인데 뭐 틀리면 어때 괜찮아!’

영어 프레젠테이션 할 때 이미 머릿속이 하얘지는 끔찍한 경험이 있어서 똑같은 상황 반복이 될까 봐 두려웠다. 학생들의 눈을 응시하지 못하고 허공만 바라봤다.


오른편 저 멀리서 yeah~~~ Woo~~ let's go!! 구원의 소리가 들렸다.

얼떨결에 학생들 눈을 마주쳤다. 선한 눈동자들과 미소 짓고 있는 입모습에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살았다'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두려움을 주입하던 악마는 사라졌다. 친구들이 나의 감정 변화를 눈치를 챘는지 ‘You are on fire~~ Keep going!!’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스스로 만든 생각에 갇혀 닫혀있던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춤 클래스가 열리는 이곳에서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법을 배웠고 함께 어우러질 때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감사했다. 뿌리내렸던 우울감은 나의 흥에 짓눌려 소멸되고 자신감이 싹을 틔워 자라고 있었다.


줌바의 기본 동작은 라틴댄스 장르인 살사, 레게톤, 메렝게, 쿰비아 리듬에 따른 4가지 핵심 동작을 따른다.


살사를 출 때면 남자를 유혹하는 눈빛을 발산한다. 여전사를 연상시키는 레게톤의 몸짓,

사이다를 마실 때 톡 쏘는 듯한 시원한 메렝게 동작들,

하와이 바닷가에서 자유로운 춤을 연상시키는 쿰비아 리듬으로 엮어진 한 시간은 지루할 틈이 없다.

무료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줌바 클래스처럼 매일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꺼져있던 흥의 스위치를 켜자 밥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살 맛이 났다.

수학여행을 앞두고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는 두려움도 있지만 속박되어있던 것에서 해방되는 설렘으로 가득 차는 것처럼, 친한 친구들과 첫 서울 모험의 기대에 부푼 것처럼 내일이 기다려졌다.


아무런 걱정 없이 까불며 춤을 췄었던 초등학교의 나,

시험기간 교실 한복판에서 당시 유행했던 소녀시대 춤을 추며 스트레스를 날렸던 중, 고등학생의 나,

대학교 입학 후, 남자 친구를 만들어보겠다고 어설픈 화장을 짙게 한 채 클럽에서의 춤이 마지막이었다.


‘이 정도가 돼야 성공했고, 잘 살아왔다’라는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무엇을 좋아하지도 모른 채 대기업을 목표로 두고 취직 준비를 하면서 내면의 흥은 메말라 사막이 되어갔고 부끄러움 선인장이 뿌리내렸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할수록 진정한 나는 사라져 갔고 ~척하는 빈 껍질만 남겨졌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은 재능 있는 사람인 가수, 댄서들만이 할 수 있다고 선을 그어 놓았었다.

매일 나만의 몸짓으로 음악을 표현했더니 춤추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해보지도 않고 '나는 안될 거야'라는 문을 수없이 만들어 스스로 만든 미로 속에 갇혀있었다.


학교, 집, 도서관의 반복인 학생 라이프는 비슷한 일상의 패턴으로 하루가 지나간다.

어제 먹던 비슷한 음식을 먹고 등교한다. 수업 마치고 과제하다가 저녁을 먹는다. 그날 하루 고생한 내게 쉬는 시간을 준다는 핑계로 스마트 폰과 넷플릭스로 도망친다. 예습과 복습을 대충하고 잠이 든다.

익숙한 감정으로 일상을 지내다 보니 가슴이 뛰지 않았다.

‘대학 졸업한 후 취직하고 돈 벌기 시작하면 행복해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미루고만 있었다.


학창 시절 '성공이 곧 행복'라고 주입됐던 이데올로기에 갇혀 행복한 미래를 위해 오늘만 참자라는 생각으로 그저 시간을 흘러 보냈다.

참는다는 생각이 보상심리를 더 강하게 작용시켜 음식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 냈을까.


우연히 참가한 줌바 클래스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였던 쳇바퀴 굴러가는 삶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시간 날 때마다 줌바가 열리는 곳이면 찾아갔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땀을 흘렸고 열정을 느꼈다.

타지에서의 고단과 힘듦을 씻어내려 주는 한 시간의 뜨거운 온기가 내일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념일, 대학 합격, 취직, 결혼, 출산, 승진 같은 특별하고 큰 일들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왔을까?

오늘도 영혼 떨리는 삶을 위해 섹시한 눈빛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엉덩이를 흔들어본다.


'Dance is the hidden language of the soul.'

'춤은 영혼의 감추어진 언어이다.'


-Martha Graham (마르다 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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