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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주Ivy Sep 06. 2022

언니의 독재정치

히스테리 그만 부려 상처받아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그 겨울, 너와 나는 떡볶이가 먹고 싶어 무작정 나가 눈을 맞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를 긴 꼬챙이에 꽂아서 후후 불어 너 한번 나 한번 먹었지, 떡볶이 위로 눈이 사르르 녹는 것을 보고 우리는 눈꽃 떡볶이를 먹는다며 까르르 좋아했어. 그 장면은 어느 기억보다 생생하게 사진 찍혀 머릿속 행복 사진첩에 잘 간직하고 있단다.


타지에서 사는 것이 힘에 부칠 때 급하게 행복 앨범을 펼쳐 눈꽃 떡볶이 사진을 빔 프로젝트에 쏜단다. 머리 위로 한 장면이 영상으로 변해 너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나의 맛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와. 어두운 마음에 엔도르핀이 따스하게 감싸 입가에 미소 짓게 만들어. '어제도 해냈으니 오늘도 할 수 있어 파이팅' 나지막하게 내뱉고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는단다.


한국에서 살 줄 알았던 내가 어쩌다 보니 멀리 떨어져서 살게 되었어.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꺼내볼 수 있는 따뜻한 사진을 선물해줘서 고마워. 그 장면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척박한 현실에서 오늘도 살아 냈다는 감사함을 안겨준단다.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대자연의 장관과도 맞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그 한 장면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저장되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네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추억들을 꺼내 볼 수 있도록 앞으로 함께할 경험들을 눈으로 담고 마음으로 찍어서 머릿속 앨범에 차곡차곡 저장하고 싶구나.


한국을 떠나 토론토에서 지낸 지 4년 차로 접어드는 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학교를 마쳤지만 여전히 폭식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여동생이 토론토에서 사회복지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막 졸업한 나는 영양학과와 관련된 직업은 공지가 나는 대로 지원했다. '병원, 요양원, 학교, 회사 어디든 감사하니 제발 일하게 해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고치고 지원했다.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에 전부터 일하고 있었던 카페에서 계속 일하며 취업준비를 병행했다.


한 군데는 연락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지낸 지 일주일, 바쁜 시기여서 일처리가 늦는 걸 거야라고 합리화를 하다 보니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끼고 살았지만 잠잠했다.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일단 원하는 직급이 아니더라도 발을 담그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병원 요리사, 요양원 조리사 등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직종이면 공지가 나는 대로 지원했다. 얼마 되지 않아 인터뷰를 하자는 전화들을 받았다. '그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원했던 직업은 아니지만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차근차근해보자!'라고 생각하고 요양원에서 잡힌 인터뷰를 봤고 합격했다.


이곳이 캐나다인지 필리핀인지 헷갈릴 정도로 매니저 수퍼바이저 제외하고 일하는 직원 90%가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토론토에서 요양원과 병원 쪽은 필리핀 사람들이 꽉 잡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내 나잇대와 비슷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이모뻘 이상 되어 보였다. 고향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결혼 후 아이들을 위해 토론토로 이민을 택하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한국어가 편한 것처럼 그분들도 타갈로그어가 편해 내 앞에서도 모국어를 거침없이 쓰셨다. 동병상련을 느껴 이해했다. 오히려 그들이 하는 대화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자유롭고 좋았다. 그녀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가족을 위한 마음이 뜨거웠다. 투잡은 기본이고 쓰리잡도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었다. 엄마들의 기운에 감탄하며 나도 열심히 일해보자라는 마음이 싹텄다.


요양원에 계신 분들이 새로운 얼굴을 알아보셨는지 많은 시선들이 내게로 향했다. 몇몇 어르신 분들은 내게 손을 흔드시며 미소 지으셨다. 저 동양인이 과연 일을 잘해 낼 수 있을까라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시는 분들도 있어 살짝 기가 죽어 있었다.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애썼다.


내 직무는 점심에 사용됐던 그릇들을 모두 모아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하는 작업부터 시작된다. 큰 식기세척기에 그릇들을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음식 잔여물이 남아있는 그릇들은 따로 빼고 깨끗한 그릇들만 다이닝 룸으로 가져가서 정리한다. 저녁 식사되기 전까지 각 층 휴게실에 필요한 간식, 커피, 차, 주스 등을 채워 넣는다. 1층부터 5층까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 준비할 시간이 된다.

커피와 차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식전 빵을 오븐에 데우고 있으면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모여 앉았다.


"Would you like to eat bread? white or whole wheat?" (흰 빵, 통곡물빵 중 어떤 빵 드릴 까요?)

"Would you like some butter with that?" (버터도 드릴까요?)


커다란 빵 소쿠리를 팔에 끼고 다른 한 손에는 집게를 들고 식전 빵을 나눠드렸다.

내 이름을 물어보며 관심을 가지고 따뜻한 눈길을 주는 분들도 있지만 나를 힐끗 보고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휙 돌리는 분들도 계셨다.

딱딱한 무표정에 겁먹은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활짝 미소를 지은 가면을 이중으로 썼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빵이 끝나자 이번엔 커피와 차 순서가 왔다.


"Would you like Coffee or Tea? How would you like it? (커피 차 중 어떤 거 드릴까요? 어떻게 타 드릴 까요?)


빵 배식할 때 말을 건네었던 얼굴들이어서 이번엔 긴장이 조금 풀리고 자신감이 붙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마셔왔던 커피와 차에 자부심을 느꼈는지 당당하게 자신들의 취향을 말했고 덕분에 나의 손은 바빴다.


사전에 조사한 음식 선호에 맞게 서빙을 할 차례였다.

생선이 촉촉하지 않고 말랐다는 등, 고기가 질겨 씹기 힘들다고, 평소에 먹던 매쉬 포테이토 맛이 아니어서 못 먹게 다는 불평불만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부정적인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내가 만든 요리도 아닌데 쏟아지는 불평에 Sorry라는 말을 수십 번 해가며 겁에 질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저녁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면 온 몸이 녹아내려 녹초가 됐다. 축 늘어진 몸으로 지하철에 몸을 싣으면 얼른 씻고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집에 가면 긴장이 풀려 고프지 않았던 배가 고팠고 보상심리가 작용해 식욕이 폭발했다.

학교 다닐 때 줌바로 진정됐었던 폭식증이 다시 시작되니 혼란스러웠고 나 자신에게 큰 실망과 좌절을 반복하던 때였다.


감정노동과 폭식으로 인한 감정 소모에 지칠 대로 지쳤다. 당시 토론토에서 지내고 있었던 여동생에게 언니가 폭식증을 겪고 있다고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장녀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어렸을 때부터 들어서 그런지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동생은 나와 남자 친구가 살고 있는 집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놀러 와 하룻밤 자고 갔다. 요양원 일을 시작하고 재발된 폭식증으로 루틴이 무너지자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동생이 오기로 한 금요일, 동생과 K(남자 친구)는 일 마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불평불만을 들었던 하루였기에 몸과 정신이 지쳤지만 동생과 K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피곤해도 밝은 모습을 보여줘야지' 차 문을 열기 전까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다짐했다.


"일주일 동안 잘 지냈어? 우리 저녁 뭐 먹을까?"- 나


일이 바빠 제대로 된 끼니를 먹지 못했고 금요일 밤 소중한 사람들과 맛있는 저녁을 함께 하고 싶었다.


"언니, 나 배고파서 일찍 먹었어, 나는 안 먹어도 돼." - 동생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이해했다. 금요일 저녁만큼은 셋이서 함께 하고 싶었다. 실망스럽다 못해 화가 났다.


"오늘 같이 저녁 먹는다고 말했잖아! 왜 먼저 먹었어?" - 나


"나 배고픈 거 못 참는 거 알잖아, 미안해! 내일 같이 먹을게." - 동생


"오늘만큼은 같이 먹고 싶었단 말이야! 조금이라도 같이 먹자." - 나


"별로 안 먹고 싶어."- 동생


잘 숨겨왔던 열등한 모습들과 미숙한 말들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몸이 피곤하니 역지사지는 사치였다. 상대방 입장에서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불만 많고 융통성 꽉 막힌 고집 센 노인처럼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기주의자로 변했다.


맑은 물에 검은 잉크가 급속도로 퍼지듯 서운한 마음이 퍼져 가슴속에 꽉 찼다. 좋은 언니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 날은 감정이 이성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받았던 상처와 스트레스를 알아달라고, 오늘만큼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의 힘듦을 잘 얘기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게 된다.


"너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어." - 나


이렇게 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나도 같이 먹고 싶은데 배가 안 고파." - 동생


"내가 너라면 기다렸다가 같이 먹는다. 내 마음도 모르고." - 나


"그럼 먹지 마, 안 먹으면 언니만 손해지 오랜만에 봤는데 성질을 내고 그래? 나 집에 갈래" -동생


"오랜만에 봤는데 왜 집에 가려고 해? 너 마음에 안 들 때마다 왜 맨날 집에 간데?" - 나


"몰라 이미 기분 나빠, 언니 눈치 보는 것보다 집 가는 게 나아" - 동생


이게 아닌데... 서로 일주일간 있었던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면서 맛있는 저녁을 먹는 꿈은 물거품이 됐다. 둘 사이에서 남자 친구는 어쩔 줄 몰라했다.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나는 제멋대로 고장 난 기차처럼 통제 불가능했다.


별거 아닌 것에 괜한 고집을 부렸던 것을 후회할 것이 뻔한데 그 상황에서는 감정이 앞서 쇠꼬챙이가 찌르는 듯한 아픈 말을 기어코 내뱉어 상대에게 왜 상처를 남길까.


동생은 그저 배불러서 내일 먹겠다는 것뿐인데, 계획에서 틀어졌다고 성질을 내며 독재정치를 하는 내 모습이 싫다 못해 혐오스러웠다.


차라리 오늘 하루 힘들었다고, 이런 일 때문에 상처받아서 마음이 헛헛하다고, 오랜만에 셋이서 뭉쳤으니 맛있는 거 먹으면서 고단한 하루를 풀고 싶다고 말을 했더라면 적어도 집으로 가는 길에 따뜻한 온기를 느꼈을 수 있었을까


K-언니(한국 큰언니) 자존심 때문에 힘듦을 보이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컸는지 동생이 묻지도 않았는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게 부끄러웠는지 솔직하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먹는 행복을 느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마음 한 편에서는 같이 먹으면서 폭식증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고 싶었던 이기적인 마음도 있었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겉으로는 언니로서 위하는 척, 멋있는 척하는 나 자신이 더 못나게 느껴졌다.


지나고 나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그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고, 지나서 후회를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이별도 하는가 보다.


'동생아 그 당시에 언니가 심적으로 많이 불안정했던 시기였어.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던 차가운 현실에 무서웠고 괜찮아질 줄 알았던 폭식증이 재발하니 혼스러웠어. 차라리 속 시원하게 폭식증을 겪고 있다고 말했었으면 우린 덜 싸웠을까? 언니로서 지질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솔직하지 못했어. 종종 별 거 아닌 일에 못된 말로 마음 아프게 해서, 특히 먹는 걸로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해. 힘들었던 시기에 네가 토론토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어. 네가 지냈던 2년 동안 주말마다 만나면서 싸우고 울다가 웃었지. 서로 부대끼고 지지고 볶으면서 많은 감정싸움을 했지만 지나고 나니 그마저도 그립단다. 걷잡을 수 없었던 나의 히스테리로 마음고생했을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할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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