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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은주 Nov 19. 2021

내가 엄마처럼 된다는 것

자식이 엄마를 독립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지난밤, 가습기의 물을 채워주기 위해 큰 아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이의 큰 움직임이 보였고 이불 안에서 네모난 것이 빛났다.


자고 있어야 할 아이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며칠 전 아이가 학교 간 이후 침대에 핸드폰이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의심을 했지만 무엇을 하는지 직접 본 것은 없으니까 아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심만 하던 상황을 직관하고 나니,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순간적으로 분노에 휩싸이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아이 방에 들어온 남편은 아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아이에게 날카롭게 몇 마디 쏘아 부치고 남편과 아이를 둔 채 방문을 닫고 나왔다. 속으로 아빠가 잘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곧 남편도 나왔다.


남편은 아이를 재우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 얘기해봤자 졸려서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남편의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나의 분노는 가라앉지 못했다. 당장 아이방으로 가서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서 내가 정말 화가 났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고 치자.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정말 속이 후련해질까?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데?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아이한테 얘기한다고 해서 무엇이 바뀔까?


참았다. 아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아이에게 향하려는 나의 불같은 감정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지 못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마음을 남편에게 몇 마디 말한 후 침대에 누웠다. 점점 화가 가라앉았다. 어디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1. 아이에게 실망했다. 

아이에게 핸드폰을 허락해 준 이후 잡음이 있었다. 그동안 권고, 지도, 압수 등으로 다뤄왔다. 뭐가 맞는 건지 모르니 이것저것 시도했다.


잡음의 원인은 영상과 게임이었다. 안 했으면 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지만 그건 내 욕심이다. 여러 시도 끝에 나도 포기할 것은 해야 했다.


그래서 약속을 정했다. 영상과 게임을 하고 싶을 때는 말하라고 했다. 정해진 시간에 조절만 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까지 했건만, 아이는 잠들기 전 몰래 핸드폰을 보았다. 무너지는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그동안 이 아이를 향한 믿음은 어찌해야 할까. 나는 큰 아이와 잘 지낼 수 있을까?


내 아이를 믿지만 내 아이의 나이를 믿지 않는 것이 나의 육아관 중 하나다. 즉, 나는 아이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아이가 선택한 행동에는 실망했다.


그뿐인데 이것을 생각해 내기도 전에 감정부터 쏟아낼 뻔했다. 남편 덕분에 그렇게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2. 나는 아이에게 질투를 느낀다.

이 실망스러움은 어쩌면 질투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받으며 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느끼게 해 준 사람이 바로 우리 딸이다. 


내가 사랑을 못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풀어놓을 곳은 아빠와 엄마로 한정되어 있었고 말하지 못할 때는 속으로 남겨뒀고 안 좋은 일을 빨리 잊어버리는 것을 습관화했다.


잊은 게 아니라 가린 것이라는 걸 30대 넘어서야 알았고 이로 인해 가려진 진짜 나를 찾아야 했다. 아이 때 하지 못한 일을 어른이 되어서 하려니 힘이 부친다.


그에 비해 딸은 상황마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 필요한 거 있을 땐 친할아버지, 할머니, 놀고 싶을 때는 외할머니, 고민이 있을 때는 아빠, 일상 이야기는 엄마로 나눠서 한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고 있는 나로선 질투가 난다. 나도 말할 곳이 필요했는데... 난 못했으니까...


그래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질투를 느낀다. 이런 복을 받고 자란 아이가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불만이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좋은 상황이어도 사람마다 불만족스러운 상황은 있기 마련인데 내가 참 속이 좁았다.


나와 다른 세계를 사는 내 아이에게 질투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투 인정하면서 시샘하지 않기로 했다.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이니 멋지게 클 우리 아이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지 않도록 성장하는 동력으로 삼기로 했다.


질투는 나의 힘이다.




3. 나는 아직 우리 엄마의 딸이다. 

그렇다. 나도 누군가의 딸이다. 분명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컸을 테니 우울증을 겪었을 때 죽음보다는 살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엄마를 만나는 일이 매우 불편하다. 왜 그럴까?


아이가 밤에 보던 핸드폰은 엄마가 예전에 쓰던 핸드폰이다. 


아이는 핸드폰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제한을 걸었다. 아이는 자신의 상황을 할머니에게 이야기했고 우리 엄마는 전화가 안 되는 핸드폰을 아이에게 주었다. 집에 가서 유튜브 보라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할머니 핸드폰은 안된다고 얘기했다. 자신이 가진 것 안에서 활용하는 법을 아이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도 전달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 아이는 자신의 핸드폰 사용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지만 할머니의 핸드폰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9살이면 유튜브의 유혹을 조절할 나이는 아니다. 어른도 어려운 일인데 아이에게 바라는 건 정말 큰 욕심이다.


엄마에게 아이가 좋아해도 어른이 볼 때 좋지 않은 것은 허락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엄마는 할머니는 뭐든 다 해주는 것이라며 내 부탁을 거절이 아닌 무시를 했다.

 

할머니가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뭐든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어른으로서 그게 좋은지 안 좋은지 판단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한 부탁인데 엄마는 딸에게 훈계를 듣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고 하셨다.


엄마가 말하는 할머니의 사랑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무제한 제공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것이 손녀를 향한 아낌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다.


좋다. 이건 엄마의 사랑이니 나는 더 이상 엄마를 통제하고 싶지 않았다. 부탁을 해도 듣지 않는 분이니 포기를 한 셈이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엄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엄마와 떨어지고 마음이 편하기 위해 연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엄마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내 아이 육아를 내 책임하에 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이 믿음마저 무너졌다. 아이를 향한 할머니의 사랑이 아이의 눈을 망가뜨렸다. 아이는 수면부족으로 일상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 이 결과는 누구를 위한 걸까?


이 사실을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말할지언정 돌아올 말은 똑같다. 할머니가 그 정도도 못하냐고..  


그리고 나는 엄마를 가르치려고 드는 싹수없는 장녀 밖에 되지 않는다.


더 이상 엄마에게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다. 엄마에게 말해봤자 돌아오는 고집이 똑같다면 차라리 한 발짝 더 멀어지는 게 낫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에 갈 생각이었던 친정을 가지 않기로 했다.


지금 현재 가장 두려운 건, 내가 내 딸에게 지금의 우리 엄마 모습처럼 되는 것이다. 멀어지고 떠나고 싶은 엄마, 답답하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엄마가 될까 봐 몸서리치게 무섭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엄마가 따듯한 내 편이 되길 바랐다. 그거라면 내 딸이 나에게서 덜 멀어질까? 내가 받아본 적이 없는 따듯한 지지를 하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처럼 되기 싫은데 엄마처럼 되어갈 것 같은 나 자신이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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