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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문 Mar 05. 2024

봄의 여행


어느 봄날에는 혼자 여행을 떠났다.

무작정은 아니었다. 나는 무작정 떠나는 여행보단 계획을 세워서 떠나는 여행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여행을 떠나고자 마음을 먹고서 달력 앱을 켰다. 당장 떠나는 건 어려웠고 날짜를 보니 사월 넷째 주가 가장 적당했다. 날짜를 확인하고서는 기차표와 숙소를 예매했다. 그 뒤로는 지역의 맛집과 카페, 그리고 위스키 바를 찾아 2박 3일 치의 동선을 빠르게 짜 내려갔다. 혼자 여행이라서 편한 점은 계획을 세우고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점이었다. 하루, 하루 가고 싶은 장소들을 정리하고서 여행 날짜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사월의 날씨는 꽤 변덕스러웠다. 낮에는 햇빛 사이로 걸으면 따스했고, 밤에는 바람이 차가워 외투를 입어야 했다. 삼월이 지나자 거리의 풍경은 여름의 색들로 꽉 채워져 가고 있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 위를 뒤덮은 초록잎과 화단에 보이는 자주색 진달래 꽃, 푸릇 피어오른 잔디와 아직 남아 있는 벚꽃 나무와, 어떤 생채기도 없이 가볍게 떨어진 벚꽃잎들.

한바탕 비가 쏟아지면 봄은 더 깊어지고, 봄을 알리던 것들은 저물어갔다. 작년 겨울은 내게 있어서 꽤 요란스러운 겨울이었다. 요란스럽다고 해야 할까, 소란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떤 것도 정리되지 못한 채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내 시간은 어쩐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은데 봄은 오고, 시간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일정한 속도로 바르게 흘러갔다.


예상치 못한 순간들은 한꺼번에 몰려왔다. 회사가 어려워져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해야 했고, 만나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져야 했다. 정신없이 퇴사를 하고, 마음의 준비도 없이 헤어짐을 받아 들어야 했다.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즐기지도 못한 채 덩그러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참에 쉬어보자는 마음을 먹는 것도 순간이었다. 그 마음은 좀처럼 오래 붙어 있질 못했다. 이제 곧 나는 서른이었고, 내겐 책임져야 할 강아지가 있고, 매달 나가는 월세가 있었다.

침대에 누워 보내는 시간들이 많았다. 이렇게 나태해져도 되는 걸까, 하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짧은 시간만큼이라도 내 마음에 눌러앉은 두려움을 모른 척하고 싶었다. 여전히 돌아오면 제자리였지만, 그 제자리였던 순간에서도 잠시 사라지고 싶었다.


여행지는 익숙한 곳이었다. 헤어진 남자친구와도 갔던 곳이기도 했고 친구들과도 자주 다녀왔던 곳이기도 했다. 자주 다녀온 곳이었지만, 혼자는 처음이었다. 변덕스러운 사월답게 날씨는 흐렸고 비가 내리기도 했다. 바닷가 근처로 가면 바람이 꽤 강하게 불어왔다. 바다 냄새와 흐릿하게 맡아지는 비냄새 같은 것들이 코끝을 스쳤다. 넓고 푸르게, 저 끝이 차마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바다의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파도가 치면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를 바라보다, 누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것 같은 모래사장 위로 발도장을 찍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서로가 누구인지 모른 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었다. 그들은 분명히 살아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도 지나온 생도 알지 못했다.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는 이들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둘 뿐이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도 어쩌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보기엔 나 역시 영영 알 수 없는 수많은 어떤 사람에 불과했다.


혼자 여행을 다녀온 지 곧 일 년이다. 그 짧은 일 년 사이에도 무수한 일들이 벌어졌다. 차마 다 적을 수 없는 그런 일들. 누군가에게 털어놔도 결국엔 모두 내 몫이며, 오로지 나의 것인 일들. 좋든 실든, 내가 끌어안고 가야 하는 일들이었다. 지난해의 계절은 내게 있어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다. 봄을,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겨우 견디고서야 비로소 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지난해 품고 살았던 두려움은 그 바다에 묶어 두고 오질 못했다. 묶어두고서 잊고 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잊혀지는 건 없다. 당장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작은 기억 파편으로도 수많은 기억들이 되살아 나니까.


그해 봄에 했던 고민은 아마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고민이 해결이 되면 또 다른 고민이 덮어쓰기 하듯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고 새로운 형태로 작은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맞서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나는 그것보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순간엔 맞서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어려운 순간이 있다. 그날 여행을 떠난 건 어쩌면 도망이었을까. 어쩌면 되돌아와야 했기에 가만히 있던 것일 수도 있다. 돌아와도 해결되는 건 없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 속에서 그래도 마음의 위로가 되었던 건 여행을 떠났다는 그 순간의 기억이다.


시계초침을 등지고서 걷고 싶은 날에는 홀로 떠났던 사월을 떠올린다. 그 기억을 오래, 오래 붙들며 앞으로 다가 올 시간들을 위로하고 싶다. 턱끝까지 차오른 생각들을 삼켜내지 않고 뱉어내기 위해. 그 장소는 낯설면 낯설수록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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