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아래를 걸으며 네 생각을 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토록 네 생각을 붙잡고 지내는 것도. 나름의 애도 방식이라 말하겠다. 다만, 어떤 선에서 내가 너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게 맞는지 그 방법을 찾아가는 중인 것 같다. 가만히 잘 지내다가도 네가 문득 떠오르면 몸속 깊은 곳에서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그러면 잠시 쓰고 있던 것들을 멈추고 너를 떠올렸다. 너를 떠올리면 나는 그 속에서 또 너를 떠올렸다.
지난한 시간 속에 놓였을 너를 떠올렸다가 너의 표정이 가장 다채로웠던 시절을 떠올렸다. 너의 흔적을 찬찬히 찾다 언젠가 기록했던 일기를 읽어나갔다. 이제는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 순간들인지라 글을 읽어도 낯설기만 했다. 글과 사진을 천천히 내려다보다 그래도 남겨둬서 다행이란 생각이 나를 위로했다. 다시는 열어보지 않았던, 열어볼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남겨둬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참, 너라는 존재는 내게 많은 변수를 가져다준다.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의 기준은 너와 함께하던 시절에 비롯되었고, 시간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네 앞에선 늘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네가 사라지니 이 마음의 기준도 꼭 사라진 것만 같다. 그런 마음의 기준을 안고 살아간 것도 너의 덕이었고 그때의 기억이 내게 생각보다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곱씹어본 오래된 감정들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 같아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하다.
너의 얼굴을 곱씹고, 너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너라는 이름을 되뇌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무수한 거리를 떠올렸다. 그곳은 때론 종로였고, 북문의 어느 골목이기도 했고, 선유도 공원의 초입이기도 했으며, 교토이기도 했고, 네 집으로 향했던 오사카의 어느 길목이기도 했다. 잠시 일본에 살던 너를 보기 위해 홀로 일본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홀로 짐을 꾸려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을 전부 환전해 네게 갔다. 일주일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너와 함께 벚꽃 핀 삼월의 교토를 걸었다. 그때 나는 나라에 꼭 가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왠지 우리에겐 한번 더,라는 기회가 있을 것 같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나에게 너는 다음에 또 가면 되지, 하고 말했다. 그 순간에 나는 너와 함께 갈 나라를 떠올렸다. 사슴들이 돌아다니는 나라, 왠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아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그 나라를. 나는 꼭 너와 함께 가고 싶었다.
아직도 네 집으로 향하던 그 거리가 떠오른다. 난바에서 걸어서 사십 분은 족히 걸렸고, 우리는 주로 걸어 다녔다. 신호등을 자주 마주쳤고, 앰뷸런스가 한 대씩은 꼭 지나갔다. 너는 네가 사는 동네가 노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밤마다 앰뷸런스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멀어지는 앰뷸런스 소리를 등지고 걸으며 나는 네 걸음에 맞춰 부지런히 걸었다. 어느새 이 동네와 익숙해져 있는 너를 보면서 이상하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때의 나에겐 네가 전부였는데, 너에겐 이젠 내가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이 삐죽하고 튀어나올 때면 잡고 있던 네 손을 더 꽉 잡았다.
홀로 비행기에 올라 내려다본 일본의 도시는 유난히 반짝거렸다. 저 수많은 불빛과 다채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을 너를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기에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응원하지 못했다. 어쩌면 억지스러운 마음을 품은 채 하루빨리 네가 내 곁에 오기를 바랐는지도.
가난하고, 여유가 없었던 너와 나는 여러 핑계와 이유들이 쌓여 결국에는 헤어졌다. 너를 다시 만난 어느 겨울에도 나는 너와 어쩌면 이번에는, 나라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왜 꼭 나라였을까. 그곳의 봄을, 봄날을 누리는 사슴을, 그곳에서도 목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목련을 보고 싶었다. 하얗게 피어올라 툭하고 떨어지는 목련잎을 보며 우리가 이곳에 왔음을 느끼고 싶었다.
너와 함께 했던 봄은 어느새 오래된 과거의 일로 남았다. 다가오는 봄 속에서도 나는 드문드문, 너를 떠올린다. 어느 봄날, 일본은 한국보다 벚꽃이 일찍 폈다며 네가 보내준 사진. 얼마 안 있어 그 길목을 함께 걸어가며 벚꽃 나무 아래에 서 있던 너를 담았고, 시간이 한참 흘러 너를 다시 만난 어느 봄날에도 벚꽃 나무 아래에 서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너를 담았다. 내 손끝을 스치는 사진들은 이젠 오랜 기억이 되고, 더 오랜 시간이 흐르면 이 기억들도 더는 떠오르지 않게 되는 날이 올까. 그럼에도 너를, 그때의 우리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
한 때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고, 사랑한다는 말이 진부해서 내가 쓸 수 있는 미문은 모두 끌어다 네 품에 안겨주고 싶었다. 그랬던 순간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