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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문 Mar 17. 2024

다정한 순간들

여름으로 되돌아간다.


영원이라는 말은 믿질 않지만, 그 여름 속의 시간만큼은 왜인지 영원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두려움 속에서 웅크리며 보냈던 시간들.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모든 소음이 차단된 나의 작은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침이 오지 않기를, 내일이 오지 않기를, 아무도 나를 찾기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것 같다.


팔월, 해가 지날수록 더 깊고 짙어지는 이 여름 속에서 나는 땀보다 눈물을 더 많이 흘리며 여름을 맞이했다. 느지막이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쌓여 있는 연락들을 보고서 휴대폰을 베개 밑에 밀어뒀다. 아침은 오지 않을 수 없었고 나는 과거 속에 머물며 어떤 관심도 두지 않은 채 현재와 미래를 지나쳤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괜찮아진다는 말을 믿으면서도 그 순간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영영 괴로워서 마음이 썩어 들어가면 어떡하지. 이 마음이, 나를 둘러싼 이 우울이 나를 꽉 안은 채 놓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내가 이 세상에 없는 상상을 계속해서 이어가면 그땐 어쩌지. 그런 마음이 들 때면 더 몸을 웅크리고 손을 뻗었다. 내 옆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나의 강아지를, 그 아이의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고서 고개를 돌려 그 아이를 바라봤다. 나밖에 모르는 저 새카만 눈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는 저 모습이 나를 꼭 위로하는 것 같았다.


축 늘어진 하루를 보냈다. 기분 좋은 마음이 들 때도 그 마음을 마냥 누릴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우울하고 눈물이 나고, 마음이 괴로워질 때면 혼자 있고 싶다가도 친구들을 찾았다. 그리곤 그들에게 말했다. 너무 괴롭고 슬프다고. 우울하고 어쩔 땐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고, 이 순간이 난 영원할 것 같아서 겁이 난다고. 그때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며 우는 나에게 휴지를 건네고 같이 울어주고 내 곁에 머물며 나를 위로했다. 자주 우울해하는 나를 이해해 줬고, 자주 연락함에도 나의 안부를 물었다.

어느 날엔, 마음에 우울이 가득 차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돌아온 그 밤엔 그런 내 모습에 나조차 실망스러워서 친구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들은 다들 이해한다며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왜인지 아직도 마음에 부채감처럼 그 마음들이 남아 그들에게 여전히 미안하고 고맙다.


우울하기도 하면서 두려운 순간들이었다. 모든 것을 직면하며 나를 스쳐간 순간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하루들이었다. 어린 시절 죽음이라는 게 가장 두려웠던 건 이 세상에서 내 생각이 사라진다는 점이었는데, 막상 마음이 괴로워지니 머릿속을 메우고 있는 이 생각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했다. 지워지지도, 잊히지도 않은 기억들을 소화하지 못한 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는 일뿐이었다. 깊은 우울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내 곁에 머물던 친구들이 손을 뻗었다. 어느 날은 그 손을 놓아버리고 영영 우울에 잠식해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그들이 나의 손을 놓을까 두려웠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들이 내민 손을 나는 계속해서 붙잡으며 이 늪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들은 내가 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고 내가 괜찮아지기를 기다리며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다.


마음이 괴로워질 때면, 다정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을 하며 웃었던 순간들, 여행을 다녀왔던 시간들을 이야기하며 그날을 추억하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며 나눴던 대화들, 날씨 좋은 어느 날, 초록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순간, 나보다 앞서서 걷던 나의 작은 강아지가 뒤를 돌아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쳐다보던 순간들. 돌이켜보면 나의 다정한 순간들에는 늘 그들로 가득하다. 내 곁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던 순간들. 시간이 흐를수록 내 곁을 머물며 다정한 위로와 안부를, 일상의 단어들로 하루를 채워주는 이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다시 다가올 여름에는 나는 조금은, 후련한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따스한 햇빛을 충만히 느끼며 또 다른 여름을 기록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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