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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문 Apr 08. 2024

사월의 이름

종잡을 수 없는 이 계절을 봄이라고 부른다. 언젠가부터 봄은 시한부를 선고받은 계절처럼 느껴졌고 그 찰나를 누리기도 전에 봄은 빠르게 저물어갔다. 한동안 어떤 문장으로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될지 한참을 고민했다.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고 어떤 문장들은 지워지지도 못한 채 남아 있다. 첫 문장은 주로 봄, 혹은 사월이라는 단어로 시작되었다. 무수한 봄과, 무수한 사월들. 언젠가의 사월을 떠올렸다. 그날엔 사월에도 눈이 내렸다. 봄이라고, 겨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 애매한 계절 속에서 나는 자주 다짐했다.


사월은 내게 있어 다짐의 달이었다. 스물넷의 사월부터였을까. 이젠 겨우 짐작만 해볼 수 있는 사월 속에서 꼭 이루고 싶은 다짐들을 새겼다. 한낮의 햇빛은 따사로웠고 햇빛이 온몸을 파고들 때마다 나는 그 햇빛에 몸이 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언젠가의 사월은, 나아가는 달이었고 동시에 멈춰 있는 달이었으며 현재보단 지난 과거를 더 자주 떠올리며 그 기억으로 살아가는 달이었다.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월이었다. 매일, 매 순간 하루에도 수백 번 바뀌는 생각 속에서 두 눈을 더욱 꾹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생각을 지나치는 법이 내게 필요했다. 그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다짐이었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을 오래 붙잡아 두지 않고 지나치게 내버려 두는 일, 그 생각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것이 내게 필요했다. 나는 속으로 내가 한 다짐들을 되뇌며 사월을 걸었다. 사월을 걷는 동안 많은 계절들을 스쳤다.


창백한 풍경 위로 색이 더 해지고 몽우리진 목련이 어느새 톡 하고 잎을 터뜨렸다. 목련 나무를 오래 바라보며 저 잎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하얗고 끝이 동그란, 만지면 표면이 부드러워 조금이라도 손에 힘을 주면 금방 찢길 것 같은 잎을 보며 저 잎이 오랫동안 가지에 붙어 있기를 바랐다. 바람이 불면 두어 번 흔들리다 낙하하는 목련잎은 아주 가볍고, 가뿐하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떨어진 목련잎은 멀리서 보면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고, 하얗던 목련잎은 어느새 사람들의 발에 밟혀 본연의 색을 잃었다. 그러면 죽었다고 해야 하는 걸까. 죽어버린 목련 잎을 보며 겨울 내내 매만지던 다짐들을 떠올렸다.


여전히 내가 다짐한 것들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나는 여전히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지나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 생각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 번번이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지나치기만 하면 아무런 힘이 없을 그 생각들에 힘을 넣어준다. 어쩌면 너무 많은 힘을 넣어줘서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그 다짐들 덕에 조금은 달라진 게 있다면 의식해서라도 생각을 지나치려고 하고 있다. 자각하면서 그 생각들을 놓치려고 하고 있다. 생각을 덜어내고 무심코 떠오른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지 못하도록 가볍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의식해서라도 생각들을 내 몸 깊숙이 밀어내면 조금은 머릿속이 고요해진다.


생각들을 오래 붙잡아 두지 않으려는 건 결국 나를 위함이다. 그 생각들에 잠식당해 정확하게 앞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길 바라는 나의 오랜 다짐이다. 여전히 나는 또 다가온 사월 속에서, 봄 속에서 또 다짐한다. 나는 나를 오랫동안 지키고 싶다. 다시 다가올 또 다른 봄 속에서 이제 막 잎을 틔운 목련을 보고 싶다. 동시에 피어올라 함께 저무는 이 계절 속에서 여전히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지만, 글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오로지 이 글에만 집중한다. 오랫동안 해온 다짐이기에 그것들을 전부 지켜낼 순 없어도 지키려고 다시 한번 또 다짐은 한다. 그렇게 또 봄이 저물고 목련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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