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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문 Apr 20. 2024

기억의 모서리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 사이에서 가만히 머무른다. 다가올 시간들에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이 거짓말처럼 지워진다. 참 이상하지, 이상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신기루 혹은 환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꿈결이었을까. 유난히 짙은 초록을 품고 살아가던 계절이었을까.

언젠가 아주 먼 곳은 아니었지만, 처음 가본 그곳에서 나는 뒷자리에 앉아 창문 너머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당연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살아있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도 마찬가지이며 이름도, 삶도, 시간도 감히 유추할 수 없는 것들이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뒤돌아서면 잊었다. 당연했다. 근데 때론 그 당연함 깊은 곳에서 서글픔이 울컥 차올랐다.

여름인 줄 알았던 것들은 생각보다 주로 겨울에 머물렀다. 기억력이 좋다고 해서 장점은 크게 없다. 남들보다 더 많은 기억들을 안고 살아가는 기분이다. 기억하지 못해 서운한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 때론 버거웠다. 말투, 몸짓, 눈빛, 그날의 계절과 공간 사물들. 잊고 싶은 건 발악을 해도 잊히지 않는다. 잊으려 노력할수록 상기되는 기억들, 가끔은 머릿속에 손을 집어 넣고 싶었다.

기억을 뜯어낼 수 있다면. 잊고자 하면 떠오르고, 떠올리고자 하면 잊힌다. 후자는 대게 덜어낼 수 있는 마음들이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마음 같은 게 있을까. 낡고 오래된 마음들을 오히려 끌어안고 지냈던 시간들. 죽지 않는 마음속에서 좋지 않은 기억들은 때론 나를 위해 많은 각색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고 마냥 새롭진 않았다. 곱씹는 마음들과 시간들이 많았다. 입 안에 가득 찬 단어들은 입 밖으로 나가지 않고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잊고 싶다는 내 깊은 염원을 들어준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모두 지운다 하더라도 작은 기억이 하나라도 남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 아닐까.

만났고 마주쳤던 사람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오래 전의 사진을 들춰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 이상한 기분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는다. 삶의 경계가 이토록 모호했나. 초침소리가 서서히 기억을 부순다. 아주 서서히, 기억에도 모서리가 있다면, 기억이 모두 깎이는 날이 왔을 땐 모서리만 남아 내 일부가 되어갈까. 그때는 모든 걸 체념한 채로 잊히지 않는 기억들은 그런대로 내버려 두게 될까. 어쩌면 그때는 마음이 아니라 손에 그 모서리를 쥐고서 살아가게 될까.

그때도 이 기억들은 잊고 싶은 만큼, 간절하게 간직하고 싶은 기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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