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문 Apr 21. 2024

너는 아니라고 했지만

더 이상 어린애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이성보다 앞서는 감정에 굴복하거나 끝나간 것에 오랜 미련을 두지 않고 거절도 할 줄 알고 마음속에 쌓여가는 것들을 이야기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지난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 속에서 수없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문자를 보내지 않았거나 그날 집에 있었다거나 다른 말로 문자를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언제나 할 수 있었던 전화를 단 하루라도 시간을 내서 전화를 했더라면. 마주 앉아 있는 시간 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얼굴을 눈에 담았더라면. 부끄럽지만, 품에 꽉 안아볼걸. 모든 순간은 그다음이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다.


다음 같은 건 없었고 그 없음을 마주치는 순간 모든 것들이 공허하게 다가온다. 꽉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결국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는 빈껍데기였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품에 끌어안고서 무겁게 서 있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는데 왜 이렇게 무거울까. 왜 이렇게 버겁게만 느껴지는 걸까. 그날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그게 최선이었느냐고 되물었다. 어느 날엔 그렇다고 답했고 또 어떤 날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 보란 듯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이 나를 더 밑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 속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를 믿어주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마음이 자주 괴로웠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 그런 사람이면 어쩌지.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의심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 가득 차 숨을 내쉬지 못하면, 그런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다.


너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은 사람이야.

어둑하고 숯불향이 가득하던 작은 이자카야에서 그녀는 내 말을 가만히 듣다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저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모든 선택을 존중한다며, 돌아가도 같은 선택이겠지만, 그 속에서 네가 얻은 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가만가만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도, 끌어안고서 괴로워할 것도 없이 그저 지나치기만 하면 되는데 늘 그게 어렵다.


나를 믿어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변명을 했다. 확신도 주지 못하고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그뿐이었다. 여전히 어떤 식으로 그들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는지, 혹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말들이 마음을 들쑤신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마음들을 한 아름 끌어안고서 마냥 걷는다. 밤이 오고 하루가 간다. 그 단순함 속에서 내 마음은 단 하루도 단순했던 날이 없다



이전 10화 기억의 모서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