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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문 Apr 26. 2024

변질되는 것들

그러니까, 이곳은 아주 깊은 늪 같은 거야. 나는 바닥을 보며 걸을 수 없고 오직 짐작만 겨우 할 뿐이야. 언젠가 비가 내렸던 어느 밤에 우산도 없이 무작정 걸었어. 목적지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야. 어금니 사이에 낀 조각난 문장들을 혀 끝으로 문질렀어. 비릿한 피 맛이 나. 피와 침이 뒤섞여 입 안을 맴돌다 내 몸속으로 흘러 내려가. 어디로 가는 걸까. 그 피에도 네 말이 묻었고 나는 좀처럼 그걸 지울 생각이 없어. 너는 지겹다고 했지. 나의 고질적인 습관을. 나도 지겨워 사실은, 너는 끝내 믿지 않았지만.

푹 푹 잠기는 발 때문에 내가 걷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제대로 걷는지 말이야. 너를 찾아봐도 너는 어디에도 없고 네가 남긴 말만 내 어금니 사이에 남아 있어. 나는 너를 어쩌지도 못한 채 너의 조각들을 끌어 모았어. 네 말을 부수고 부러뜨리고 으깨고 조각내던 밤을 기억해. 피는 붉기만 한 게 아니야. 흘린다고 다 피는 아니야. 네가 울며 말했지.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울면서 말했잖아. 부러뜨리고 싶었어. 다 아는 척 떠들어대는 너의 입을, 네 입에 쏟아져 나오는 그 말들을. 너도 알잖아.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네 의지가 아니면 뭔데. 나 지금 걷고 있는 거 맞아? 입에서 자꾸 피 맛이 나. 삼켜지지 않고 입 속을 맴도는 걸까. 아니면 번지는 걸까. 너 내가 징그럽다고 했지. 나 사실 네가 한 모든 말 기억해. 내 몸이 지금보다 작고, 내 머리가 지금보다 짧고 내 손이 다 자라기 전을 기억해. 너 내 손에 아주 작은 쪽지를 쥐어주고 떠났지. 네 말에 취약한 거 알면서 내 주변을 맴돌았잖아. 네가 준 쪽지를 차마 펼치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했어. 글자를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그 글자가 곧 내가 된대. 저주 같던 소문들 사이로, 네가 돌아왔어. 서로가 서로의 팔에 손을 끼워 넣었던 날을 기억해. 네 주변에 나밖에 없던 그날. 네가 아주 오래 떠나 있다가 돌아온 그날. 너를 따라 걸었어. 너는 좀 더 앞서 걸었지. 그 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어. 너는 습관처럼 내뱉었지. 네가 앞서서 걷는 이유를. 네가 걷는 길이 곧 나의 길일 수밖에 없던 밤 속에서 나는 자주 추락하는 꿈을 꿨어. 떨어지고, 계속해서 떨어졌어. 누가 밀친 것도 같았는데.

내 몸이 그때보다 커지고, 내 머리가 그때보다 자라고, 내 손이 다 자라도 나는 여전해. 지겨울 정도로, 여전해. 깊고 짙은 늪 속을 걸으며 네 생각을 해. 네 이름을 기억해. 네가 한 모든 말들을 떠올려. 나 더 자라고 싶지 않아. 내 곁에 머물던 너의 모든 순간을 내가 어떻게 부정하겠어. 네가 나고, 내가 너이던 날들이 존재했는데.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던 시절을, 너는 기억할까.

입 속에 가득 차오른 게 너에 대한 기억인지, 너의 말인지, 결국 이 늪에 잠긴 건지 모르겠어. 나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울 수 있어. 피가 나지 않아도 피를 흘릴 수 있어. 빨갛게 부어오른 것에 바늘을 아주 깊이 찔러 넣는다. 너는 그런 거 모르지. 평생 알지 마. 나만 알게, 나만 널 기억할게.

이 늪에 너의 말을 묻고, 너의 기억을 묻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너였던 날은 없어도 네가 나였던 날은 무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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