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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문 Jun 16. 2024

여름 기억

여름 시리즈

창 틈 사이로 여름이 쏟아진다. 바뀐 잠자리에 새벽 내내 뒤척이다 느지막이 눈을 떴을 땐 이미 정오를 지나 있었다. 늘어지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우자 유월의 햇빛이 이불 위로 반짝였다. 달달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와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강아지들의 작은 목소리에 조금씩 정신이 차려진다. 느릿하게 방 안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바라본다. 이젠 기억도 나질 않는,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들 그리고 내 나이였을 아빠와 엄마의 얼굴이 걸려 있다. 방문 옆에는 지난여름 내가 찍어드렸던 할머니의 사진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왠지 할머니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꼭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건넬 것만 같다.


당연함과 익숙함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갑작스러운 부재가 당황스럽기만 하다. 연을 맺고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삶에 조금씩 물들다보면 수많은 기억 속에 한편을 차지한다. 내 곁을 맴도는 작은 우주 속에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의 부재를, 헤어짐을 오래 생각하지 못했다. 영원이란 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영원을 믿고 기대하는 사람이 나이기에. 평온하게 잠든 이의 얼굴을 쓰다듬고, 쓰다듬으며 꼭 내 말이 전달되기를 기도했다. 고운 얼굴과 작은 손등 위로, 마른 다리 위로 눈물 자국들이 동그랗게 물들었다.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예상치 못한 헤어짐에는 미련이 가득하다. 과거로 돌아가는 법을 알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현재에 계속해서 머물며 미래로 나아가는 걸 몹시 두려워한다. 흐르는 시간이 야속했고, 떠오른 해가, 흘러가는 구름이, 불어오지 않는 바람이 그저 무심하게만 느껴졌다.


지난한 여름을 겨우 보내고서, 다시 여름이다. 할머니를 보낸 여름이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곳곳에 놓여 있는 흔적들을 오래 바라보며 할머니를 생각했다. 왠지 저 귀퉁이를 돌면, 혹은 저 푸릇한 텃밭에서, 방에서, 어쩌면 소막에서 할머니가 걸어 나올 것 같다. 작고 작았던 할머니. 내가 오기 전부터 시루떡을 사 와서 얼려두던 할머니. 먹고 있어도 더 먹으라며 밥솥 근처에 계속 앉아 있던 할머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만원을 꺼내 내 손에 깊게 넣어주던 할머니. 밥 먹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며 빙긋 웃던 할머니.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처음으로 나이를 먹는 일이 두려워졌다. 앞으로 놓일 헤어짐의 순간을 내가 잘 버텨내고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나약한 생각만 든다. 내 곁에 오래, 오래 머물라는 말을 해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작년 여름 이후로 내 곁을 채우는 것들에 당연함을 느끼지 않는다. 당연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순간 여름을 떠올린다. 너무 익숙해져서 소홀했던 순간들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자세를 고쳐 앉는 것처럼 풀어진 마음들이 다시 자리를 찾는다.


작은 헤어짐 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여전히 나는 떠나는 법도 모른 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며 떠난 이들을 그리워한다. 그게 내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함께하는 거라고 한다.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그러다 보면 얼룩진 자책감과 후회와 미련 그리고 미안한 마음들이 조금은 옅어진다.

흔적이 오래 남는 여름 속에서, 쏟아지는 여름빛을 등지고서 할머니를 기억한다. 그렇게 함께하며 오래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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