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시리즈
그럴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
제자리를 찾아갔을 때, 제자리를 찾아간 것들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그때 비로소 혼자임을 느낀다. 끝없는 멸망 속에서 가만히 서서 두 눈을 끔뻑인다. 고개를 좌우로 살필 의지도 없다. 아주 간신히 두 눈을 굴려 보지만 그때뿐이다.
깊은 잠에 든 지 언제였더라. 그 생각을 하다 문득 너를 떠올렸다. 수많은 너를. 이곳에 있고 이곳에 없는 너를. 밤을 지새운 건 때론 너 때문이었고 잠에 이룰 수 있는 것도 너 덕이었다. 너와 내가 나눈 저녁의 인사는 아주 짧았고 단조로웠다. 그 단조로움 속에서 내가 느낀 건 평안이었을까, 불안이었을까. 안식처였을까 도피처였을까. 사랑이었을까 익숙함이었을까. 거짓이었을까 진심이었을까. 답을 내릴 수 없는 수많은 질문 속에서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질문과 답 사이에서 너는 영 관심이 없다. 너는 내가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질 않는다. 욕심이 무섭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력했다. 너는 사라지면 그만이었지만 또 언젠간 너를 대체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런 미래가 다가올까 두려워졌다. 너는 왜 늘 그런 모양일까. 어쩌면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자책과 원망 사이에서 우울은 더 깊어져간다.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을 너를 생각하고, 이 순간을 버텨내고 있을 나를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 너는 나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너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무너진 마음들을 너에게 오래, 기댔다. 나도 몰랐고 너도 몰랐다. 그 나무를 바라볼 때까지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 봄은, 오월은 그렇게 망설임 없이 저버렸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로,라고 묻는 다면 잘 모르겠다. 언제로 돌아가고 싶을까. 홀로 남겨진 순간엔 두 눈을 오래 감고 싶어 진다. 깨지 않고 오래 잠에 들고 싶다. 두 눈을 감으면 습관처럼 나오는 너의 얼굴을 이젠 잊고 싶다. 나무의 모습과 흩어지듯 불어오던 차가운 저녁 공기, 짙은 저녁 하늘 위로 수놓은 불빛들, 부딪쳐오는 눈동자와 눈동자. 약속하듯 걸고넘어지는 새끼손가락, 가느다란 웃음을 그려보는 너의 입꼬리, 조그맣게 들려오는 너의 웃음소리. 기억이 기억을 붙잡는다. 행복했을까. 그래서 여지껏 두 눈을 감으면 그날이 파도처럼 쏟아지는 걸까.
다시 제자리다. 늘 그렇듯. 혼자 덩그러니 남아 두 눈을 감았다 뜬다. 너는 없고 나는 잊혀진다. 잊고 싶은 기억들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오랜 자책으로 이어진다.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이 무섭다. 어느새 너는 내 습관이 되었고 나는 습관처럼 너를 생각한다. 네가 한 말 후회할까.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만.
홀로 버텨낸다. 혼자가 아님을 알지만, 결국엔 혼자다. 짙은 외로움이 형체 없이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