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시리즈
아득해진 것들 사이사이로 피어오르는 것들. 그것들에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드높은 나무를 바라보다 하늘보다 가까운 초록에 손을 뻗는다. 한쪽 눈을 감고 있으면 닿을 것 같았고 두 눈을 모두 뜨면 눈이 시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 영영 모르고 싶다.
살고 싶다는 나의 염원은 이미 저버린 지 오래였다.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괴로우면서도 여름을 사랑하는 건 꼭 살아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유월의 햇빛이 온몸에 콕콕 박힐 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람이 멈추었을 때, 긴 머리로 덮인 목덜미 사이로 땀이 흐를 때, 여름을 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 열기가 더해질 때, 속도 모른 채 나부끼는 초록 잎과 그늘을 찾을 수 없어 영영 햇빛 아래 놓인 기분 일 때. 꼭 그런 순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살아가고 있고 숨을 쉬고 있구나를 유월 속에서 느낀다.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읽다 그 속에서 수많은 여름을 마주했다. 꼭 여름은 적응될만하면 사그라들었고 늘 역대 더위라는 기록을 남긴 채로 저물어갔다. 사람도 그랬다. 자주 꿈에 나오는 사람에겐 이젠 그만 나와 달라며 부탁했고 사실 그건 어떤 소용도 없는 말이었다. 사람은 참 간사하지. 온 여름을 보여주겠다고 하면 그전부터 질려버리니까. 마치 다 보고 겪기라도 한 것처럼. 색을 잃어버린 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흑백 대화였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나는 흩어지는 글자들을 붙잡는 건지, 그들을 붙잡는 건지 헷갈렸고 비밀만 늘어갔다. 찬란하고 쨍한 색들로 얼룩진 이 계절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죄 없는 여름을 붙들고 늘어진다.
아득해진 기억들 사이사이로 나를 마주한다. 평생을 그렇게 자라온 나를 바라본다. 여름 속에서 햇빛을 피하지도 못하고 부지런히 걷다가 울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는 나를 마주친다. 조금은 이기적으로 살아 봐,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든 생각 말고.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빨갛기보단 오히려 창백했다. 수없이 쏟아지는 조언들 속에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 같아 슬퍼졌다. 평생을 그렇게 살지 못할 거야. 평생을.
끝나버린 것에는 꼭 이유가 있어야 했고 그 이유를 납득해야지만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젠 지나가버린 오랜 여름을 떠올린다.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도 그러했다. 너는 네 생각을 제일 안 하는구나. 지독히 들러붙는 이 더위 속에서 나는 여전하다.
17년도의 여름과 24년도의 여름. 아득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생명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질적으로 이어져온 뿌리들은 내 속에 오래 자리 잡아 열심히 꿈틀거린다. 실패했다고, 영영 그렇게 살 수 없을 거라는 오랜 믿음을 자꾸만 심어준다.